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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마다 11월이 되면 주렁주렁 매달린 빨간 사과를 거두느라 무척이나 바쁩니다. © 50+시민기자단 이경걸 기자 
 

 

나는 지금 경북 영천시 자양면 보현리에 있는 사과 농장에 있습니다. 보현리는 밤이 깊어갈수록 별들이 초롱초롱해지는 산골 마을입니다. 그런 별들 옆에 떠 있는 둥근 달은 어째서 그리도 밝은지 별과 달이 어우러진 보현리의 밤하늘은 무척이나 아름답습니다.

 

드넓은 농장에서 몇 날 며칠 사과를 따는 일은 매우 고달픈 일입니다. 하지만 한 해의 결실을 거두는 일이라 즐겁고 뿌듯합니다. 하루의 일을 마치고 어스름하게 어둠이 내려앉은 텅 빈 농장을 거닐며 내가 지금 이곳에서 서성거리는 내력을 되짚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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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과를 모두 따낸 텅 빈 농장은 을씨년스럽습니다. 그렇지만 한 해를 되돌아보며 천천히 걷기에 딱 어울리는 운치가 있습니다. © 50+시민기자단 이경걸 기자 

 

자칭 ‘풋농부’가 되었습니다

그 무렵 나는 50대 중반이었습니다. 충무로에서 자그마한 편집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냥저냥 먹고 살 정도는 되었습니다. 그랬는데 어느 순간부터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게 지긋지긋해졌고, 지금까지 해왔던 생업(生業)과 상관없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고민하고 망설이는 사이 사무실을 접을 수밖에 없는 사정이 생겼습니다. 내가 아팠습니다.

 

오랜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몸이 회복되었습니다. 이제는 예전의 생업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새로운 일을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생각에 한동안 풀죽은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영천에서 사과 농장을 하는 작은 형님에게 기대어 농부가 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시골에서 전업 농부로 살아갈 자신이 없었습니다. 결국 서울과 영천을 번갈아 오가면서 형님을 도와 사과 농사를 짓는 농부인 듯 농부 아닌 농부가 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자칭 ‘풋농부’가 되었습니다.

 

풋농부가 되어서 한 일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적과(摘果)’였습니다. 적과는 열매를 솎아내는 일인데, 그 당시의 생각과 느낌을 블로그에 이렇게 적어놓았습니다.

 

거의 반 달(두 주일 정도)을 꼬박 매달려 기어이(?) 적과(摘果)를 해냈다.

힘이 들어 죽겠는 일은 아니지만,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서 천천히, 느긋하게 시간을 들여 정성을 보탰다.


적과(摘果)는 말 그대로 열매를 솎아내는 일이다.

이걸 좀 멋지게 표현하자면, ‘지금, 11월의 선물을 선택한다’쯤 될까?

- 적과(摘果)의 위기(?)를 넘긴 사과를 수확하는 때가 11월이니까….

 

적과(摘果)를 잘하려면 어느 정도의 모진 마음과 과감한 가위질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

새끼손가락 한마디 정도의 크기로, 적게는 서너 개에서 많게는 대여섯 개씩 올망졸망 송이로 매달려 있는 열매 중에서 어떤 열매는 남기고 어떤 열매는 싹둑 잘라버리는 일은 결코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다.

아까워도 잘라야 하고, 안쓰러워도 잘라야 하고, 어떤 열매를 선택하나 고민도 해야 한다.


적과(摘果)를 잘하려면 제대로 갖춰서 입고, 먹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이따금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와 사과나무 이파리가 초록~ 초록~ 오글거리는 한낮에는 손수건을 머리 위에 펼쳐놓고 밀짚모자를 푹 눌러 써서 햇볕을 피하는 게 상책이다.

대략 한 시간쯤 쉬지 않고 적과를 하고 나면 시원한 얼음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게 되는데 이때 마시는 얼음물은 그야말로 꿀맛이니 넉넉하게 준비해 두어야 한다.


여기에 더하여 아는 노래보다는 처음 듣는 노래가 더 많은 ‘트로트 1000곡’이나 장사익 님, 백지영 님, 박강성 님, 김란영 님, 알리 님 등등의 노래 모음도 적과(摘果)의 고단함과 지루함을 달래주는 필수 아이템이므로 미리 챙겨두어야 한다.


드디어 적과(摘果)를 마무리했다.

솎아질 수도 있었으나, 인연이 각별하여 살아남은 나의 열매들이여!

11월의 어느 날 가운데 가장 좋은 날을 골라 우리 만나자!!

그리고 풋농부가 되고 나서 첫 수확을 했을 때는 조금이나마 품위(?) 있게 사과를 팔아먹을 속셈으로 이렇게 적어 아는 분들에게 카톡으로 기별했습니다.

 

안녕하신지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데, 느닷없이 기별을 드려 언짢으신 건 아닌지요?

잘 지내고 계시는지 안부를 여쭈면서, 제 인사와 소식도 전할 겸 카톡을 드립니다.


오래전부터 허다한 날들을 망설이며 농부가 되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왔는데 드디어 올가을에 이르러 어설프게나마 초보 농부가 되어 소담스러운 사과를 수확하게 되었습니다.

사과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애지중지 보살피고, 한 그루의 한 알, 한 알을 정성으로 돌봐서 키워낸 사과랍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올가을에 혹시 사과를 사실 거라면 제가 공들여 키워낸 사과를 사주시는 건 어떨까요? 11월 4일부터 사과를 수확하니까 그 전에 주문하시면 11월 6일 이후 싱싱하고 맛있는 사과를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사과값은 택배비를 포함하여 10kg ××,000원, 5kg ××,000원입니다.


사과를 주문하실 때 받으실 분 성함, 주소, 핸드폰 번호, 주문 수량을 카톡이나 문자 또는 이메일(*******@naver.com)로 알려주시고요, 택배를 받고 나서 사과 품질을 살펴보신 후 만족하셨다면 농협 ***-****-****-**로 사과값을 보내주시면 됩니다.


긴 톡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혹시 이 톡이 불편하셨다면 널리 이해를 구하며, 내내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풋농부 이경걸 올림

소박하게 늙어가기를 소망합니다 

풋농부가 된 이후 서울과 영천을 수시로 오가면서 정말 열심히 사과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렇게 벌써 여러 해가 흘렀습니다. 그러던 중 올해는 서울시50플러스 북부캠퍼스에서 학습지원단으로 일하느라 사과 농사를 조금 소홀히 하게 되었습니다. 그랬어도 시간을 나누어 영천에 있는 사과 농장을 수시로 다녀왔고, 사과를 수확하는 때에 맞추어 학습지원단의 근무 일정을 조정하여 올해의 사과 농사를 갈무리했습니다.

 

벌써 한 해의 끝자락입니다. 올해는 풋농부를 겸하여 서울시50플러스 북부캠퍼스에서 학습지원단으로 활동하느라 무척이나 바빴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바빴던 만큼 소중한 결실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매 순간이 감사할 일입니다. 그렇게,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열심히 살면서 소박하게 늙어가기를 소망합니다.

 

▶에필로그 1, 사과 농부가 ‘흠과’를 먹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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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과 농부가 즐겨 먹는 ‘흠과’들입니다. © 50+시민기자단 이경걸 기자 

 

사과 농부는 대개 ‘흠과’를 먹습니다. 흠과는 새나 벌레가 파먹은 사과, 까만점이 박혀있는 사과, 좌우대칭이 삐딱한 사과, 꼭지 부분이 갈라진 사과 등 흠이 있는 사과의 총칭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궁상을 떤다 싶습니다. 이왕 먹는 거 번듯한 사과, 맛있게 생긴 사과를 먹을 것이지 굳이 ‘흠과’를 골라서 먹으니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게 아닙니다. 사과 농부가 ‘흠과’를 먹는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벌레 먹은 사과가 맛이 있고, 모양이 조금 못생긴 사과라도 먹는 데 전혀 지장이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보다는, 사과가 그 지경이 되기까지 제대로 돌봐주지 못한 게 미안해서 그런 사과를 먹는 겁니다.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는 말은 다섯 손가락이 다 멀쩡할 때 하는 말입니다. 다섯 손가락 가운데 어느 한 손가락이 멀쩡하지 않으며, 그 손가락은 깨물지 않아도 아파서 차마 깨물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된 것이 마음에 걸려서, 슬퍼서, 미안해서 그렇습니다. 

사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점박이가 된 게, 삐딱이가 된 게, 새에게 쪼인 게 다 내가 잘못한 거 같아서, 내가 그런 사과를 먹음으로써 그 사과가 본분을 다하게 하려는 것이지요. 사과의 본분은 누군가에게 맛있게 먹혀주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사과 농부는 일부러 ‘흠과’를 골라서 먹는답니다. 미안해서 그런답니다.

 

▶에필로그 2, 꼭대기 한 알까지 기어이 따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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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혼자 외롭지 않도록 기어이 꼭대기의 사과를 땁니다. © 50+시민기자단 이경걸 기자
 

 

사과를 모두 따낸 농장을 둘러보다가 저 높은 꼭대기에 매달려 있는 사과 한 알을 보았습니다. 그 사과는 때마침 불어오는 스산한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파르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외롭겠구나! 더불어 키득대던 동무들이 모두 떠난 텅 빈 농장에 오로지 저 혼자 남아 긴 밤을 견디려면 얼마나 무서울까? 불현듯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누구라도 그 외로움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기어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 ‘외로움’을 따서 호주머니에 넣었습니다. 마침내 드넓은 사과 농장은 텅 비었고, 저 혼자 외로운 사과는 한 알도 남지 않았습니다.

 

 

50+시민기자단 이경걸 기자 (khwapple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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