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쯤으로 기억한다. 어느 날 아침, 광화문 네거리에 ‘선영아 사랑해’라는 플래카드가 봄바람에 펄럭거렸다. 매일 아침 광화문을 지나던 때라 사뭇 그 사건이 궁금했다. ‘누가 사랑 고백을 하나 보다. 선영이이라는 아가씨가 광화문 우체국이나 교보문고에 근무 하나?’ 온갖 상상이 아침마다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뒤이어 서울 거리뿐 아니라 전국 주요 도시에도 플래카드가 나붙었다. 사람들은 선영이의 정체에 관심을 쏟았고, 선영이는 입에서 입을 거치면서 잊힌 여자의 대명사쯤으로 부각되었다. 결국 어느 포털사이트의 광고전략 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광화문 거리를 달리는 버스 광고판에도, 광화문우체국 옆길에도 복고풍 사랑 고백이 봄꽃처럼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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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니, 선영아≫ (출처 : 예스24) 

 

김연수 작가의≪사랑이라니, 선영아≫는 대학 동창인 광수와 선영의 결혼으로 시작된다. 선영이란 여자를 중심으로 대학동기 광수와 진우의 삼각관계를 큰 축으로 세 인물이 사랑에 반응하는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두 남자는 선영이를 놓고 서로를 질투한다. 광수의 질투는 과거를 향해 있고, 진우의 질투는 현재를 향한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작가는 상당히 많은 소재들을 대중문화에서 빌려온다. ‘선영아 사랑해’가 아닌 ‘사랑이라니, 선영아’로 묘한 반전을 주기도 한다. 광수의 사랑과 진우의 사랑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 듯하다. 그런 덕분인지 이 소설을 읽다 보면 나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고 주변의 익숙한 거리와 텍스트들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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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을 지나는 '선영아 사랑해' 버스 (출처 : 구글)
 

11월의 어느 일요일 오후, 광수는 꽃보다 아름다운 신부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렇다면 꽃이 아니라 신부만 바라봤더라면 좋았을 텐데, 광수는 그만 부케를 보고 말았다. 친구 명희를 향해 선영이 던지려던 부케의 오른쪽 윗부분에 부러진 채 달랑달랑 매달린 팔레노프시스 한 송이가 광수의 마음에 재를 뿌렸다. 그건 새로 산 스웨터의 오른쪽 어깨 부분에 삐져나온 털실 한 올과 비슷했다.

p.16

 

화근은 부러진 팔레노프시스 꽃대였다. 쫀쫀하기 짝이 없는 광수는 그 사실에 집착하며 찝찝해 했다. 부케에 매달린 팔레노프시스 한 송이, 가냘픈 꽃대가 하필이면 그때 부러졌을까. 동양식 이름은 호접(胡蝶)은 아주 아름다운 이름이지만 학명은 그리스어 Phalaina(나비)라는 뜻과 Opsis(같다)의 합성어인 팔레노프시스로 꽃의 형태가 나비와 같은 데서 유래 됐다. 아름다운 꽃에는 정말 아름다운 나비가 날아오는 법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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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상가 (출처 : 서울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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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접란 (출처 : 구글)
 

“어떻게 하면 이 꽃대가 꺾어지죠?”

회사 일을 마치고 강남터미널 지하 꽃가게를 찾은 광수가 꽃잎 끝에서부터 중심부를 향해 보라색에서 하얀색으로 그라데이션을 보이는 호접란의 꽃대를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으로 자분거리며 가게 주인에게 물었다.

“아따, 이 양반아! 꽃대란 이리 호리호리 가는 것잉께 꺾어지는 거지. 그걸 모른다요?”

오른쪽 팔뚝에 자주색 토시를 낀 가게 주인이 꽃들을 향해 분무기로 물을 내뿜으면서 본숭만숭 내뱉었다.

“아니, 제 말은 가만히 들고 있는 꽃대가 왜 꺾어지냐는 말이죠.”

p.44

 

결혼식을 올리는 순간부터 광수는 진우와 선영의 사이를 의심한다. ‘왜 부케의 꽃이 부러졌나?’ 결혼식장에서 진우와 찍은 사진을 보면서 왠지 선영의 볼이 붉어져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광수가 가장 미쳐버릴 것은 진우가 결혼식장에서 얄미운 사람을 두 번이나 불렀다는 사실이다. 광수는 쫀쫀하긴 하지만 선영에 모든 걸 건다. 아무리 치사하고 지질해 보여도 선영에게 끝까지 매달린다. 그렇지만 ‘둘이 대체 무슨 사이인지. 둘이 잤는지 안 잤는지’ 머릿속으로 수 백 번을 되돌리며 의심의 끈을 놓지 않는다. 피로연 자리에서도, 진우를 찾아가서도, 노래방에서 얄미운 사람만 밑도 끝도 없이 부르면서 밑바닥까지 지질해진다. 사랑을 하려면 아무리 창피하고 부끄러워도 일단 다 보여줘야 한다. 아니 다 보여줄 수밖에 없다. 상대방이 나의 모든 걸 알고 싶어 하는데, 괜찮은 모습이나 지질한 모습의 구분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처음에는 두 사람이 함께 빠져 들어 모든 게 끝나고 나면 각자 혼자 힘으로 빠져나와야 하는 것. 그 구지레한 과정을 통해 자신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뼛속 깊이 알게 되는 것. 그게 사랑이다.

p.64

 

소설에는 질투에 빠진 두 남자가 나온다. 하필이면 결혼식 날 질투를 시작한 광수와, 오래전에 사귀었던 선영이가 광수의 아내가 된다는 소식에 새삼 질투를 시작한 진우, 질투라는 감정은 두 남자의 사랑도 변화시킨다. 광수는 낭만적 사랑을 믿는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고 묻는 남자다. 진우는 다르다. 그와 반대로 냉정하고 속물적이다. 사랑에 관한 그의 생각은 ‘사랑이라니’다. 두 사람 역시 실은 별 차이가 없다. 소설 전반에는 진우가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묻는 광수를 비아냥거리지만, 후반부에 가서는 선영의 뿌리침에 좌절하여 진우도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소리친다. 소설을 읽다가 어느 부분에서는 그들과 한패가 되어 킥킥거리다 가슴 서늘한 현실 앞에 고개를 끄덕인다.

 

책을 몇 권 사 든 진우는 한국통신 앞에서 마을버스를 기다리면서 맞은편 세종문화회관의 디지털 시계를 골똘히 바라보다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미국대사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걸어가면서 진우는 경상남도 거제군 일운면 선창리 지심도에 피어날 동백과 전라남도 광양군 다압면 섬진리 매화마을에 피어날 매화와 전라남도 구례군 산동면 위안리 상위마을에 피어날 산수유를 차례로 생각했다. 진우에게 봄은 그 순서대로 찾아왔다. 진우는 과연 봄이 어디까지 온 것인지 궁금했다.

미국 대사관과 문화관광부와 시민 열린마당을 지나 동십자각 지하보도로 들어간 진우는 잠시 뒤, 건너편 계단을 밟고 올라왔다. 광화문 뒤에 있는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끊고 경복궁 안으로 들어간 진우는 하릴없이 궁전 건물과 문마다 매달린 이름표를 하나하나 읽으며 걸었다. 근정문, 근정전, 만춘전, 사정전, 천추전, 경회루, 봄바람에 여우 눈물 흘린다더니 경회루 연못까지 이르러 가만히 서 있자니 진우의 몸이 으슬거렸다.

p.171~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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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사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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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교보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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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문화회관

 

봄이 어디까지 오고 있는지 알 수 없듯이, 우리는 자신에게 당도할 사랑이 어디쯤에서 손짓하는지 모른다. ‘선영아 사랑해’라는 말랑말랑 고백이나 낭만이 한차례 지나간 광화문네거리에도 봄은 또 올 것이다. 봄과 사랑은 서로 앞 뒤 등을 맞대고 있는 한 벌의 옷처럼 느껴진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눈 내린 광화문 네거리 이곳에 이렇게 다시 찾아와요…….’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든가. 광수와 팔레노프시스 부케를 든 선영이 옆에 아이들이 올망졸망 보인다. 뒤이어 곤룡포를 걸치고, 왕비도 없이 상감으로 변신한 진우가 육조거리를 휘저으며 행차길에 오른다.

 

‘사랑했던 기억만은 영수증처럼 우리에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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