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대든 문학은 사회의 거울이다. 졸업시즌이 곧 다가오고 있다. 언제부턴가 청년들은 자신들의 삶을 한없이 유예하며, 발 디딜 곳 없는 자리를 찾아 숨 가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들은 너도나도 외쳐대는 희망을, 그 흔하게 굴러다니는 희망을 아직 본 적이 없다. 밤새도록 보잘 것 없는 이력서를 정성껏 써놓고 눈을 감은 채 긴 숨으로 아침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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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광 작가의서울 눈, 거의 내리지 않음광호라는 청년을 통해 도시생활의 좌절을 핍진하게 그리고 있다. 주인공 광호는 선배 소개로 새로운 직장에 면접 보려고 난생처음 여의도를 찾는다.

 

광호는 오늘 여의도에 처음 와보았다. 지하철역에서 지상으로 나오자, 우죽우죽 솟은 (광고방송에 단골로 등장하는 대기업 상호를 마빡에 붙인) 빌딩들이 꺼져! 너 같은 촌뜨기가 발붙일 데가 아냐하고 손가락질을 해대는 것 같았다. 어디를 가나 볼 수밖에 없는 빌딩이었지만, 여의도의 빌딩들은 유난하게 느껴졌다. 유행가 소절처럼 가까이 하기에 너무 멀어 보였다. 앞으로 저 빌딩숲에서 직장인으로 살아야 한다니, 겁이 더럭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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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여 동안 제법 소신 있게 대답을 했지만 면접을 보는 이사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고 선배와 안면이 있다는 대리마저도 당혹스럽게 한다. 운전을 못한다는 말에 마치 범죄라도 되는 표정을 지으며 , 운전을 못할 수도 있지. 서울 지리는 잘 알겠지요?’ 라고 묻는다. 선배가 알려준 대로라면 운전이나 서울 지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업무라고 광호는 알고 있다. 무슨 영문인지 이사는 서울 지리를 훤히 알고 있어야한다고 쐐기를 박는다. 광호는 충청도가 고향이라 서울을 잘 모른다. 이사의 허허, 웃는 웃음에 광호는 알아차린다. 한두 번 당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면접을 기울어지고 밀린 방세 생각에 간절하게 매달리며 외쳐본다. “잘 할 수 있습니다. 제 체질에 부합한 업무입니다!”

 

"분명히 해주세요. 한 지붕 밑에 살면서 이런 얘기 저도 하고 싶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아무 말도 못하고 계셔서 할 수 없이 제가 말하는 거예요. 형도 짐작하셨겠지만, 우리 가족은 이 방 사글세 받아서 살아 간다구요. 영세민이라고 조금 나오는 돈, 내가 책 날라서 몇푼 버는 돈, 이걸로 누워 있는 엄마 약값 대기도 빠듯하다고요.”

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그래 어머니는 좀?”

여전하시죠. 죽을 때까지 그 모양으로 살아야 할 팔자죠. ……우리 집구석도 참 웃기는 집구석이죠. 어머니는 식물인간,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 그리고 나는, 나는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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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무슨 영문인지 앞 이야기와 뒷이야기가 연결이 안 되며 뚝뚝 끊어진다. 예상치 못한 인물들이 돌발적으로 뛰어 들어온다. 친절하지 않은 작법에는 작가의 의도가 분명 숨어있을 터, 주인공 광호의 일상이 매끄럽게 안정적이지 못하고 불안한 상태를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하는 나름의 이유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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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오갈 데 없이 시간을 보내기에 딱 좋은 공간이 있다. 쾌적한 냉난방이 잘 되어 있으며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도서관이다. 광호는 날마다 도서관에 가서 시간을 보낸다. 소설을 읽다가 답답하면 도서관 앞 연못에 앉아 금붕어와 논다. 직장이 없지만 날마다 출근하듯 갈 곳이 생긴 광호에게 도서관만큼 환상적인 곳이 없다.

 

서울의 이 도서관과 첫 대면을 했을 때 무척 생경했다. 촌에서 건물만 달랑 서 있는 도서관만 보다가, 아버지 소유의 논마지기보다 더 넓은 정원을 거느린 도서관을 보자, 헛웃음이 나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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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호는 2주일째 소설 읽기는 팽개치고 도서관에 가면 종일 어떤 여자 앞을 알짱거린다. 드디어 여자가 광호에게 말을 건넨다. ‘도서관 왔으면 공부나 할 것이지 촌놈 주제에……하며 타박을 한다. 순순히 물러 설 광호가 아니다. 스물다섯 살, 서초해. 어설프지만 여자 꼬이는 작업에 최선을 다한다.

 

더불어 바람을 쐬면 어떨까 해서.”

바람?”

, 강바람 말이에요.”

지금 한강 나루터에라도 가자는 거예요?”

, 바로 그거예요.”

그러니까 나랑 연애하고 싶다 이거군요?”

광호는 이런 식으로 말하는 여자가 숫제 처음이었다.

그렇죠, .……왜 그런 눈으로 바라보십니까.”

내가 보기엔 소 팔고 논 팔아 대학 졸업시켜준 농부님의 아드님쯤 되시는 것 같은데, 마치 일제 강점기 친일지주의 자제분처럼 폼 잡고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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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기수가 광호 사정이 딱해보였던지 일거리를 연결해줬다. 안 해 본 일이지만 원고료 받으면 술 산다는 광호의 빈 약속에 그는 방세도 못 내는 주제에……라며 호되게 꾸짖었다. 의뢰 받은 일을 하려고 병원에 들러 레지던트를 상대로 인터뷰하는 과정을 통해 광호는 세상 똑똑하고 모두가 선망하는 의사의 삶이라는 것이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 레지던트에게서도 지친 냄새가 났다. 열심히 살 수 밖에 없는 것과 열심히 살 수가 없는 것은 종이 한 장 차이인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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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호는 선배가 두 번째로 소개해준 회사에 면접을 갔다. 알아보고는 있다 만은 도통 자리가 없다는 선배의 말이 꺼림칙했지만 뭐라도 해야만 하는 절박함 앞에 광호는 서 있었다. 이제는 면접 보는데 웬만큼 이력이 날만하지만, 광호는 처음 대하는 것처럼 긴장을 했다.

 

사장의 긴 훈계를 들으면서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 못한 것은 취직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을 것이다. 면접을 끝내고 A4용지 열 장쯤 되는 무슨 논설문 비슷한 글을 교정 정도가 아니라, 윤문가지 힘닿는 대로 해보라는 지시를 받았다. 광호가 사장실을 나오는 것과 동시에 한 여자가 들어갔다. 면접자가 까마득히 줄을 서 있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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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접에서 보기 좋게 떨어졌지만, ‘기대하지 마라. 다닐 데가 못 된다는 선배의 말 한마디에 광호는 그나마 위로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그래도 이전의 삶처럼 우중충 하지 않은 것은 도서관에서 만난 초해와의 만남이 줄기차게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붙어 다니는 초해 덕분에, 광호는 이제 도서관에서 외롭지 않다. 광호는 급기야 선원을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지원했다가 서울역으로 나오라는 연락을 받고 고민하다 초해에게 털어 놓는다. 배타서 돈을 벌 수 없고 경험은 되겠지, 라는 초해의 판단에 못난이가 된 듯하다. 자신의 삶을 희생해서 자식을 가르친 아버지를 생각하며 어쭙잖은 감상에 빠진다. 그나마 초혜가 있어 고마운 겨울인데 참말로 올 겨울에는 눈이 지독히 가물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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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이 공사 현장에 나간 광호는 못질도 제대로 못해 지청구를 듣지만 일당이라는 것을 받는다. 손을 다쳐 많이 부어올랐지만 이력이 붙을 때까지 열흘만 죽어라 해보기로 한다. ‘처음에는 누구나 다 그런 거야.’ 쉼 없는 반복은 노가다판에서도 통하는 불변의 진리이다.

 

광호와 초해는 북한산을 오르고 있었다. 눈하고는 너무 먼 겨울이어서 그런지, 산에서 흰 구석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빠 돌아가신 뒤로는 거의 산에 안 올랐어.”

광호는 초해 아버지가 부재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생각해보면 초해로부터 그녀의 가정사를 들어본 적이 없다.

아빠와 산 타던 가락이 남아 있는가 봐. 아빠가 생각나네. 산에 오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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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해야 만질 수 있는 돈이라며 광호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못질을 한다는 게 집게손가락을 치는 바람에 광호의 손가락이 뻥튀기처럼 부어있다. ‘그냥 돌아오지 왜 참았냐.’ 는 초해의 말에 버스비, 그러니까 집으로 돌아올 차비가 없었다는 말을 한다.

기수와 광호는 삭막한 서울에서 그나마 언덕처럼 등비비고 살아 위로가 되는 사이다. 술 한 잔에 취할 듯 말 듯 한 기분을 빌어 기수가 광호에게 말한다.

 

우리는 서울에서 개겨야 돼. 그게 농촌 출신들의 숙명이야. 대학 나온 우리가 농촌에서 뭘 할 수가 있지? 어떻게서든 서울에서 살아남아야 돼. 우리가 개겨볼 데는 서울 밖에 없어. 서울만이 우리에게 관대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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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세, 카드빚과 돌려막기, 버스비, 전철 티켓…… 시종일관 그저 웃을 수만은 없는 이야기이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임시적 존재이자 비정규적 존재이고 최종적으로는 실업자이다. 소설은 취업 문제와 청년 백수의 절망을 광호라는 인물을 통해 냉소적 어법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몹쓸 세상에 던져진 세상의 모든 광호들에게 올 겨울에는 하얀 눈이 펑펑 쏟아졌으면 한다. <오늘의 일기예보> 서울, 함박눈 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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