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집’은 서울시50플러스재단에서 시행한 공익활동 지원사업에 참여한 더함플러스협동조합의 결과물입니다.

이 책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재사용하려면 반드시 더함플러스협동조합과 서울시50플러스재단의 서면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나의 부동산 투자 폭망기

 

투기에서 공유로 가는 여정

조규호

 

 

이 글을 쓰려고 오랜만에 주민등록표 초본을 떼어 보았다. 아버지의 세대원으로서 여섯 번, 장인어른의 세대원으로 한 번, 내가 가구주가 되어 29번까지 매겨진 주소 이전 일련번호 를 보니 지난날의 혼란과 고통이 떠올라 마음이 어지러웠다. 그중에 포함된 행정 조례 변경이나 도로명주소법 신설에 따른 외부 영향 등을 고려하더라도 결혼 후 지금까지 무려 15번에 걸쳐 이사했다. 살았던 곳을 구 단위로 좁혀 보면, 서울 강남구, 강북구, 강서구, 도봉구, 동대문구, 서초구, 송파구, 양천구, 인천 계양구이다. 지금 사는 강서구 염창동 집은 가장 오래 거주하면서 아이들을 다 키운 곳이라 개인적으로는 역사적 보존가치(?)가 있는 곳이다. 초본의 기록을 통해 한 번쯤은 내 삶의 궤적을 반추하며, 정리할 필요성을 느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나와 부동산에 얽힌 애증의 역사를 돌아보려 한다.

지금은 춘천시가 된 강원도 춘성 군의 산속 마을에서 화전민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후 7살에 서울로 왔다. 국민학교 입학 시기에 맞춰 상경하는 결단을 하실 만큼 자식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과 의욕은 컸으나, 나는 예나 지금이나 부친의 기대에 크게 못 미친 불효자였다. 도시 빈민의 삶은 고달팠으며 고등학교 때 등록금을 제때 못 내 교단 앞으로 몇 차례 불려 나가 면박을 당한 후, 가난이 매우 모욕적이고 수치스러운 것이라고 어린 마음에 새겼다. 이런 환경이라면 철이라도 일찍 들어야 했는데 나는 그마저 늦돼 형편에도 안 맞는 재수를 하고 군에 다녀온 후, 막노동 등 여러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뒤늦게 대학을 다니고 1992년 1월에 은행에 입사했다.

 

내가 은행에 들어간 이유는 오로지 당시 여자친구와의 결혼을 위해서였다. 금융권에서는 직원에게 주택구매자금을 저리로 대출해 주거나, 전세 자금을 무이자로 일정 기간 빌려주는 복지제도가 있다는 소식은 가난한 주제에도 감히 연애했던 겁 없던 내게는 한줄기 구원의 빛이었다. 입행 후 회사 선배들의 권유로 청약저축과 재형저축을 강제 가입하고 나서야 내 집에 대한 개념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물며 직장은 주택은행이었다.

1993년 4월. 둘 다 가진 것 하나 없이 결혼했다. 아무 생각 없는 나와 달리 아내는 빨리 내 집을 갖겠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 시부모와 시외조모까지 함께 살았던 어렵고 힘들던 신혼 때에도 첫 아이의 분윳값을 줄이려고 싸다는 소문이 들리면 대여섯 정거장이 넘는 옆 동네 슈퍼마켓까지 찾아가 양손에 분유 통을 가득 사오며 모은 푼돈을 저축하는 열의를 보였다. 그런 노력이 쌓여 1995년경 부평과 김포에 맞붙은 인천 계양 지구에 24평형 미분양 아파트를 청약저축을 쓰지 않고 4순위로 청약할 수 있었다. 그 때 분양가는 약 8천만 원 정도였고 미분양이라 대출조건이 좋았지만, 갓 서른인 신입사원이 꿈꾸기에는 벅찬 수준이었음에도 청약을 한 걸 보니 그 때 우리에게는 분가의 꿈이 훨씬 컸던 것 같다.

 

1996년 5월. 성수대교 붕괴를 핑계로 회사 근처인 강서구 방화동 변두리에 있는 5층짜리 아파트로 분가했다. 결혼 후 만 3년이 지나서야 찾아온 신혼이었다. 지금은 9호선 신방화역 근처인 그 곳은 밤에는 개구리들의 합창이 들리고 아이와 논두렁 산책도 하던 서울에 몇 안 남은 시골다운 풍경을 간직한 곳이었고 그 자체로 행복한 시절이었다.

IMF로 몹시 추웠던 1997년 11월에 인천 계양 지구 신축 아파트로 입주를 했다. 고등학교 때 온 가족이 강북구 수유동 산꼭대기 주택가 516번지 반지하에 사글세를 살며 공동 화장실을 쓰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세상에나! 집안에 화장실이 두 칸이라니.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룬 날의 감동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당시 허리띠를 질끈 동여매고 모은 저축액이 기껏해야 1천만 원 안팎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받은 중도금과 잔금 대출로 ‘하우스푸어’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때는 세상에 없던 용어였지만 ‘하우스푸어’는 그 옹색한 처지를 참 잘 표현하는 말이다. 집을 가졌지만, 형편에 안 맞는 과도한 대출로 몸과 마음이 빈곤한 상태에 처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많지 않다. 단 하나뿐인 집을 지키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고 착실하게 빚을 갚는 데 총력을 기울이거나, 빨리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다가 더 깊은 늪으로 빠지거나. 후자를 선택한 나는 마침 불어닥친 코스닥 광풍에 휩쓸렸고, 결과적으로 더 가난해졌다. 그때 아내의 말대로 전자를 선택했다면 어떤 미래를 살고 있을지는 나도 모르겠다.

 

1998년쯤 인천에 국민임대 아파트 분양이 있었으나 미달하여 선착순 분양한다는 뉴스를 보고 욕심이 났다. 다음 날 아침에 휴가를 내고 찾아간 청약 현장은 아비규환이었다. 그 많은 사람이 어디에서 나타났을까? 돈 냄새를 맡고 몰려든 폭력배들이 설치며 질서(?)를 잡는 그 현장 중간쯤 줄을 서서 내가 하는 일이 옳은 일인가를 생각했고 바로 그 줄을 빠져나왔다. 물론 그 국민임대 아파트는 집 없는 서민들이 아닌 욕심 많으면서 부지런하기까지 한 사람들의 차지가 됐다. 나의 욕망이 부동산에 투사된 시점은 이 때쯤이었던 것 같다.

1999년에 둘째가 태어났다. 아이들을 키우고 빚도 조금씩 갚으며 인프라가 제대로 안 갖춰진 채, 건설된 수도권 위성도시에서 서울로 출퇴근을 하는 삶에 적응하며 지쳐가고 있었다. 매스컴에서는 밀레니엄이 도래했다고 연일 떠들어댔지만 내가 아는 세상은 20세기에 비해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 사이에 건강이 급격히 안 좋아진 아버지를 모시겠다는 섣부른 효자 코스프레를 하며 부모님과 살림을 합쳤다가 다시 분가하는 우여곡절을 겪었고, 부모님은 도시를 떠나 아버지의 고향인 평창과 가까운 홍천에 터를 잡았다.

 

2001년 큰 애가 8살이 되던 해 1월에 장인어른으로부터 귀가 번쩍 뜨이는 권유가 있었다. “조서방, 송파구 풍납동에 내가 봐둔 다세대주택이 있는데 몇 달 고생할 생각하고 옮길 생각 없나?” 큰 애의 초등학교 입학허가 통지서를 받아 놓은 상태에서 서둘러 살던 집을 전세 놓고, 서울 송파구 영파여고 뒷골목의 허름한 다세대주택 옥탑방으로 이사를 했다. 주거 목적의 부동산이 아닌 투기 목적으로의 부동산이라는 욕망의 컨베이어 벨트에 발을 얹는 계기가 된 결정이었다. 이 섣부른 결정으로 엄청난 인생의 고난이 시작되었다. 나중에 보니 장인어른이 소개받았던 그 다세대주택은 경매가 진행되고 있던 집이었고, 나는 졸지에 장인어른이 당한 사기에 전세금으로 넘긴 5천만 원을 모두 날리고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었다. 퇴거를 거부하고 그 집에서 이를 악물며 1년을 버텼다.


절치부심하면서 부동산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때마침 원서접수 중이던 공인중개사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는 격’으로 단 시간에 합격했다. 그땐 기뻤지만 돌이켜보니 섣부른 자격증 취득이 자만심을 키워 나중에 더 큰 화를 부르지 않았나 싶다. 어쨌든 이렇게 나는 부동산과 친해져 가고 있었다.

당시 재건축 사업승인이 진행되고 있던 옆 동네에 연탄보일러를 태우는 잠실시영아파트 13평의 시세는 1억 8천~2억 원 선이었다. 내 형편에는 지금도 언감생심이지만 아내에게 호기롭게 그리로 이사 가자고 졸랐다. 아내는 당연히 거절했기에 지금도 “당신의 반대로 강남권에서 살 기회를 아쉽게 놓쳤다.”라고 큰소리치며 산다.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짐만 챙겨 동대문구 답십리 촬영소 고개에 있는 처가로 들 어갔다. 그 날 이후로 나의 지상과제는 처가살이를 벗어나는 것이었다. 장인어른이야 원죄가 있다손치더라도 장모님은 무슨 날벼락이었겠나. 이제 보니 초본에는 가구주와의 관계가 ‘장**의 사위’로 표시되어 있다. 처가에서 꽤 오래 머물렀다고 생각했지만, 초본 기록을 보니 2002년 1월 30일 전입, 3월 7일 전출이니 기껏해야 한 달 정도 머물렀었다.

 

나는 다시 맨손이 되었다. 치열한 고민 끝에 인천 계양구 소재 첫 아파트를 팔고 차액을 융자받는 방식으로 처가와 같은 아파트 단지에 있는 24평으로 분가했다. 우리 시대에 나처럼 양가 어른과 함께 살고 각각 분가까지 해 본 사람은 거의 없을 거다. 우리 부부는 그 상황이 정말 괴로웠지만, 아이들은 양가 조부모님께 많은 사랑을 받았다. 무조건 맞벌이를 해야 할 상황이었고, 어린 새끼들은 아직 돌봄이 필요했다. 2002년 월드컵에도 나는 전혀 흥이 나지 않았다.

 

맞벌이하며 한 눈 안 팔고 열심히 살았다. 그리고 3년이 지나 2005년 2월에 회사 근처인 강서구 염창동으로 이사했고 승진도 했다.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룬 후 줄곧 ‘하우스푸어’ 로 살았고, 대출금액은 점점 더 늘어나 분양권 전매로 염창동 32평형 아파트에 들어갈 때는 대출한도 규제가 없던 시절이라 매매 대금의 70%가 넘는 큰 빚을 부담하게 되었다. 이런 환경에서 나는 다시 빠르고 큰 한방(?)이 필요하다고 생각 했고, 퇴근 후에는 멀리 서초동 경매학원까지 다니며 돈 많고 시간 많은 동기생 어른들과 함께 전국 각지의 경매물건을 찾 아다니며 분석하고 공부하는 열정을 보였다. 많은 정보가 흘러넘쳤고 돈을 벌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다음과 네이버의 여러 부동산 카페, 경매 카페 등에도 가입하면서 다양한 활동을 모색했다.

 

그러던 중 이건 꼭 되겠다 싶은 느낌이 꽂히는 경매 건을 발견했다. 강원도 원주시 소재 임대 아파트 건설업체의 부도로 350여 세대가 몽땅 경매로 나온 것이다. 과감히 경매에 뛰어들어 12평짜리 5건, 24평짜리 2건 등 모두 7건을 낙찰받았다. 내가 무슨 대단한 재력가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많이 낙찰을 받았을까? 여기서 12평짜리 아파트의 평균 낙찰가 는 1,300만 원, 25평은 평균 낙찰가가 2,500만 원이었고 모두 50% 경락대출을 받았으니 7건의 총투자금액은 그 당시 서울의 강북 변두리 전세금도 안 되는 5천만 원이었다. 물론 이 돈은 살고 있던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받아 지렛대로 활용한 것이었다. 뻔질나게 원주를 드나들며, 기존 세입자와의 갈등도 풀고 동네 공인 중개사무소도 찾아다니며 도배, 장판, 페인팅, 화장 실 리모델링, 보일러와 방충망 교체 등 태어나 한 번도 안 해본 온갖 궂은 일을 직접 다 해내면서도 전혀 힘들지 않았고, 오히려 내 계획대로 착착 진행 되는 과정이 즐겁고 재미 있었다. 대출을 빨리 갚고 모든 집을 월세로 돌리는 것이 당시 목표였다. 당시 15평은 20만 원, 25평은 40만 원 정도의 월세를 받고 있었으니 최소 월 150만 원 이상의 안정적인 현금이 확보되는 것이었다.

그 무렵 회사에서 공모하는 경영학 석사(MBA) 과정에 선발되어, 경영대학원을 다니느라 정신없이 바쁘게 살고 있었다. 모든 게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착각으로 행복한 시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입했던 한 부동산 카페에서 공동투자 건으로 연락이 왔고, 자만감에 들떠 있던 나는 아내에게 아무런 상의도 없이 성급하게 계획을 바꿔 가능한 월세를 모두 전세로 돌려 대부분의 투자금을 회수하고, 거기에 그동안 저축한 돈과 아파트 추가 담보대출을 보태는 등, 최대한의 금액을 끌어모아 몰방 투자를 하곤 또 일상에 파묻혀 바쁘게 살았다.

 

2008년에는 많은 일이 있었다. 6월에는 장인어른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겪었고, 8월에는 MBA 과정의 학업을 마무리하기 위해 2개월 체류 일정으로 핀란드 헬싱키에 머물고 있었다. 40대 초반으로 행복의 정점을 찍던 그 때, 여러 경로로 한국에서 내가 투자한 공동투자가 기획된 사기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당장 때려치우고 돌아가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오도 가도 못 하는 사이에 천 억대 사기 사건은 매스컴에까지 보도됐고, 나는 창졸간에 피해자가 되어 바닥이 안 보이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와 관련하여 수 많은 나쁜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 났지만 여기서는 생략하는 게 낫겠다. 생각하고 들춰낼수록 나의 어리석음에 슬퍼지니까 말이다.

 

애써 외면하고 살다 보니 어느새 10년이 훌쩍 지났다. 두 아이는 대학생이 되었고, 나는 아직도 내가 만든 욕망의 덫에 걸려 갈가리 찢긴 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 중이다. 쓰다 보니 오로지 돈을 좇았던 나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나 불편하고 부끄러워 얼굴을 못 들겠다. 그런데도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공동체 주택 입주를 앞둔 이 시점에 투자를 넘어 투기에 가까이 갔던 나의 옛일을 고해성사하고, 앞으로 내가 살 기로 한 삶의 목적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초본을 통해 살펴본 심히 찌질한 나의 부동산 투자 폭망기이다.

 

이제 곧 공동체 주거라는 미지의 세계로 들어간다. 2016년 봄에 ‘공유 주택’의 존재와 개념을 알게 되면서 거주하고 싶은 소망을 품었고, 좋은 기회를 찾아 실천에 옮길 수 있었다. 함께 살 이웃들과 어언 2년 가까이 격주로 모여 희로애락을 나누는 동안 아이들의 이름도 자연스레 다 외웠다. 그렇더라도 옆집 숟가락 숫자까지는 알고 싶지 않은 느슨하고 개인이 자유로운 공동체를 희망한다. 함께 한 시간이 많을수록 관계는 술 익듯 깊어지고 그렇게 어울려 살아갈 것이다. 이 과정에서 얻은 경험을 나누고 싶어 초고령화 시대의 주거문제를 깊이 고민하고 대안 모색에 앞장서고 있는 ‘더함플러스 협동조합’에도 가입했다. 장담컨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화전동 꽃보라마을이 내 초본에 등재될 마지막 주소 이전 기록 이 될 것이다.
‘이부망천’이라는 망언이 회자하고, 중산층의 기준이 서울 강남권 거주와 아파트 평수 등의 수치로만 평가될 때, 우리는 인간의 품격을 스스로 잃고 만다. 사람과 공간이 연결되는 곳에서 공동체의 따뜻한 체온으로 서로를 감싸줄 때, 비로소 서로 존중하고 위로받는 공동체의 토양이 만들어지고 삶의 품격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내가 상상하고 원하는 공동체 주거다. 최근에야 비로소 정한 내 삶의 사명은 ‘공동체를 복원하여 삶의 온도를 올리는 것’이다. 공동체와 함께 나이 듦은 내게 소멸과 퇴화의 과정이 아닌 공진화 共 進化·coevolution의 과정이 될 것이다.

 

 

조규호

새로운 것을 탐구하기를 즐기며 요즘은 합창으로 나누는 사회적 연대와 그림 감상에 빠져있다.

27년 째 직장인이며 개인정보 보호와 IT보안으로 먹고 산다. 사회적 소수자의 인권을 지지하며 더불어 함께 사는 삶의 도구로서 ‘진성 리더십’을 선택 했다.

닉네임은 ‘내가 가면 길이다’. 사명은 ‘공동체 를 복원하여 삶의 온도를 올리는 것’, 모토는 ‘지금! 바로!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