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몸이 약했던 나는 예닐곱 살 무렵, 결핵에 걸려 친구들과 많이 놀지 못했다. 공기돌이나 고무줄 놀이를 하며 골목을 호령하던 여자아이들의 놀이 하나 변변하게 할 줄 몰랐던 나에게 책읽기는 즐거움의 원천이자 도피처였다. 초등학교 3, 4학년 때였을 것이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과자종합선물세트에 붙은 응모권 덕분에 어린이 잡지 1년 구독권에 당첨되어 아틀란티스, 무 대륙 같은 잃어버린 문명부터,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파라오의 저주 같은 낯설고 신비로운 세계에 푹 빠져 지냈다. 어린 시절부터 줄곧 나는 책 읽는 걸 좋아했다. 지적호기심도 채우고 감동과 즐거움이 있는 책읽기 덕분에 내 삶은 늘 새로웠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재발견하게 해준, 읽은 책 또 읽기

마흔 초반, 노안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눈이 나빠서 불편했던 것도 억울한데 이 나이에 노안이라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나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눈이 더 불편해지기 전에 책을 더 많이 읽으리라 결심했다.

무슨 책을 어떻게 읽을까 고민하다가 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이 들며 나름 문리(文理)도 트였을 테니 깊이 있는 책읽기가 가능할 것이라 기대하며 세계문학전집 중 일부를 다시 읽었다. 그 가운데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단연 압권이었다. 청년 시절에 이미 읽었음에도 전혀 새로운 책을 읽는 느낌이었고 이제야 비로소 작가가 하려고 했던 그리스도교와 인간의 구원, 가족간의 갈등 같은,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더 넓고 깊게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으며 도스토예프스키라는 작가의 인간과 세상에 대한 깊고 넓은 통찰에 경건함마저 느꼈다. 누군가 내게 세계문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도스토예프스키를 들 것이다.

 

인간, 지구, 우주에 대한 헌사

감동은 문학의 전유물이 아님을 느끼게 한 책이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다. 고등학교 여름방학 때, 텔레비전에서 방영했던 다큐멘터리 <코스모스>에 흠뻑 빠져 반해 책이 출간되자마자 샀다. 하지만 너무나 어렵고 두꺼워서 끝까지 읽지 못하고 책꽂이에 고이 모셔두었다. 몇 번의 이사에도 살아남은 《코스모스》를 다 읽는 것이 나에겐 오랜 숙제였다. 오십 전에 숙제를 해치우리라 마음먹고 드디어 몇 해 전 숙제를 끝냈다. 감동 또 감동이었다.

《코스모스》는 칼 세이건이 인간과 지구 그리고 우주에 바치는 헌사이다. 책을 읽는 순간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라는 유행가 가사처럼 인간과 지구와 우주를 향한 그의 경외에 가까운 사랑에서 알 수 없는 슬픔이 느껴졌다. 《코스모스》의 10장 제목이 “영원(永遠)의 끝”이다. 저자는 양립 불가한 ‘영원’과 ‘끝’이라는 단어를 통해 유한하지만 영원한 존재인 인간의 한계와 초월을 이야기한다.

 

《코스모스》 1981410일 발행된 초판본, 488쪽 칼라판, 3900

 

나는 마음이 무겁고 위로가 필요할 때 주로 동화책을 읽는다. 좋아하는 동화책을 책꽂이 한쪽에 모아두고 수시로 꺼내 읽는다. 《나는 무서운 늑대라구!》를 읽을 때는 혼자 낄낄 거리며 즐거워하고 윌리엄 스타이크의 《아모스와 보리스》, 이주홍의 《메아리》, 엘리너 파전의 《말론 할머니》를 읽을 때는 가슴 먹먹함에 눈물을 흘린다. 작은 삽화 몇 개, 채 10분도 걸리지 않는 책읽기가 주는 감동과 여운은 길고도 깊다. 언제 읽어도 부담이 없고 따뜻한 동화책은 늘 곁에 있는 친구 같다.

 

친구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아모스와 보리스, 김동성의 삽화가 아름다운 메아리, 한 편의 시 같은 동화 말론 할머니》 표지

 

읽은 책 다시 읽기는 여러 가지로 장점이 많다. 세월에 따라 켜켜이 쌓인 나이테처럼 다층적인 이해가 가능하고 전과는 다른 묵진한 감동까지 덤으로 따라온다.

 

인간에 대한 탐험, 고전 읽기

10여년 전 라틴어를 배우면서 라틴어로 서양고전을 읽겠다는 꿈을 꾸었다. 하지만 같이 읽을 사람도 찾지 못하고 내 실력도 일천하여 차일피일 미루었다. 그러던 차에 그리스 원전에서 번역한 서양 고전들이 속속 출간되었다. 그래서 라틴어 책읽기는 작파하고 중세를 마감하고 르네상스시대의 여명을 알린 책이라는 단테의 《신곡》으로 고전읽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지옥편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 ‘기독교고대 그리스라는 배경지식을 모르고서는 《신곡》을 이해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혼자는 어려우니 함께 책을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몇 년 전부터 미술관과 박물관을 함께 가는 몇몇에게 동서양 고전을 낭독하자고 제안했다. 기다렸다는 듯 여섯 명이 호응했고 먼저 그리스 고전부터 읽기로 했다. 첫 작품은 천병희 선생이 번역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였다. 2018413, 동네 작은 도서관에서 첫 번째 책 읽기가 시작되었다. 《일리아스》를 이해하려면 그리스신화에 관한 배경 지식이 있어야 했다. 우리 가운데는 그리스신화를 잘 아는 사람이 두엇 있었지만 나머지는 겨우 상식만 가진 초보자였다. 그런 탓에 책에 나오는 인명, 지명, 민족 이름, 신화 내용 등 모든 것이 생소하고 내용 파악조차 어려웠다. 그래서 책을 읽는 중간중간 묻고 때론 즉석에서 인터넷을 찾으며 궁금증을 해소했다. 그 과정에서 지식을 가진 구성원들의 설명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한 달에 두 번 2시간 남짓, 16개월을 거의 빠짐없이 만나 책을 읽은 덕분에 《오딧세이아》를 거쳐 《그리스비극걸작선》과 《아리스토파네스희극전집 1》을 지나 지금은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읽는 중이다. 짧은 시간 동안 거둔 성과치고는 꽤나 알차다.

 

천병희 선생이 번역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딧세이아

 

서양 문화의 샘, 그리스 로마

나는 이 책들을 읽으며 왜 고대 그리스 로마를 서양문화의 원류라고 말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서양의 사상 미술, 음악, 연극 등 모든 것이 그리스와 로마라는 샘에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담긴 역사성과 상징들, 그리고 그리스 비극이 보여주는 인간 군상들의 고뇌와 욕망은 2500년이 흐른 이 시대, 현대인들의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특히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는 반역 죄인이라는 이유로 오라비의 시신을 매장하지 못하게 하는 왕에게 맞서 천륜을 지키려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오이디푸스왕의 딸인 안티고네의 비극을 담고 있다. <안티고네>21세기의 작품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인간의 심리묘사가 탁월하다. 그리스 비극 가운데 최고의 작품인 안티고네가 현대에 이르러서도 끝없이 공연되는 이유는 아마도 욕망과 위선 그리고 절망 속에서 비극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스 연극은 형식면에서나 무대 장치 같은 기술적인 면에서나 현대극의 원형이 되고 있다. 그리스 비극은 비극경연에서 희극은 디오니소스제전 같은 축제 때 경연을 벌였다. 비극이 주로 신화를 소재로 하는 반면 희극은 사회의 정치나 세태를 풍자하는 경향이 강하다.

 

지중해 세계의 인류학 보고서 헤로도토스의 역사

지금은 그리스 희비극에 이어 헤로도토스(Herodotos)의 《역사》를 읽고 있다. 이제 몇 번 읽었을 뿐이지만 우리는 벌써 《역사》의 위대함에 감탄하고 있다. 《역사》를 번역한 김봉철 교수는 그리스어 Historie탐구 또는 추구, 탐구의 결과라는 뜻에서 역사라는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책을 읽다보니 과연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헤로도토스가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를 이 책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역사》는 기원전 492-479년에 벌어진 그리스와 페르시아 간의 전쟁을 다루고 있다. 《역사》는 그리스 본토는 물론 스키타이, 아라비아, 이집트에 이르는 지중해 세계와 페르시아 지역을 아우른다. 헤로도토스는 이탈리아부터 스키타이, 이집트까지 여러 곳을 여행을 하면서 모은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역사》를 썼다고 한다. 헤로도토스의 위대함은 왕들의 이야기뿐 아니라 지역의 지리와 풍습, 종교, 문화까지도 망라하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는 2500년 전 지중해 세계의 인류학 보고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전을 같이 읽는 사람들이 《역사》를 읽고 나서 인증 샷을 찍었다.

 

나는 사람들과 책을 읽으며 집단지성(?)의 힘을 깨닫고 있다. 책과 관련해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어느새 몰랐던 내용의 윤곽이 잡히고 이해가 쉬워진다. 그리스에서 시작된 우리의 여정은 언제 끝날지 기약이 없다. 우리의 목표가 동서양을 넘나들며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책을 망라해서 읽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 시대가 끝나면 책의 무대로 여행할 날을 꿈꾸기도 한다. 우리가 주고받는 우스갯소리가 하나 있다. 읽고 싶은 책 다 읽을 때까지 어느 누구도 죽을 수 없다고…

 

學而時習之不亦說乎(학이시습지 불역열호) 朋自遠方來不亦樂乎(유붕자원방래불역낙호)” 공자님 말씀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고 나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다. 나는 와 의기투합하는 또 다른 나들과 함께 배우고 익히며 신나는 50+를 보내고 있다. 책을 읽다가도 무엇을 할까 끊임없이 궁리하고 그것을 실행해 옮기며 느끼는 소소한 만족감 덕분에 나는 오늘을 살아가고 때론 살아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