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68919. 하늘로 차들이 지나는 길이 서울에 등장했습니다. 지상에도 차가 많지 않던 시절, 서울 도심 가까이 고가도로(高架道路)라는 이름의 해괴한(?) 길이 생겼습니다. 서울 서소문과 아현동을 가로지르는 아현고가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국민학교에 다니고 있던 나와 동무들은 그 길이 열린 날, 그 길을 구경하러 갔습니다. 난생처음 보는 고가도로는 서울내기인 우리들 눈에도 신기하고 또 신기했습니다. 어떻게 하늘로 차가 다니지?!

우리나라에서 처음 놓인 이 고가를 시작으로 19703월 퇴계로에서 동자동 구간의 서울역 고가도로가 개통되고 1975년 만리재에서 남대문시장까지를 포함한 서울역고가도로가 완공됐습니다. 1971815일에는 복개된 청계천 하늘을 길게 덮은 청계고가도로가 세워졌지요.

 

우후죽순, 그 길들은 성장하는 서울의 상징이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서울은 모습을 바꿨습니다. 지상에 납작 엎드린 것은 죄악이라는 듯, 그렇게 서울은 위로 위로 솟구쳐만 갔습니다.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 우리가 저와 같아서 /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 일이 끝나 저물어 /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 나는 돌아갈 뿐이다 /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 샛강 바닥 썩은 물에 / 달이 뜨는구나 / 우리가 저와 같아서 /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저문 강에 삽을 씻고(창작과비평사, 1978)

 

당시 하늘길과 함께 지하길도 뚫렸습니다. 서울지하철 1호선 개통이 1974년도. 시골에서는 땅 위 레일 위를 달리는 기차도 구경하지 못했던 사람이 더 많았던 시절에 기차가 땅 속을 달리다니. 다들 거짓말이라고 했습니다.

 

그 길들이 지어진 1960~70년대는 이제 까마득한 과거가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길도 나이를 먹었습니다. 시간을 견디는 것들이 많지 않지만, 인간이 만든 것들은 그 속도가 더 빠릅니다. 이십일 세기 들어 유난히 옛 길들의 철거 혹은 변화 소식이 줄을 잇습니다. 어떤 길을 헐리고-아현고가도로는 201429, 청계고가도로는 그보다 앞선 2003630일 철거됐습니다.

 

어떤 길은 모습을 바꾸었습니다모습을 달리한 것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서울로 7017’. 차도로서 그 역할을 다한 서울역 고가는 2017520일 보강공사를 거쳐 사람 길이 됐습니다. 1970년 지어져 2017년에 다시 태어났다고 서울로 7017’이란 이름을 달았습니다. 새 길이 열린 지 만 두 해를 넘기면서 서울로 주변도 많이 변했습니다. 인근 중림동, 만리동, 봉래동, 청파동, 서계동 일대는 부쩍 외국인의 발길이 잦아졌습니다.

 

서울 만리동 고개는 모래언덕이었다 말라비틀어진 선인장처럼 듬성듬성 막힌 가로등은 겨우 희미한 빛줄기를 뱉어냈다 한 무리 전갈 떼는 햇볕을 피해 미싱을 돌리러 지하로 갔다 타르륵 타르륵, 실타래 풀리는 소리만 이따금씩 바람에 실려왔다

-서기웅 사막부분, 만리동 고개를 넘어가는 낙타(문학의전당, 2011)

 

성주괴공(成住壞空). 형태를 지닌 것들은 생기고, 머물고, 부서지고, 끝내는 사라지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못합니다. 생각하면 시간만큼 정직한 것도 없습니다. 시간은 단지 흘러갈 뿐이지만, 그 시간 속에 놓여있는 것들은 시간에 따라 사라지거나 변화합니다. 이를테면 그것은 운명입니다. 생긴 바가 있으면 사라지는 것이 자연입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이들 서울의 고가도로들은 제 나이 여덟 살 무렵부터 생겨나 제가 쉰 살을 넘기기까지 존재했습니다. 저와 함께 나이를 먹다 이제는 사라졌거나 모습을 바꾸었습니다. 대개는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져 언제까지나 지속할 것 같던 것들이 세월의 풍화를 견디지 못하고 사라져 가는 것을 보는 일은 쓸쓸합니다. 그만큼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는 것이고, 그만큼 우리도 속절없이 늙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일이 될 테니 말입니다. 이제 사라진 그 길들을 다시 만날 길은 없습니다. 사라진 길들을 만날 수 있는 건 과거의 기억뿐입니다.

 

밤 사이, 그래 대문들도 안녕하구나 / 도로도, 도로를 달리는 차들도 / 차의 바퀴도, 차 안의 의자도 / 光化門도 덕수궁도 안녕하구나 // 어째서 그러나 안녕한 것이 이토록 나의 눈에는 생소하냐 / 어째서 안녕한 것이 이다지도 나의 눈에는 우스꽝스런 풍경이냐 / 文化史的으로 본다면 안녕과 안녕 사이로 흐르는 / 저것은 保守主義의 징그러운 미소인데 // 안녕한 벽, 안녕한 뜰, 안녕한 문짝 / 그것 말고도 안녕한 창문, 안녕한 창문 사이로 언뜻 보여주고 가는 안녕한 性戱... / 어째서 이토록 다들 안녕한 것이 나에게는 생소하냐

-오규원 우리 시대의 純粹詩부분, 문학과지성 시인선100 김주연 길이 끝난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문학과지성사, 1990)

 

지금도 서울은 바뀌고 있습니다. 길이 없어진 자리에는 다른 길들이 생겨나고, “길이 끝난 곳에서어김없이 길은 다시 시작되고있습니다. 아마도 지금 길들의 마지막을 제가 살아서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때도 서울은 남아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겠지요. 그때 사람들도 골똘한 표정으로 과거를 돌아볼 테지요. 지금 서울의 모습이 과거로 넘어갔을 때, 아니 멀지도 않은 스무 해, 서른 해 뒤의 서울은 어떤 모습일까요. 그 모습이 문득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