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아이아에 도착한 날은 남미 여행을 시작한 지 23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날 우수아이아에는 안개처럼 고운 보슬비가 내렸다. 만년설에 덮인 산이 부드럽게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설산을 품은 바다는 짙은 회청색이었다. 아르헨티나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땅끝마을인 우수아이아 사이의 거리는 3,094Km다. 우수아이아가 스페인어로 ‘핀 델 문도(세계의 끝)’라고 불리는 건 남극과의 거리가 1,000km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남극 탐험대는 이곳에 베이스캠프를 차리고, 크릴새우를 잡는 어선과 군함들은 우수아이아를 기항지로 삼는다. 대서양과 태평양이 만나는 비글 해협이 바로 앞에 있는데 비글이란 이름은 찰스 다윈의 탐사선이었던 비글호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여행 안내소에서 여권에 스탬프를 찍어준다. 7종이 있는데 많이 찍으면 여권 훼손에 해당되어 입국을 거절당할 수 있으니 하나만 골라서 찍자. 내가 고른 스탬프는 중앙에 있는 펭귄을 Puerta de entrada a la Antártida(남극으로 가는 관문)이라는 스페인어 문장이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는 스탬프다. 아래쪽에는 2019년 3월 1일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다. 스탬프를 찍고 비글 해협을 둘러보는 유람선표를 샀다.

 


여명의 우수아이아

 

아침 일찍 선착장으로 갔다. 가득한 안개 속에 유람선이 출발했다. 설산을 뒤로하고 배가 해협으로 나아갔다. 비글 해협의 안개는 배가 나아갈수록 점차 옅어졌다. 바다사자 무리가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마침내 등대섬에 이르렀다. 펭귄이 등대를 빼곡하게 둘러싸고 있다. 안내자가 펭귄이 아니라 황제 가마우지라고 알려 주었다. 흰 배와 물갈퀴 달린 발 때문에 펭귄으로 착각할 법한 황제 가마우지는 다윈이 진화론의 증거로 삼았다고 한다. 황제 가마우지는 걷고, 잠수하고, 날 수 있다. 다다다다다 소리는 가마우지가 이륙하느라 물을 박차는 소리다. 도시의 동쪽 끝에 있는 박물관에도 가 보자. 감옥 박물관과 선박 박물관이 나란히 있다. 선박 박물관에는 다윈의 비글호 모형이 있다. 감옥 박물관에는 줄무늬 죄수복을 입은 인형이 죄수 생활을 재현하고 있고, 화랑을 겸하는 복도에는 그림들이 걸려 있다. 정치범이었던 죄수들이 자신을 가둘 감옥을 지은 다음 도시 건설에 동원되었다고 한다. 박물관 기념품점에서 그림엽서와 우표를 사서 고국의 친구나 연인에게 보내자. 가게 한쪽에 우체통이 있다.

 


지구 최남단 등대와 가마우지들

 

우수아이아를 뒤로 하고 항공편으로 부에노스아이스로 갔다. 호텔에 짐을 풀고 서둘러 간 곳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서점 ‘리브레리아 엘 아테네오’다. 지도를 펼쳐 들고 물어물어 갔다. 땀도 나고 목이 말라서 과일을 듬뿍 올린 아이스크림을 사서 먹으며 계속 걸었다. 유명한 서점이라 누구에게 물어도 잘 알려 주었다. 오페라하우스를 리모델링해 서점으로 만들었다는데, 무대가 있던 자리에 카페가 있어서 차나 음료수를 마실 수 있다. 나는 이 서점에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알렙』을 샀다. 단편 소설집인데 나의 인생 소설인 ‘독일 진혼곡’이 실려 있다. 스페인어를 모르니 읽을 수는 없겠지만 최고의 기념품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시내에 수백 개의 서점과 도서관이 있어서 책의 도시로도 불린다. 골목골목에 서점이 있다.

 


리브레리아 엘 아테네오 서점


인구 1,300만인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세계 3대 오페라하우스인 테아트로 콜론이 있다. 오페라뿐만 아니라 음악회도 모두 이곳에서 열린다. 불행히도 공연이 없어서 보지 못했고 극장 안을 관람하는 것조차 인터넷으로 예약해야 한다는 걸 극장에 가서야 알았다. 꿩 대신 닭이라고 극장 주변 공원을 산책하다가 엄청나게 큰 나무를 보았다. 크기를 표현할 길이 없으니 사진을 보고 짐작하기 바란다. 주변에 레스토랑이 많이 있다. 안심 스테이크를 먹으며 와인을 마셔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넓은 그늘을 드리우는 공원의 나무

 

저녁에는 탱고를 보러 가자. 밤 9시에 공연이 시작된다. 극장에서 호텔까지 100m 간격으로 무장 경관이 서 있어서 늦은 밤에도 안심하고 호텔로 돌아갈 수 있다. 여자 무희도 아름답지만, 남자 댄서의 율동이 더 매혹적이다. 남자가 리드를 잘해야 한다더니…. 남녀 댄서가 공연이 시작되기 전 좌석을 돈다. 팁을 주면 멋진 포즈를 취한 그들과 사진을 찍을 수 있다. TANGO PORTENO 극장의 공연을 추천한다. 무대가 크고 댄서들도 많이 나오고 공연도 훌륭하다. 식사와 음료가 제공된다.

 


포르테노 극장의 탱고 공연

 

라틴 미술관도 가 보자. 브라질의 팝 아티스트 클라우디오 토찌의 작품인 ‘게바라’가 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의 토찌 작품은 군사 독재 아래서 민중이 겪었던 억압과 그 억압을 비난하기 위한 것이었고, 체 게바라는 중요한 소재였다. 토찌는 2016년 리우 하계 올림픽 포스터를 제작한 13인 중 한 명이다.

 


GUEVARA, 1968


나시오나스 우니다스 광장에 있는 플로라리스 헤네리까는 건축가 Edaurdo Catarano가 18톤의 스테인레스 스틸과 알루미늄을 사용해 만들었다. 일조량에 따라 꽃잎을 오므렸다 폈다 한다. 에비타라는 애칭으로 더 유명한 에바 페론의 무덤에도 가 보자. 여자들에게 투표권을 준 사람이 에비타다. 페론의 가족묘에 묻히지 못했다. 33세에 죽었지만 여전히 기억되고 있으며 아르헨티나 곳곳에 그녀의 동상이 있다.

 


플로라리스 헤네리까


탱고 발상지에도 가 보아야 한다. 도시의 변두리인 보카 지역은 유럽에서 이민 온 이주민들이 살던 곳이다. 부둣가에서 살아가는 동네 사람들의 일상을 그린 화가 그린 마르틴(Benito Quinquela Martin)의 미술관이 있다. 그는 그림을 팔아서 번 돈으로 병원과 학교를 짓는 등 자기 삶의 터전인 지역사회에 많은 공헌을 했다고 한다.

 


그린 마르틴과 그의 작품

 

소꿉 살림처럼 알록달록한 화가의 부엌 가구들이 예쁘다. 마르틴은 나누었기 때문에 영원히 사랑받는 사람이 되었다. 저승에 갈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 그러니 생전에 이웃과 나누며 사는 게 더 행복하지 않겠는가?

 


유치해 보이기까지 하는 화가의 부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