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레길이 생긴 이유

2000년 후반 제주에 제주올레길이 조성되기 시작했고, 내륙에는 강화나들길이나 바우길이 생기기 시작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사람들이 걸으면서 내적인 변화를 경험하고, 한국에서도 이처럼 걸을 수 있는 길을 만들고 찾아다니면서 걷는 문화가 확산되었다.

 

그전까지는 ‘걷기’는 일상이었고, ‘걷는 것도 배워야 한다’는 말이 어색하고 이상하던 시절이였다. 지금은 걷는 것을 왜 배워야 하는지, 걸음으로써 삶이 치유될 수 있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으니 짧은 시간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중요한 것은 다양하고 오래 걷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킬만한 장소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등산은 체력적인 부담과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다.

근래 한 두 곳씩 둘레길이 생기면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도 점점 늘었다. 걷는 문화가 걷기 운동에서 걷기(도보)여행으로 옮겨지기 시작했고 본격적인 둘레길 조성이 왕성하게 시작되었다.

 

 

 

둘레길 전성 시대

뉴스 및 잡지를 통해 새로운 둘레길 조성에 대한 개통식이 수시로 보도, 연재되고 있으며 최근 문화관광부에서는 해안가를 아우르는 “코리아트레일” 조성에 대한 발표까지 나와 둘레길 조성사업은 지속적인 활기를 띄고 있다.

지자체 및 민간단체가 조성한 둘레길 또는 탐방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다. 한국관광공사가 운영하는 ‘걷기여행길’ 포털사이트를 기준으로 548개 둘레길이 존재하며, 코스단위로 세분화하면 약 1,570여개의 코스가 존재한다. 광역시 이상 행정구역(17개 시·도)에 평균적으로 32개꼴로 둘레길이 존재하며, 전체 둘레길의 거리를 합산하면 약 13,000km 이상이 된다. 제주 올레길을 시작으로 사람들 입을 통해 둘레길, 올레길이라는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한 2007년부터 약 10년간 그 수가 대폭 증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허수가 상당히 많이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수없이 많은 둘레길이 있지만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채 사라지고, 관리되지 않아 다시 숲에 묻혀버린 곳들도 허다하다. 게다가 이름마저 제각각이다보니 사람들은 어떠한 길을 가야할지 망설이거나 가늠조차 못한다.

 

둘레길 조성 초창기에는 전문길꾼이 없다보니 등산전문가 자문을 근거로 길을 찾아 설계하였다. 그래서 본질을 잃은 채 등산로 같은 둘레길이 되어버려 방문객들에게 외면 받는 사례도 많다. 초창기에 설계된 서울내 둘레길 코스를 살펴보면, 수락산, 대모산, 구룡산 등 능선을 타고 넘어야 한다. 지금은 산허리를 휘감아 도는 코스로 변경되어 있는데 이 또한 과거의 오류를 보완하고 나서 바뀐 사항들이다. 이러한 오류는 등산과 둘레길 걷기에 엄연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만든 결과물이다.

 

이외에도 수없이 많은 지방의 둘레길이 있다. 그런대도 길꾼들이 발걸음을 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을 위한, 그들이 보고 싶은 숲길이 아닌 지자체에서 홍보하고 싶은 유적지나 지방 유지들만의 특별한 곳(가령, 펜션이나 박물관 등 사업지를 경유하는 경우)을 방문하도록 억지스럽게 둘레길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알맹이 없는 스토리텔링이 만든 길 이름

양적증가에 비해 대부분의 둘레길은 보여주기식으로 조성되었다. 게다가 둘레길에 억지스러운 스토리텔링을 만들어 붙인다. 둘레길 이야기는 시간이 지나면서 쌓이고 쌓여야 나름에 정체성을 갖게 되는데 우리는 도시생활의 “빠름빠름”을 둘레길에도 적용시켰다. 결국 숲길인지, 도심길인지 분간조차 되지 않는다. 무턱대고 만들고, 제대로 검토하지 않은채 탐방로라는 이름을 붙여진 것은 문화관광부의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가 시작일 것이다.

 

문화관광부에서 매년 5,6개의 새롭게 개통한 걷기 좋은 길을 “문화생태탐방로”라는 이름으로 지정하고 있는데, 말 그대로 문화가 있는 숲길이라고 보면 되지만 실제로는 단순히 걷는 길에 국한되는 경우가 많다. 둘레길의 짧은 역사에서 깊은 둘레길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억측이 될 수도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처럼 의미가 있는 길이 있는 반면, 자연을 벗 삼아 숲에서 쉬면서 걷는 둘레길(Trail)이 있다. 이런 차이를 알지 못하고 무작정 만들어낸 길이 현재의 한국형 둘레길이다. 새롭게 만들어지는 길도 있겠지만 도태되어 사라지는 길들도 명확하게 구분될 것이다.

 

지금도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둘레길은 나름 이유가 있다. 이러한 둘레길에는 그에 어울리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자연 경관을 마주하며 오랫동안 걸을 수 있는 길은 인기가 많다. 반면에 도심공원이나 하천을 따라 걷는 길은 인기가 없다. 산 주변을 크게 돌아가는 숲길을 둘레길이라고 통칭하면 좋겠지만, 산자락을 걸을 수 있는 숲길에 각각에 ‘둘레길‘과 ’자락길‘ 또는’나들길‘, ’바우길‘ 등의 이름을 부여하여 다른 종류의 길처럼 보여지게 만들었다. 북한산둘레길, 지리산 둘레길처럼 그냥 어느 지역 또는 어느산의 둘레길이라고 표현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이러한 길은 사람들이 쉽게 인지하고 좋아한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에는 새로운 이야기 거리가 베어든다.

 

나름 이름 때문에 길을 찾는 경우도 있다. 이름이 특이하거나 예뻐 보여서이다. 아니면 이름만 듣고도 어떤 형태의 걷는 길인지 상상할 수 있어서이다. 금호도 비렁길은 벼랑(비렁)을 따라 가는 길이며, 여주 여강길은 여강(남한강의 여주지역을 지날 때 명칭) 강을 따라 가는 길임을 알 수가 있으며, 제주 올레길은 올레(마을사이의 골목길)을 따라가는 길이라는 것을 잘 표현한 길이다. 증평군에는 ‘거북이 별 보러가는 길’ 이라는 이름의 길도 있고 영월에는 가장 높이 있는 ‘산꼬라데이길‘이 있다.

 

최근에는 둘레길이 발전하여 도심문화를 표방한 골목길여행, 도심걷기여행, 컬쳐워크와 같은 이름으로 확장 되었다. 그러면서 주제와 이야기 거리를 갖춘 길 여행과 이를 위한 코스도 만들어 지고 있다.

 

 

 

길꾼이 바라는 둘레길

길꾼들은 어려운 길은 가지 않으려고 한다. 숲이 있고, 아름다운 자연풍경이나 지역의 문화 볼거리가 있는 곳을 찾아가고 싶어 한다. 이름만 멋있다고 해서 찾아가지는 않는다. 지역의 특색을 내세우기 위해 각각의 이름을 사용하겠지만, 길꾼들은 이름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걷기 좋은 길이면 어떠한 이름이라도 상관이 없다.

 

실속 없이 이름이 거창하고, 이야기 거리를 억지로 부풀려서 만든 길은 오래가지 못한다.

 

 

아무리 금강, 낙동강의 풍경이 아름답더라도 한여름 땡볕에 걷는 것은 고통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부분 사계절 걷기 수월하고 시원한 물이 흐르는 계곡, 가을에는 단풍을 볼 수 있고, 삼림욕하기 좋은 숲이 있는 이러한 길을 찾는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둘레길은 이러한 요소를 품고 있으며 찾아가기 쉬운 교통 환경과 숙박이 가능한 기반시설이 얼추 갖추어져 있다. 게다가 숲이 아니어도 도심 속 볼거리가 많은 곳은 걸어서 다니려고 한다. 걸어서 구석구석 가고 싶은 욕망이 일어나고 있으니, 이에 부합할 코스가 만들어진다면 사람들은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걸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