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바람과 함께 걷다.

어제도 오늘도 해가 질 무렵 청계천을 한참 걸었다. 그곳에는 도심 일상에선 쉽게 느끼지 못하는 바람이 있었다. 바람과 함께 걸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커다란 나무, 길가에 핀 가녀린 꽃, 촘촘히 일렁이는 하천 물결. 바람과 함께라서 외롭지 않았다.

건강을 위해서가 아니라, 걷는 것 자체가 좋다. 그 순간의 느낌과 리듬에 맞추어 걷는다. 걷다가 머물고 싶은 곳이 있으면 멈추고, 가보지 않은 길을 걸어가고, 가도 가도 또 가고픈 곳을 다시 가기도 하고. 그야말로 자유롭게 걷는다.

문득 생각이 든다. 바람이 없다면? 모든 것이 인위적일 것 같다. 화가 나서 멈춰버린 세상처럼. 움직임 없는 나무, 흔들리지 않는 꽃, 일지 않는 물결, 무겁게 내딛는 발걸음. 갑자기 가슴이 조여온다. 볼 수는 없지만 느낄 수 있는 바람. 바람이 세상의 모든 것을 일깨우는 듯하다.

 

 

#2. 바람과 함께 노래하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사찰의 처마 끝에 달린 풍경(風磬). 미세하고 보드라운 바람에도 어찌 그리 곱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지. 풍경 소리에는 아련한 그리움이 묻어있다. 거센 바람에도 거칠지 않고, 가는 바람에도 무심코 지나치지 않는 풍경 소리.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풍경 소리야말로 바람만이 만들 수 있는 선율이다.

이 풍경 소리를 담은 가곡이 있다. 1930년대 대표 가곡 이은상 작시, 홍난파 작곡의 <성불사의 밤>. 성불사의 풍경 소리로 잠 못 드는 애절함을 노래한 가곡이다. 후에 이 가곡을 첼리스트 정명화는 무반주 첼로 변주곡으로 연주하였다. 정명화의 첼로 소품집 <恨∙꿈∙그리움>에 수록된 ‘성불사 주제에 의한 변주곡’이다.

고요함 속에 비바람 소리와 함께 풍경 소리가 들려온다. 이어서 목탁 소리가 울리고, 저음의 첼로가 애절하게 연주된다. 적막한 산사의 고요함과 외로움이 가슴에 사무치듯 스며온다. 스치는 바람이지만 이리도 가슴 절절한 비애를 남기다니. 바람이 오래도록 심장 깊이 선율을 남긴다.

 

정명화/정명훈 첼로소품집 恨∙꿈∙그리움<이미지 출처 : 교보핫트랙스>

 

#3. 바람과 함께 자라다.

태어나서 가장 먼저 접하는 예술작품은 무엇일까? 바람 따라 빙빙 돌아가는 모빌(mobile)이 아닐까? 아기의 요람 위에 매달린 모빌. 바람에 의해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예술품. 정지된 것을 깨어버리는 순간, 작품이 된다. 볼 수 없는 바람을 보게 한 것이다.

모빌의 창시자 알렉산더 칼더(Alexander Calder, 1898~1976)는 서커스를 좋아했다. 서커스가 펼쳐지는 입체적인 공간과 광대들의 순간적인 움직임에 빠져있었다. 서커스 미니어처를 만들다가 마침내 그림과 조각을 이용한 예술작품을 만든 것이다. 미술작품들을 바람과 함께 춤추게 한 것이다.

바람이 부는 대로 나무와 꽃이 흔들리듯, 바람에 순응하여 춤추는 설치 미술. 요람에서 감상하는 최초의 현대미술이다. 쾌활하고 긍정적이었던 칼더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모빌. 정지되어 있지 않고 움직이는 예술품은 바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순간의 떨림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아기는 바람과 함께 놀았다. 그렇게 바람과 함께 자랐다.

 

 

#4. 바람과 함께 살아가다.

풍차로 유명한 네덜란드. 바다보다 낮은 땅에서 살자니 수백 년간 범람하는 바닷물을 극복해야 했다. 그 결과, 바람의 원리를 이용한 풍차를 만든 것. 그야말로 바람과 함께 이룩한 나라다.

바람은 네덜란드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설치 미술가, 테오 얀센(Theo Yansen, 1948~)을 탄생시켰다. ‘해변의 괴물’이라는 얀센의 거대 설치 작품은 바람이 불어오면 깃털, 종이, 비닐로 만든 돛이 반응하면서 온몸의 관절이 움직인다. 환경친화적인 재료로 만들어진 이 작품은 인공적인 동력이 아닌 바람에 의해 움직이는 원리로 작동한다.

‘키네틱 아트(kinetic art)’의 거장이자 ‘21세기 레오나르도 다빈치’로 불리는 얀센은 자신의 이 작품을 생물체로 여긴다. 명칭도 실제 생물처럼 라틴어식 학명을 붙인다. 네덜란드 바닷가에서 바람과 함께 놀면서 바다 침수로부터 보호해주는 설치 작품이자 지구상의 또 다른 생명체를 등장하게 한 것이다.

 

#5.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하늬바람, 높새바람, 봄바람, 선들바람, 마파람.... 바람 이름이 어찌나 많은지. 우리 선조들이 바람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것은 바람의 특성을 알았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바람을 볼 수 있었고, 들을 수 있었고, 느낄 수 있었다. 어릴 적 우리가 바람과 함께 놀며 성장하였던 것처럼, 우리는 예부터 바람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이젠 바람을 맞으며 추억을 그리워하기도 하고, 바람을 떠나 보내면서 세월을 느끼고, 인생의 지혜도 깨닫는다. 스쳐 가는 바람을 구태여 잡으려 하지 않고, 떠나가는 이유를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바람은 떠나가고 또다시 온다. 넉넉하고 덤덤하게 떠나보내고 맞이하며 살아간다. 그것이 인생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