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이하는 죽음, 당하는 죽음

늙어야만 죽는 것이 아니라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나 죽을 수 있고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사는 기간이 정해진 유한한 존재이다. 그러나 삶의 유한함과 죽음의 예측 불가능성은 나와 별로 관계가 없는 내 일이 아닌 것처럼 강 건너 불구경하듯 살고 있다. 내게서 죽음을 밀어내고 외면한다고 해서 찾아오지 않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죽는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고 불안감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감정이다. 죽음은 왜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것일까. 죽음의 본질과 죽음 이후에 전개될 상황을 모르기 때문일까. 죽은 다음에 내 삶에 대해서 누군가 내릴 평가 때문일까. 어찌됐던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현재의 삶 속으로 받아들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불안하고 두려운 감정을 주는 죽음을 굳이 끄집어내서 준비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반드시 오고야마는 죽음을 회피하고 준비 없이 맞는다면 그 죽음은 당하는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부정하고 싶고 분노와 우울, 포기로 맞게 되는 죽음이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인정하고 부정적 감정까지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담담히 죽음을 준비할 때 성숙한 인격으로서 생을 존엄하게 마칠 수 있을 것이다.

 

죽기 전에 해야 할 것들

1. 연명치료에 대하여

우리는 편안하고 존엄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는가? 지금은 뛰어난 의학과 의료기술로 임종을 앞둔 환자를 회복시킬 수는 없어도 목숨만 붙어있는 상태를 어느 정도 유지시키는 게 가능해졌다. 연명치료의 힘을 빌려 살아있어도 살아있다고 할 수 없는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럴 경우 환자는 중환자실에서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지 못한 체 홀로 온갖 기계에 둘러싸인 체 고통스러운 임종을 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한다. 가족과 마지막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중환자실에서 생을 차갑게 마감하는 것이 과연 최선의 길이고 우리가 바라는 존엄한 죽음인가. 이렇게 목숨만 연장하다가 생을 마감하느니 자연스러운 죽음의 과정을 가는 것이 오히려 더 낫지 않을까.

 

 

죽음에 이르렀을 때 환자의 뜻에 따라 담당의사가 연명의료중단 여부를 정하고 계획해 놓은 것이 연명의료계획서이다. 그리고 의식불명 등으로 어떤 치료를 원하는지를 자기 스스로 의사결정을 내리지 못할 때를 대비해서 몸과 마음이 온전할 때 치료방법 등에 대해 미리 의사를 밝혀놓는 문서가 사전연명의향서다. 이 문서를 작성하는 것도 내 존엄한 죽음을 준비하는 한 방법이 되겠다. 다만 의료비를 지급해야 할 기관이나 의료비를 벌어들여야 하는 기관이 자기들의 이해관계에 치중하여 존엄한 죽음과는 관계없이 돈을 더 버는 수단으로 이를 이용하거나 권유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2. 굿바이 노트

단 며칠간의 여행을 가더라도 화분에 미리 물을 주고 집에 남아있을 가족에게 이러저러한 당부의 말을 남겨놓고 간다. 그런데 세상을 떠나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는 것임에도  하고 싶은 말이나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은 체 가버린다면 얼마나 황망한 일인가. 남겨질 사람들이 당황하고 많이 슬퍼하지 않도록 나의 육신과 정신이 건강할 때 노트에 기록해 놓으면 좋을 것들을 제안한다.

 

 

미리 유언장을 작성하는 일이다. 자녀들 간에 불협화음이 생기지 않게 유산상속의 내용을 잘 정리해 기록한다. 재산 현황이나 분배 내용 이외에 작성 날짜, 주소, 작성자 이름과 서명이 반드시 씌어있어야 법적 효력이 생긴다고 하니 이를 꼼꼼히 챙겨야겠다. 가족이나 친구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써 놓는다. 남은 사람들이 이를 마음에 새기면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생의 마지막 단계에서 끝까지 연명치료를 할 것인지 중단할 것인지도 기록해 둔다. 장례식과 장지에 대한 의견, 내가 쓰던 물건들의 처리에 대해서 그리고 자기 기일에 대한 희망 사항도 써 놓는다. 일정한 형식은 없다. 노트 하나에 각자가 자유롭게 남기고 싶은 말들을 써 놓으면 될 것 같다.

 

3. 물건 정리

점점 나이가 쌓여가는 지인들을 만나면 이제는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물건을 사들이지 않는다고 한다. 남은 사람들의 짐이 될 것 같은 물건, 특히 가구 등 쓸모없이 버려질 커다란 살림살이들은 더 그렇단다. 나에게만 의미와 가치가 있는 사진과 추억물 같은 것은 지금 버릴 필요는 없지만 훗날 남은 사람들이 버리기 쉽도록 상자 등에 정리해 넣어 두는 것도 필요하다. 삶을 미리 정리하는 길에는 정답이 없다. 각 개인이 처한 상황이나 가치관, 지향점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의 참고사항으로 삼을 일이다.

 

삶 속의 죽음, 죽음 속의 삶

우리 몸의 세포는 7년이면 모두 교체된다고 한다. 그러니 육체적으로만 본다면 현재의 나는 7년 전의 내가 아니다. 세포의 관점에서 보면 이미 나는 죽은 것이다. 끊임없이 죽으면서 몸 전체가 살아가는 것은 삶 속에 이미 죽음이, 죽음 안에 이미 삶이 들어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신비롭고 역설적인 현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정신적, 영적으로도 과거 옛사람 모습의 나를 조금씩 벗어버리면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나보다.

 

묘지나 납골당 등 고인을 모신 곳에는 어디나 쓰여 있는 글자가 있다. 고인이 태어난 날~ 죽은 날이다. 두 날의 간극을 나타내는 물결표(~)가 그가 산 날이다. 이 물결표 속에는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찌 살았는지가 담겨있다. 우리는 아직 살아있다. ‘나는 나 자신과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죽은 후에 나는 어찌되는가?’를 생각하며 오늘을 산다면 나의 물결표 속이 더 아름답게 채워질 것이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준비하는 것은 지금을 더 잘 살고자 하는 의지이며 현재의 삶을 사랑하고 죽음 이후의 삶까지 복되게 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남겨진 곳을 아름답게, 남은 사람을 편안하게 하고 떠나는 준비된 죽음이야말로 삶을 마지막으로 아름답게 장식하는 일이 될 것이다.

시인이며 사상가인 랄프 왈도 에머슨이 쓴 ‘인생의 진정한 성공은 무엇인가’의 일부를 소개하며 글을 맺는다.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그리고 자신이 한 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