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빈은 나라의 주요한 손님이다. 국빈에게는 마음을 담은 환영연 등의 의식을 베푼다. 장소는 청와대, 특급 호텔 등 다양하다. 역사와 문화가 깊은 나라에서는 궁궐에서 환영 행사를 치르기도 한다. 영국의 버킹엄 궁과 프랑스의 엘리제 궁이 대표적이다. 궁궐에서의 행사는 오랜 역사와 깊은 문화의 품격을 보여줄 수 있다. 

 

우리나라도 대통령이 주최하는 국빈 행사를 창덕궁에서 가진 바 있다. 2018년 9월 10일 인도네시아의 조코 위도도 대통령 환영식이었다. 또 중국 시진핑 주석의 부인 펑리위안 등 여러 나라 최고위급 인사들이 창덕궁으로 안내되곤 했다. 또 태국 왕실 인사 등 세계 각국의 왕족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대한제국의 법통을 이은 대한제국 이원 황사손은 각국 왕족과의 교류 때 창덕궁을 소개하려고 노력한다. 

 


인정전. 창덕궁의 정전이다. 인정(仁政)은 어진정치를 뜻한다.

인정전은 창덕궁의 법전(法殿)으로 왕의 즉위식, 결혼식, 세자책봉식, 문무백관 하례식 등 국가 행사가 펼쳐지는 중요 건물이다.   <출처: 문화재청>


이는 창덕궁의 자연과 조화된 아름다움, 창덕궁에 살아 숨 쉬는 휴머니즘과 연관해 풀이할 수 있다. 세계문화유산인 창덕궁은 산세와 지형에 어우러진 건축이 특징이다. 자연에 순응하고 하나 되는 궁궐이다. 특히 후원은 각종 수목과 괴석, 연못, 정자의 조화미가 돋보인다. 창덕궁에는 또 인본 사상의 아름다움이 깃들여 있다. 사람을 귀히 여기는 휴머니즘은 세종대왕과 박자청의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를 국빈 방문했던 중국 시진핑 주석의 부인 펑리위안이 2014년 7월 3일 창덕궁을 찾았다. 그녀는 “현대와 과거가 공존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정원이 넓어서 참 좋다” 등 아름다운 경관에 여러 차례 감탄을 했다. 이 때 그녀를 안내한 나선화 문화재청장이 궁궐 건축에 숨은 세종과 박자청 스토리를 설명했다. 나선화 문화재청장은 당시 대화 내용을 2016년 9월 14일 경기도 여주의 영릉 고유제 인사말에서 밝혔다.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과 정문인 돈화문은 일직선이 아닙니다. 세계의 모든 왕궁은 정문과 정전이 일직선상에 위치합니다. 권위를 세우려는 의도입니다. 그런데 창덕궁의 인정전과 돈화문은 축을 달리 합니다. 이것은 백성이 궁궐을 보는 데 편안하게 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돈화문. 창덕궁의 정문이다. 돈화(敦化)는 임금이 큰 덕을 베풀어 백성들을 감화시킨다는 의미다. <출처: 문화재청>

 

나선화 문화재청장은 이 대목에서 궁궐 건설 감독관인 박자청을 등장시켰다. 박자청이 세종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백성이 궁궐을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정전과 정문의 위치를 어긋나게 조성했음을 밝혔다. 박자청은 자연환경으로 볼 때 정문과 정전이 틀어졌을 때 백성이 편안하게 볼 수 있음을 생각했다. 돈화문에서 북한산으로 눈을 돌리면 운봉 세 개가 걸쳐있는 모습이 보인다. 산이 운치를 더하고 궁궐을 볼 때 편안하다.

 

왕은 분노했다. ‘인정전을 돈화문의 방향에 맞추라’는 지시를 박자청이 거역했기 때문이다. 세종은 그를 하옥시켰다. 여기에서 펑리위안은 깜짝 놀라며 “그래서요”라며 다음 일을 궁금해 했다. 나선화 문화재청장은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왕은 백성이 궁궐을 보는 위치가 편안함을 알게 됐습니다. 설계자의 뜻을 안 왕은 박자청을 석방시켰고 훗날 공조판서로 임명합니다.”

 

나선화 문화재청장은 박자청의 위민정신, 세종의 백성을 위한 큰마음을 중국 주석의 부인에게 설명한 것이다.

 

물론 창덕궁 건물이 일직선으로 건축되지 않은 것은 공사를 빨리 하기 위한 속도전 풀이도 있다. 또 돈화문이 정중앙이 아닌 서편에 세워진 것은 이미 세워진 종묘 방향을 피하려는 목적 설도 있다. 하지만 세종이 박자청을 구속시킨 상황을 보면 임금의 지시를 제대로 따르지 않았음이 유력하다.

 


창덕궁 동궐도 <출처: 문화재청>

 

또한 창덕궁의 위민 주역을 세종이 아닌 태종으로도 볼 수 있다. 당시 군주는 세종이지만 상왕인 태종이 실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조선왕조실록에서도 확인된다. 세종 1년(1419) 4월 12일 박자청이 하옥된다. 이날 실록에는 그가 태종의 지시를 잘 받들지 못했음을 밝히고 있다.

 

“상왕이 인정문 밖의 행랑을 단정하게 건립하도록 명을 내렸다. 감독관인 박자청은 뜰의 넓고 좁음을 요량하지 않고 성 짓기를 해 기둥을 세우고 상량(上樑)까지 했다. 이로써 인정전에서 보면 경사가 져서 바르지 못했다. 화가 난 상왕은 건물을 헐게 하고, 박자청을 하옥시켰다.”

 

창덕궁은 태종 5년인 1405년 박자청이 건설했다. 처음 건축할 때부터 여느 왕궁의 정형성과는 달리 비정형성 구조로 설계됐다. 응봉 자락의 지형에 따라 건물을 배치했다. 정문인 돈화문은 서남쪽에 위치하고, 정문에서 걸음을 떼 직각으로 두 차례 방향을 틀어야 정전인 인정전에 이를 수 있다.
창덕궁의 자연 지형을 활용한 건축은 풍수 사상이나 유교의 정치 이념과 함께 세종 또는 태종의 애민정신이 바탕 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백성이 경복궁을 바라볼 때는 우러러보는 형태가 된다.

 

반면 창덕궁은 지형과 지형 사이에 건축되고 일직선상에 있지 않아 백성의 눈높이에서 볼 수 있다. 창덕궁은 임금의 안전은 물론이고 백성의 편안한 시각도 배려된 공간으로 풀이할 수 있는 것이다. 창덕궁에는 임금도, 백성도 같은 눈으로 보는 왕조시대 속의 만민평등사상이 녹아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