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향력 있는 누군가가 세상을 향해 한 마디 건넨다.

“젊을 때는 인생에서 돈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다. 이제 나이들고 보니“

여기까지 들으면, 그 다음엔 으레 ‘돈보다 중요한 그 무언가가 있다’ 는 식의 마무리가 예상된다. 하지만 오스카 와일드는 이렇게 말을 이어간다.

”나이들고 보니, 정말 그렇더라.“

오스카 와일드(1854-1900)는 영국이 아닌 아일랜드 출신의 특별한 작가로 알려져있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하는 말들 중 ‘평범하다’는 말을 가장 싫어했다고 하는데, 이 대목에서만큼은 그와 동질감을 느낀다. 나는 열세 살이나 먹을 때까지 내가 우주 먼 초록별에서 온 매우 특별한 존재라고 믿었었다. ‘대체 가족들은 왜 나를 몰라보는 걸까? 그래, 몰라도 너무 모르니까 나를 구박해도 참아주자‘며 스스로를 달래곤 했다. 물론 그런 신념은 오래가지 않았다. 외계인의 존재를 알아보고 확신했던 병구- [지구를 지켜라2003.장준환 감독]속 주인공 -같은 이웃을 만나지 못한 덕분인지, 나는 어른들 세계로 무사히 진입했다. 나아가, 내가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한 지구인 중 1인에 불과하단 사실도 깨달았다. 천재는 커녕 그리 특별하지도 않다는 자각은 내게 충격적이었지만, 그보다 훨씬 더 가혹한 깨우침이 곧이어 찾아왔다. 바로, 내가 늙어간다는 사실이었다.

 

 서른 살의 은영이가 어느덧 쉰 살을 넘어섰다. 나는 진짜 늙어가고 있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다가 문득, ’인류 모두가 늙어가잖아, 모두?‘라는 생각에 눈물이 쏙 들어가버린 기억이 난다. 물론, 무려 400년을 살면서 여성의 삶과 남성의 삶을 다 경험해본 올란도- [올란도1992.샐리 포터] -도 있고, 29세에서 노화가 멈춰서는 100년째 계속 ”너는 어쩜 그대로야? 변하질 않아?“라는 말을 듣는 아델라인- [아델라인:멈춰진 시간2015.리 톨랜드 크리커] -도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영화 속 주인공들이다. 사람은 누구나 예외없이 노화의 길, 즉 소멸의 길을 걷는다. 불로불사를 욕망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그런 사람이 우리 주변에 있다면? 부러워하고 감탄할까? 그럴 리가! 아델라인을 둘러싼 사람들은 그를 괴상한 존재로, 연구 대상으로 바라본다.

 그만큼, 노화는 인생 속 자연스런 여정이란 말인데, 희한하게도 우리 사회는 늙어감을 대단히 불편하고 부끄러운 것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크다. 주름살을 미워하고 동안을 숭배하는 사회, ’죽음보다 슬픈 늙음‘이랄까? 가히, 노화 혐오aging phobia라고 이름 붙일 만하다. 노인을 바라보면서는 ’추하다‘, 지척에 와있는 자신의 늙어감을 향해서는 ’싫다‘ 아니 ’두렵다‘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어쩌면, 노인들의 쇠락한 육신이 우리의 시야에서 멀리 떠나 있길 원하는 게 아닐까? 굳이 그 육신을 목도하고 싶지 않아서? 헌데 이를 어쩌나? 대한민국은 노인이 넘쳐나는 사회다. 눈만 돌리면 어르신들 천지다. 그래서 더 눈을 감아버리고 싶은데 오히려 눈을 똑바로   뜨고 제대로 보라고 손짓하는 영화가 있다. [죽어도 좋아2002.박진표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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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대 남자 박치규와 여자 이순례. 두 사람은 우연히 공원에서 만나 첫 눈에 서로에게 반한다. 너무 늦게 만난 짝꿍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일분일초를 아껴 곧바로 동거를 시작한다. 얼마나 반가웠을까? 얼마나 가슴 뛰었을까? 이 늦깍이 커플은 20대 연인들보다 더 격렬하게 사랑을 나누고, 일상을 즐긴다. 자신들의 사랑 이야기를 스스로 재연하고 또 현재의 사는 모습 그대로를 화면에 보여준다. 그러다 보니 이 커플의 실제 정사장면도 나오는데, 영화 개봉 당시 이슈가 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왜? ’늙은 이들이 섹스를? 추해!‘라는 쪽과 ’노인도 성생활을 해. 그게 자연스럽잖아?‘라는 쪽이 부딪혔으니까. 능동적 영화소비자이자 깨어있는 50+세대로서 당신 눈에는 어떻게 보일까, 자글거리는 주름살과 힘없이 늘어진 피부의 남녀가 서로를 뜨겁게 끌어안는 모습이? 각시를 보고 “너무너무 이뻐요~”를 연발하는 치규씨. 그가 아들 하나 낳아달라고 하자 “그래, 낳을 수 있음 낳아야지.”라고 화답하는 순례씨. 이 닭살 커플의 ’죽어도 좋을만큼‘ 좋은 신혼생활이 궁금하다면? 영화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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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들보다 더 애틋하고 안타깝게 사랑을 만난 이가 있으니, [씨 인사이드The Sea Inside2004.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속 라몬이 그러하다. 라몬은 26년 전 바다에서 겪은 다이빙 사고로 전신마비를 얻었다. 종일 침대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거나 입에 연필을 물고 글을 쓰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렇다고 라몬이 우울한 얼굴로 눈물만 흘리고 있을까? 천만에! 그는 주변 사람을 늘 웃게 만드는데다가 품위까지 있는, 꽤 괜찮은 남자다. ’저런 고통에 처한 환자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해야하지?‘라고 고민하는 우리가 무색해지게 말이다. 그런 라몬의 유일한 소망은 죽음이다. “죽음은 내게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자유”라면서 안락사를 갈망하고, 자신이 죽을 수 있게 도와달라고 한다. 그의 외침은 곧 사회적 파장을 불러온다. 신문지상에 그의 선택이 핫이슈로 떠오르고 찬성과 반대의 무리들은 ’즈그들끼리‘ 격돌하고, 지역 성당의 신부는 그저 사랑이 부족해서 라몬이 그런 생각을 하는 거라며 라몬의 가족들을 질책한다. 그때 라몬에게 나타난 변호사 훌리아.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게 되지만 퇴행성 질환을 앓고 있는 훌리아가 쓰러지면서 관계는 지속하기 어려워진다. 갑자기 쓰러진 연인을 향해 고개를 돌리지도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라몬이 얼마나 괴로워했을지... 결국 라몬의 선택은 인권법정에서 거부당한다.라몬은 말한다. “삶은 의무가 아니라 권리라고 믿는다.” 과연 라몬의 선택은 어떤 결말을 냈을까,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데 이 영화의 제목이 왜 ’The Sea Inside’일까, 26년을 전신마비로 살아온 중년의 남자는 어떻게 사랑에 빠지는지, 배우 하비에르 바르뎀의 인생연기(feat.은영맘대로)는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보고 싶다면? 그도 아니면 스페인의 바다와 하늘을 보고 싶다면? 영화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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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 인사이드’와는 또다른 웃음의 결로 죽음 언저리를 그려낸 영화이자, 이제는 스크린에서 보기 힘든 연기자 조합이 빛나는 [행복한 장의사2000.장문일]가 떠오른다. 오래 전 작품인데도 좀처럼 잊히지 않고,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더 생각난다. 게다가, 여러 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도 계속 연극무대에 서온 명배우 오현경의 숨쉬듯 자연스런 연기를 볼 수 있으니 더욱 고마운 영화다. 낙천장의사의 주인장 장판돌은 서울에서 빚지고 낙향한 손자 재현(임창정), 여관방에서 목을 매 대롱거리다가 자살에 실패하고는 창밖 장의사 간판에 이끌려 온 철구 그리고 동네 슈퍼집 아들 대식에게 장례일을 가르치려 하지만, 수월하지 않다. 당최, 동네에서 초상이 나질 않기 때문이다, 그것도 10년째. 사람이 죽어줘야 일거리가 생기는 사업이라니! 그러던 어느날, 드디어 마을에서 상이 나고 시신이 그들 앞에 도착하는데, 아뿔사! 가슴에 칼을 꽂고 자살한 시신이었다. 재현 무리는 기절해 자빠진다. 처음엔 누구라도, 우리도 그들처럼, 뒤로 넘어질 것이다. 물론 재현 무리는 우여곡절 끝에 첫 장례를 치러내고 장의사의 세계로 진입한다. 그들은 동네 꼬마의 시신을 염하면서, 또 재현이 사랑하는 여인의 죽음을 마무리해주면서 인생을 배워간다. 누군가의 죽음을 정성 다해 보살핌으로써 그의 삶을 완성해주는 일이 바로 장의사의 일이었던 것이다. 평생을 그 일하며 산 장판돌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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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죽음이 아닌… 치매를 지켜보는 것, 특히 나 자신을 잃어가는 과정을 내가 지켜보는 것은 어떤 일일까? 나이들수록 매력적인 배우 줄리안 무어가 인생연기(feat.은영맘대로)를 펼친 영화 [스틸 앨리스Still Alice.2014.리처드 글랫저&워시 웨스트모어랜드]가 그   물음에 답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이 영화를 보려면 약간의 용기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랬었다, 나 자신을 더 이상 기억해내지 못할 때의 나는 대체 어떤 삶을 살 수 있을지 아득하고 서러워서 눈물로 밤잠을 잃어버렸던 기억이 난다. 기억...! 희귀성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가는 앨리스는 겨우 쉰 살. 지금의 내 나이보다 어린 사람이다. 그것도 언어학자이자 대학교수로 살던 사람이, 여느 때와 다름없이 조깅을 하다가 갑자기 ‘어? 여기가 어디지? 난 어느 길로 가야하지?’라며 당황한다. 잃어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다른 분야도 아니고 언어학의 전문가인데, 자신의 삶과 가족, 자기 자신을 기억하고 설명하는 언어가 머릿속에서 지워지는 과정이 그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안겨줄지...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앨리스는 혹시라도 찾아올지 모르는 치매상황을 대비해서 극약처방(?)까지 마련해두었지만, 실행하지 못한다. 허사로 돌아간다. 아무튼, 앨리스가 단어들을 잃어가고 기억을 잃어가는 동안, 가족들의 일상은 흔들리고 요동친다. 가족 중 누군가는 앨리스를 돌봐야 했기에, 싱글이며 연극배우인 막내딸 리디아가 그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무조건 배려해주고 봐주려 애쓰는 다른 가족들과는 다르게, 리디아는 엄마한테 할 말은 하면서 엄마를 돌본다. 그 때문에 모녀 사이엔 갈등이 생기고 지치기도 하지만, 리디아는 이전보다 훨씬 더 친밀하고 깊게 엄마를 만나간다. 그러나 앨리스가 더 이상 앨리스로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아보이는 순간은 기어이 찾아왔다. 영화의 끝부분에서 리디아는 짧은 소설 하나를 앨리스에게 읽어준다. 앨리스의 삶과 무척 닮은 이야기였다. 소설이 끝나자 리디아가 묻는다. “엄마, 이게 뭐에 관한 얘기 같아?” 앨리스가 가까스로 입을 열어 이렇게 답한다.

“...... love”

모든 걸 다 잃어도 인간이 본질적으로 놓지않을 마지막 하나, 사랑! 올드해보일 진 몰라도, 내겐 묵직한 위로가 된다. 내게도 찾아올지 모르는 ‘상실의 질병’에 맞설 수 있는 무기가... 그것이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는다. 그럼 지금부터라도 내 온몸과 영혼이 사랑을 기억하도록, 연습하고 또 연습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여름내내 글을 쓰지 못한 미안함 때문인가 보다, 이토록 긴 분량에 괜시리 진지해진 모양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