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을 대표하는 건축물인 고창읍성

 

불멸의 히트곡은 되지 못했지만, 70년대의 유명 포크송 가수였던(물론 지금도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송창식의 노래 가운데 <선운사>가 있다. 고창을 대표하는 사찰인 선운사와, 그 인근에 선운사의 꽃으로 알려진 동백꽃(요즈음에는 상사화라고도 하는 꽃무릇으로 선운사가 널리 알려졌지만 이 노래가 작사,작곡될 당시에 선운사는 동백꽃의 사찰이었으며 오늘날에도 겨울철에는 역시 동백꽃의 사찰이다.)을 키워드로 하여 사랑하는 임을 붙잡아 두려는 애닯은 마음을 서정적으로 그린 노래다.

 

고창의 유명 사찰인 선운사 경내의 탑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바람 불어 설운 날에 말이에요

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 말이에요

나를 두고 가시려는 임아

선운사 동백꽃 숲으로 와요

떨어지는 꽃송이가

내 맘처럼 하도 슬퍼서

당신은 그만 당신은 그만

못 떠나실 거예요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동백꽃 지는 그곳 말이에요

 

-송창식 작사, 송창식 작곡, 송창식 노래, <선운사>의 가사

 

선운사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동백꽃. 가수 송창식은 동백꽃과 선운사라는 키워드를 이용하여 서정적인 노래를 만들었다

 

이처럼 대상을 붙잡아 두려는 마음이 과거의 고창 사람들에게는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어쩌면 그것은 고창이 안고 있는 지리적 특성 때문인지도 모른다. 남쪽으로 거대한 노령산맥이 있어서 더 이상 남하하기가 쉽지 않은 고장, 그곳이 바로 고창인 것이다. 그래서 고창은 '정착'으로 귀결되는 고장이라고 해도 가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정착에 필요한 것은 평화였다.

 

선사시대의 각종 유물과 생활상 등을 전시하고 있는 고인돌 박물관은 2011년 미슐랭 그린가이드에 별3개로 추천됨으로써 중요한 여행지로 안내되었다.

 

고인돌 군락지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2000년 12월에 등재되었다. 이 고인돌은 남쪽지방에서 찾아보기 쉽지 않은 탁자식(북방식) 고인돌이다.

 

이를테면 선사의 고인돌 문화가 그렇다. 고창처럼 많은 고인돌이 있는 곳은 세계에 그 유형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고창에는 100만 평방미터가 넘는 동양 최대의 고인돌 군락지가 있는데, 발견된 것만 해도 447개에 이른다. 그 형태도 탁자식(북방식), 바둑판식(남방식), 지상석곽식, 그리고 개석식 등 참으로 다양한 고인돌들이 있다. 선사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양식으로 알려져 있는 고인돌은 거석문화의 일종인데, 그것이 많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이 지역에서 정착 문화가 꽃을 피웠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으며, 또 이곳이 평화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지역이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음력 9월 9일 중앙절이면 보수공사를 재현하듯이 머리에 돌을 하나씩 이고 성벽 위를 한 바퀴 도는 답성놀이로 유명한 고창 읍성의 일부

 

읍성 밖 둘레에 난 호젓한 길을 주민 한 사람이 걷고 있다

 

고창 읍성은 정착과 평화를 위한 성이다. 이 성은 조선시대 단종 원년에 왜적의 침략에 대비하여 축성되었다. 모양성이라고도 하는 이 읍성은 나주진관의 입암산성과 함께 호남의 내륙을 방어하기 위한 전초기지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전쟁보다는 평화를 사랑하는 이 고장 사람들의 유비무환의 자세가 잘 드러난 성인 것이다. 오늘날까지 이 읍성을 지켜온 고창의 사람들은 음력 9월 9일 중앙절에 답성(성벽 밟기)놀이를 재현하며 정착의 평화가 지속되기를 기원한다.

고창읍의 사람들에게 무엇보다도 읍성은 아주 유용한 장소다. 이른 새벽부터 시작하여 밤이 될 때까지 읍성이나 그 주위를 걸어 돈다. 읍성길이나 성 밖 둘레길은 고창 사람들에게 건강과 평화를 주는 것이다. 오늘날 읍성은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된다. 흔하게는 각종 사극 드라마나 영화 촬영 장소로 각광받고 있다. 영화사들이 집중되어 있는 서울에서 내려가기에는 꽤나 먼 거리지만 여러 가지 사적들이 잘 정리되어 있어서인지 촬영장소로 자주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판소리 가사를 채록하여 집대성한 동리 신재효의 고택 중 복원된 사랑채

 

판소리에 관한 여러 가지 자료들을 보유하고 있는 판소리박물관

 

또 다른 정착은 판소리다. 소리로만 전해오던 판소리의 문자화를 이룩한 신재효의 고택과 판소리박물관에서 소리가 어떻게 문자로 정착되었는지를 잘 살펴볼 수 있다. 반가의 일원이었던 동리 신재효는 천대받던 소리꾼들과 판소리를 사랑하여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판소리 여섯 마당을 집대성하였다. 그에 의해서 판소리의 가사가 채록된 것이다. 그의 사랑채에는 시대를 풍미하던 광대들과 소리꾼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전해진다. 동리의 고택 옆에 마련된 판소리박물관 전시실은 소리마당과 아니리마당 등의 5개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의 유품과 판소리에 관한 각종 자료 천여 점이 전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판소리 체험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다.

 

 

동불암지의 마애여래좌상이 있는 절벽 가는 길에 만나는 암자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

 

서두에 언급했던 선운사의 암자였던 동불암지에 있는 마애여래좌상은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려는 민중들이 몸부림치며 목숨을 걸고 일으켰던 동학 봉기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송기숙의 장편대하소설 <녹두장군>의 시작 부분에 ‘미륵’(마애여래좌상)에 숨겨져 있는 비결을 꺼내기 위해 동학도의 대표 한 명이 이 절벽을 올라 끌과 망치로 배꼽 부분을 쪼아내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평화였지만, 정작 이러한 행동의 결과는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켜 더 큰 일의 빌미가 되었다는 이야기로 소설이 진행된다. 그것이 실화이든 꾸며낸 이야기이든, 당시의 파란만장했던 사연들을 익히 알고 있는, 이 마애상을 접하는 오늘날의 사람들은 모두 평화로운 삶을 원한다는 데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고창의 한 들밭 풍경. 여성 일꾼들이 밭에서 일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노인들이다.

 

이런 평화나 정착 같은 개념 외에도 고창이라는 고장이 안고 있는 또 다른 특징인 다양함은 표현하기 쉽지 않은 미묘함을 안고 있다. 흔히들 고창이라고 하면 고창 수박이나 복분자주, 풍천장어 같은 것들을 떠올리지만, 실상 고창은 그것들로만 대변될 수 없는 다양함을 갖고 있어 보인다.

 

비닐 하우스에 꾸민 담뱃잎 건조장

 

 

미당 서정주 기념관의 전망탑. 담쟁이덩굴이 휘감고 있는 모습이 친일 행각을 감추려 했던 그의 행적과 오버랩 되는 느낌이다

 

인물에 관한 것인데, 현대의 인물 가운데 고창은 서로 애매한 관계에 있는 두 명의 유력한 인물을 배출하였다. 한 명은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의 전신)의 설립자이자 우리나라의 초대 부통령이었던 김성수이고, 또 다른 한 명은 우리 문학사에서 지울 수 없는 인물인 서정주다. 인촌과 미당 두 사람은 같은 마을 출신이지만 서로 다른 신분으로 태어났다. 그들의 공을 치하하는 사람들은 두 사람을 마을의 자랑으로 여기지만, 대부분의 고창 사람들은 그들의 친일행각으로 인해 고창과 굳이 연결시키지 않으려는 마음이 큰 것 같다.

 

고창의 새로운 명소인 책마을 해리. 인구감소로 인해 사용하지 않는 초등학교 건물을 이용하여 어린이들이 책에 대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게 꾸며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인물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창의 수많은 장삼이사들은 여전히 평화를 사랑하고 동백꽃을 좋아하며 선운사를 아까워하 고인돌과 판소리를 자랑하며 또 고창읍성의 주위를 돌며 산다. 왜냐하면 고창의 사람들은 평화를 지극히 사랑하기 때문이다.

 

고창 읍성 안의 맹종죽 숲

 

고창에 갈 때 고속버스를 이용하려면 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고창행 고속버스를 이용할 수 있으며, 기차를 이용하려면 용산역에서 정읍행 기차를 이용, 정읍 시외버스터미널에서 고창행 버스를 타면 된다. 자동차를 이용할 때는 서해안 고속도로를 이용할 수 있고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할 때는 정읍 톨게이트에서 고창으로 갈 수 있다. 숙박은 고창읍성 부근의 한옥숙박이나 선운사 부근의 다양한 모텔 등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