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치유받는 공간 혹은 시간

기획특강 ‘사색과 치유의 공간, 미술관 여행’ 참관기

 

 

 

 

이번에 서울시50플러스 중부캠퍼스에서 기획한 특강 시리즈는 음악과 영화에 이어, 미술관으로 떠나는 랜선 여행이다. 이번엔 또 무엇이 우리 마음을 뒤흔들까? 문화예술만큼 우리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건 없다. 우리가 좋아하는 만큼 즐기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번 여행의 테마 속 단어인 ‘사색과 치유의 공간’에 잠깐 눈길을 주고 유튜브 라이브에 도착한다.

 

 

 

 

 

 

서울시50플러스 중부캠퍼스에서 ‘꿈꾸는 라디오’를 진행하는 윤성희 DJ가 서두를 열었고, 그녀의 안내를 받아 미술사연구가인 안현배 작가가 강사로 나섰다. 안 작가는 러시아 예술과 그 영향을 받은 미국의 예술에 대한 얘기로 작품을 감상하고 상상하자고 말했다. 먼저 러시아의 두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의 미술관으로 향했다.

 

 

 

 

 

 

사학 전공자인 안 작가의 소개 덕분에 미술작품이 훨씬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다가왔다. 해외여행 때면 으레 방문 코스에 미술관을 넣곤 하는데 다음엔 어떤 곳으로 가야 하는지가 분명해졌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에는 너무도 많은 미술작품이 소장돼 있어, 혹시라도 방문할 일이 있을 때 기억해두면 좋을 포인트가 공개되었다. 표트르 대제와 이반 뇌제, 예카테리나 여제는 러시아를 대표하는 황제들로, 서구 유럽 가까이에서 그들의 문화를 부러워한 나머지, 목적을 가지고 미술품을 들여왔기 때문에 이곳 구관의 작품들은 러시아 고유의 예술과는 거리가 멀다.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북구의 베네치아’인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만큼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구관은 유럽 모방의 의지와 그에 경도된 러시아 귀족의 취향을 반영한 곳이다.

 

반면 신관에는 피카소의 연작과 마티스, 고흐, 모네의 작품들이 즐비하다.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관람 동선 상, 구관에 오래 머무르다 보면 신관을 둘러보는 시간이 짧아지기 쉽다. 하지만 신관이야말로 단체관람객도 적고 쾌적한 데다 우리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하는 유럽의 진품들을 직접 보기에 안성맞춤이다. 슈퍼스타급 예술가들의 작품이 그렇게나 많은 건 1900년대 초반, 상인들이 싹쓸이로 투자했던 작품들을 러시아혁명 때 국가에서 몰수해 소장한 덕분이다.

 

 

 

 

 

모스크바는 어땠을까? 안 작가는 트레치아코프 갤러리를 소개하면서 그 역할을 우리나라의 간송미술관과 비슷하다고 언급했다. 오래도록 잘된 작품을 족히 수백 년은 모방하니 이제 그들 고유의 것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건 당연해 보인다. 19세기 후반에 나타난 젊은 예술인들은 자신의 역사를 보여주고 스스로 정체성을 찾는 과정에서 소도시까지 ‘찾아가는 전시회’를 개최했다. 그래서 붙은 이름이 ‘이동파’다. 이들이 서구 유럽의 문화 대신 풍경과 역사에서 정체성을 찾는 과정은 우리의 진경산수화 여정과 닮았다.

 

 

 

 

특히 일리야 레핀(1844~1930)은 당시 사회 상황을 사실적으로 보여준 이동파의 대표적인 국민 화가로, 그림 속 눈빛으로 많은 걸 전달했다. 이후 러시아혁명을 거치면서 새로운 색채를 실험하는 추상예술이 발전했으나, 스탈린 독재로 이동파는 정체기를 맞이한다고. 이렇게 러시아 미술관 여행은 끝이 났다.

 

그렇다면 세계 2차대전 후 유일무이한 강대국으로 등장한 미국의 예술은 어땠을까? 이들 역시 유럽 본토보다 뒤늦게 발전한 탓에 우선은 ‘모방’을 택한다. 중세기가 없던 미국에 클로이스터 수도원을 통째로 가져다가 미술관으로 건립할 정도였다. 뉴욕의 모마 현대미술관 또한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나 모네의 ‘수련 시리즈’ 같은 작품으로 유럽을 닮아가겠다는 열망을 보여주지만, 때가 되자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미국 고유의 색채를 추구하기 시작한다.

 

 

 

 

 

에드워드 호퍼(1882~1967)는 미국을 대표하는 사실주의 화가로, <밤의 사람들>과 <주유소> 등을 통해 도시인의 소외와 쓸쓸함, 버려짐을 묘사하는 등 지극히 미국적인 특색을 보여준다. 이 밖에도 미국에서는 다양한 예술 사조가 선보여졌다.

 

미국에서 도시의 소외, 개인의 아픔과 관련한 예술가로 빼놓을 수 없는 이는 마크 로스코다. 로스코는 러시아 태생의 도미 화가로, 그의 작품에 대한 얘기를 들어본 이라면 왜 그런 그림을 그리는지, 또 1점당 작품 가격이 몇백 억이나 된다는 사실에 놀란 적이 있을 것이다.

 

 

 

 

 

안 작가는 로스코와 그의 작품에 대해 말하면서 색채 추상과 관련한 얘기를 풀었다. 전면을 채운 색채는 처음에 칠한 색이 번지거나 섞이지만, 그 위에 겹쳐서 칠해지는 중첩의 스펙트럼이 또 다른 색깔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로스코가 사용한 색채는 노랑이나 붉은 계열의 확산과 검정이나 청색 계열의 수렴으로 나뉘는데, 이런 색채를 통해 자살로 마감한 그의 생애가 어땠을지 느껴진다는 점에서 그의 그림은 단순한 그림 이상의 복합적 의미를 획득한다. 안 작가는 로스코의 그림에서 느끼는 깊이와 중첩된 색깔을 통해 작가와 감상자 간 거리를 줄이고 창문의 역할로써 여기에서 저기로 나가는 효과에 집중해볼 것을 권유했다. 아울러, 휴스턴 소재의 로스코 채플을 소개했다. 이곳은 사방이 검은색으로, 검은색이 의미하는 ‘끝’이라는 시간에 관한 명상의 공간이어서 방문한 이들의 마음을 치유한다고.

 

 

 

 

 

 

순간, 필자는 러시아와 미국을 품은 예술가의 삶이 얼마나 지리멸렬했을지 그 아픔이 가슴으로 번져오는 듯했다. 로스코의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는 지인의 얘기가 떠올라 코끝이 시큰해지기도. 상대와 공감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말이나 눈물 또는 색채…. 인간이 겪는 비슷한 상황을 이야기로 전하려는 예술은 우리에게 충분한 치유의 순간을 선사한다. 올 한 해 코로나19로 ‘거리 두기’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우리가 재발견할 ‘거리’는 어떤 것이어야 할까? 관계 속에서 고립되지 않되, 고독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우리 자신을 만들어 갈 수 있는 ‘적정한 거리’라면 마음이 푸근해지는 기쁜 만남을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