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서대문50플러스센터와 함께 한 이야기 공모전 수상작 중 일부를 일주일에 한 편씩 소개해드립니다.

작품 공개 순서는 순위와는 무관합니다.

 

다시 언덕을 오르며

 

김 금 남

이만큼 올라왔으니 / 이제 내려가야지 / 솥단지를 깨고 / 들판으로 나가 밥을 풀어줘야지 // 내려갈 때 발끝은 더 떨리고 / 모가지는 더 무겁다고 하지

 

20186월 말, 오랜 공직생활을 마감하면서 나는 김승희 시인의 '내려가는 언덕'이라는 시를 읽는 것으로 퇴임사를 대신했다. 그때부터는 정말 내려가는 일만 남은 줄 알았다. 더이상 욕심부리지 않고 마음을 비우자고 다짐도 했다. 우치다테 마키코의 소설 끝난 사람을 읽은 것도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웬걸, 두 달 만에 나는 다시 작은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솥단지를 깨버렸으므로 밥을 위해 일하지는 않지만 내가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서대문50플러스센터에 아름다운 커튼콜이라는 연극 교실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바로 등록을 했다. 연극에 대해 별로 아는 것도 없이 무조건 뛰어들어도 되는 것인지 살짝 걱정도 되었지만 그런 우려는 첫 시간에 사라져 버렸다. 강사인 연출가는 경험 유무를 묻지도 않았고, 열 명 남짓한 학습자 모두 단지 연극이 좋아서 모인 고만고만한 사람들이었다.

이후부터 3개월간 서로 친밀감 나누기, 대본 리딩, 캐릭터 분석, 배역을 정하기까지의 모든 과정들은 흥미로웠고 무엇보다 나이도 사는 곳도 하는 일도 전혀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즐거웠다. 끝난 줄 알았던 인생 수업에 늦깎이로 등록한 신입생마냥 매번 새로운 기분으로 서대문50플러스센터의 교실 뒹굴뒹굴마루방을 드나들었다. 특히 조직 안에서 오랫동안 달고 살았던 계장이나 과장, 혹은 국장이라는 호칭 없이 이름 석 자로만 불리는 것이 더없이 홀가분했다.

 

연극 수업에서 처음 맡은 배역은 중년의 시골 촌부였다. 무식하고 단순한 성격과 툭툭 내뱉는 사투리 억양이 매력적이어서 겁 없이 해보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나와는 전혀 다른 타인이 되어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연출자는 우리에게 어투는 물론이고 동작 하나하나에서 나를 지워내야 한다고 했다. 극중 그녀처럼 말하고 그녀처럼 행동하며 심지어 울 때도 그녀라면 어떻게 울 것인지를 생각해 보라고 하였다. 대사를 외우는 것이 가장 큰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연기는 단순한 흉내가 아니라 그 캐릭터를 완전히 이해해야 자연스레 우러나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12, 첫 공연을 앞두고 잔뜩 긴장이 되었다. 각자의 대사와 연기에만 신경 쓰다가 연극이라는 것이 혼자만 잘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서로를 의지하고 격려하게 된 것도 큰 수확이었다. 연기는 물론 음향과 소품까지 일체가 되어야 무대를 완성할 수 있으므로 멤버들은 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모여서 연습을 했다. 서대문50플러스센터에서는 그런 우리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공연 장소와 포스터 등의 지원도 있었지만 역시나 센터 측의 기대와 관심이 가장 큰 힘이 되었다.

 

내 지금 뭐하는 기지? 내 지금 죽나?..... 내 지금....그냥 이리 죽는 기가?......, 억울하데. 참말로 잠깐 동안 억울하데...”

연습을 거듭하다 보니 그녀가 되어 울음이 차오르는 순간도 있었다. 비로소 그녀의 심경을 알 것 같았다. 한 번뿐인 인생에서, 나 아닌 타인이 되어보는 일은 굉장한 경험이었다. 진심으로 남을 이해하고 위로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떨리는 첫 공연을 무사히 마치고 연극을 계속하기 위해 커뮤니티 활동을 하기로 했다.

정규 수업은 끝났지만 서대문50플러스센터는 커뮤니티를 적극 지원해 주었다. 덕분에 우리는 몇 회의 공연을 더 이어갔고 1년 후에는 연출자의 도움을 받아 창작극을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우리들의 이야기, 우리 이웃의 이야기, 우리 어머니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모아 직접 대본을 쓰고 고치다 보니 누구나가 쉽게 공감하는 한 편의 이야기가 되었다. 공연을 보며 펑펑 울었다는 관객도 있었고, 새롭게 삶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는 관극 평도 있었다. 연극 공연은 난생 처음이라는 어르신들을 찾아가서 무대를 펼치기도 했는데,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무대에 집중하고 열렬히 박수를 쳐주셔서 콧등이 시큰거린 적도 있었다.

 

이처럼 공연을 통하여 지역 사회에 봉사하려는 우리에게 서대문50플러스센터는 또 힘을 보태주었다. 해가 바뀌면서 사회 공헌단으로 활동할 길을 열어준 것이다. 프로 극단이 아니어서 때때로 길을 못 찾고 헤맬 때마다 센터에서는 도움을 주었다. 우리의 고민을 들어주는 센터의 담당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출구가 보였다.

생각해 보면 인생 2막에서 내가 서대문50플러스센터의 문을 두드린 것과 뜻이 맞는 사람들 그리고 밑그림을 그려주시는 연출 선생님을 만난 것은 대단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하나의 문이 열린다고 했던가? 하나의 언덕을 내려오면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오를 언덕이 있어 인생은 살 만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인생 1막에서 혼자 힘들게 언덕을 올랐다면 2막에서는 여럿이 함께 오르니 발걸음이 더욱 가볍다. 나이 들어 이제야 보이는 것들로 누리는 기쁨 또한 전과 비교할 수 없다.

말이 나온 김에, 지금도 매주 만나 함께 울고 웃는 동료들과 연출 선생님 그리고 큰 울타리가 되어주신 서대문센터 모든 분들께 무한한 사랑과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