서울 사람들이 당일 여행으로 다녀올 수 있는 도시 중에서 춘천만큼 가깝고 편한 곳은 없을 것이다. 춘천은 아무래도 서울 부근의 다른 도시보다 번잡하지 않기 때문에, 설렘은 있지만 두렵지 않은 마음으로 접근할 수 있고, 또 그만큼 교통편도 편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왜 춘천이냐고 묻는다면, 서울 같은 거대 도시 속에서 시달리던 사람들이 이 작은 봄 같은 도시에서 또 다른 ‘봄’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해도 좋다.

 

경춘선의 끝인 춘천역. 70~80년대의 젊은이들이었던 지금의 50+들은 억눌린 젊음의 발산을 위해 경춘선 열차를 탔다.

 

조금은 지쳐있었나 봐 쫓기는 듯한 내 생활

아무 계획도 없이 무작정 몸을 부대어 보며

힘들게 올라탄 기차는 어딘고 하니 춘천 행

지난 일이 생각나 차라리 혼자도 좋겠네

춘천 가는 기차는 나를 데리고 가네...(후략)

- 김현철, <김현철 vol.1>의 수록곡 ‘춘천 가는 기차’의 가사 일부

 

이 노래가 한창 불리었던 당시뿐만 아니라 요즘까지도 춘천은, 노래의 가사가 보여주듯이, 지친 마음과 몸을 달래러 가는 곳 같다. 과거 70~80년대의 젊은이였던 지금의 50+세대들은 정치사회적으로 불우한 시절을 힘들게 억눌려 살았다. 심하게 말하면 억압 속에서 살았던 것이다. 그 어렵던 시절에 나름의 분출을 위한 한 가닥 빛이 바로 경춘선 기차를 타는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춘천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소양강처녀상. 춘천역에서 걸어서 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또 꼭 춘천이 아니더라도 경춘선은 다른 어느 노선보다도 젊음을 발산할 수 있는 곳이 많았기 때문에 당시의 젊은이들이 자주 이용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이를테면 대성리, 청평, 가평역 부근의 남이섬과 자라섬, 그리고 강촌역 주위의 강촌 유원지와 구곡폭포 등 많은 관광지와 유원지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으레 MT는 경춘선 기차를 타고 이곳들 중 한 곳으로 가곤 했다.

 

소양강다목적댐. 춘천 주위에는 춘천댐, 의암댐, 소양강댐, 그리고 화천댐 등 여러 댐들이 있어서 호반의 도시라는 이름이 어울린다.

 

그리고 그 경춘선의 끄트머리에 춘천이라는 봄 같은 도시가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 당시, 즉 지금의 50+세대들이 대학을 다닐 때, 기차를 타고 가던 춘천은 굉장히 먼 곳이었다. 춘천에 갔다가 당일 돌아오는 일은 좀체 쉬운 일이 아니었고, 으레 하룻밤을 자고 오는 곳으로 생각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차편은 많지 않았고, 돌아오는 막차도 일찍 끊겼기 때문이다.

희미한 기억이지만, 아마 마장동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춘천 가는 시외버스를 겨우 탈 수 있었던 것 같았는데,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국도의 사정은 경춘선 철로보다 더 형편없었던 것 같다. 80년대 후반에야 일부 4차로로 확장되었고 노선이 모두 확장된 것은 20세기 마지막 해의 일이었으니 말이다. 이처럼 춘천 가는 길은 한겨울에 봄을 기다리는 것처럼 멀고도 고된 길이었다.

오늘날은 전철이 연결되고(2010), ITX 청춘열차(2012)도 다닌다. 고속도로도 개통되어 예전에 비하면 상전벽해와 같은 상황이 되었을 정도로 많은 통행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렇게 되면서 춘천은 마치 서울의 바로 옆 동네처럼 느껴지게 되었다. 수도권 전철 계획에 따라 이제 춘천은 수도권에 편입된 것이다.

 

호수를 둘러싸고 나 있는 자전거길에서 사람들이 라이딩을 즐기고 있다.

 

경제 사정이 나아지고 운동이나 치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사람들은 자전거를 이용하여 춘천에 오간다. 전철이 연결되면서 도시의 삶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노래 가사의 주인공이 되어 자전거를 전철에 태우고 춘천에 갔다. 그리고 춘천이 자랑하는 호반의 자전거길에서 충분히 라이딩을 즐긴 후 다시 자전거를 전철에 태워 되돌아온다. 어떤 사람은 한강까지 연결되어 있는 자전거길을 따라 직접 타고 돌아오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호수를 끼고 도는 그 자전거길에 춘천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박사마을이 있다. 춘천의 명소는 많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의미 있는 곳은 서면의 박사마을이다. 박사마을 사람들은 거반이 봄여름에 감자 농사, 가을에는 배추 농사를 하여 자녀들을 교육시켰다. 지금은 4차로 다리(신매대교)가 생겨서 차로 물건을 나르고 있지만, 몇 십 년 전만 해도 그들은 손수 키운 감자와 배추 등의 채소들을 새벽의 찬 공기를 가르며 배로 실어 강 건너편 번개시장에  와서 팔았다.

 

춘천 서면의 한 배추밭. 서면 사람들은 봄여름에 감자농사, 가을에 배추농사를 하여 모은 돈으로 자녀들을 교육시켰다.

 

서면 사람들은 그렇게 어렵고 힘들게 번 돈으로 자녀들을 교육하며 하나 둘씩 박사를 만들었다. 상아탑이라고도 하는 대학을 우골탑이라고도 하던 시절에 부모들의 힘든 노고를 가슴 깊이 새기며 공부한 그곳 출신의 남녀 젊은이들은 앞 다투어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곳에서 배출된 박사(명예박사 포함)는 169명(2019년 3월 31일 통계)이나 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 기를 받기 위해 이 마을을 방문하는 신혼부부들도 많고, 또 공부하는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방문하는 학부모들도 많다고 한다.

 

   

춘천 서면의 박사마을 선양탑의 표지판과 박사마을 선양탑 그리고 강 건너 번개시장의 모습

 

춘천의 대표음식인 막국수를 직접 만들어볼 수 있는 춘천막국수체험박물관의 모습. 이 모습은 막국수 틀의 형상을 따라 만든 것이다.

 

춘천이라는 이름은 ‘따뜻함’이나 ‘봄’을 의미한다. 그러나 강원도에서 겨울을 보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그 곳이 따뜻한 남쪽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안다. 어쩌면 춘천은 매서운 동장군이 기승을 부렸던 엄동설한이 지나고 서쪽의 평야지대에서 따뜻한 봄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춥기만 한 곳이어서 따뜻함을 간절히 기다리며 봄내(춘천)이라고 이름 붙였을지도 모르겠다. 강 옆에 있다 보니 겨울이 더 길게만 느껴졌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 선조들이 설이 지난 정월 한겨울에 봄을 앞세웠던(입춘) 것과 같은 맥락으로 그 이름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춘천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분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춘천에서 겨울을 나본 적이 있는 외지 사람은 그 매서운 추위에 때문에라도 어서 봄이 오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춘천의 한 자전거길의 일부. ‘천천히’라는 표지판이 의미 있어 보인다.

 

 사람들이 춘천에 가는 것은 단지 아름다운 호수를 끼고 도는 멋진 풍광의 자전거길과 서울에서는 맛볼 수 없는 맑은 공기 때문만은 아니다. 춘천의 자랑거리 음식인 푸짐하고 고소한 닭갈비와 시원한 막국수가 중요한 견인을 하기 때문만도 아니다. 주말이나 휴일이면 기차의 좌석 표를 구할 수 없고, 전철은 만원을 이루며, 고속도로와 국도를 이용하는 차량들이 거북이처럼 속 터지게 느릿느릿 거리며 춘천에 가는 이유는 그곳에 자신의 ‘봄’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봄을 만나 상쾌한 기분으로 다시 힘든 서울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