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빛 마테호른을 찾아서
영화가 시작될 때 나오는 어느 영화사의 로고는 뾰족하게 우뚝 솟은 산봉우리를 별들이 서서히 에워싸는 장면이 있다. 어려서부터 간간히 보아 각인되어 있던 그 풍경을 TV 여행프로그램에서 보고 언젠가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번 여행의 스위스 일정 중 가장 먼저 꼽았던 여행지가 바로 그 영화사의 시그니처와 닮은 마테호른(Matterhorn), 그 웅장하고 빼어난 자태를 가장 잘 볼수 있다는 스위스의 작고 아름다운 산골 마을 체르마트(Zermatt)였다.
마테호른을 만날 수 있는 곳, 체르마트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체르마트로 가는 길은 간단치 않았다. 기차를 세 번이나 갈아타고 나서야 체르마트역에 다다를 수 있었다. 마테호른을 보기 위해 지구촌 각지에서 모여든 여행자들의 발길로 북적이는 체르마트역을 나섰다. 스위스 특유의 샬레풍 삼각지붕을 가진 건물들 테라스 여기저기에 걸린 빨간색 알핀로제 화분이 먼 곳까지 찾은 여행자들에게 환영의 인사를 건네고 있다.
▲ 마테호른을 보기 위해 여행자들의 발길이 분주한 체르마트역 © 시민기자단 강명주 기자
유럽의 알프스 산맥 3대 미봉 하면, 흔히 몽블랑, 융프라우와 마테호른을 꼽는다. 각각의 독특한 모양과 아름답고 빼어난 자태가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 가운데 마테호른은 스위스와 이탈리아의 국경에 위치한 뾰족한 피라미드 모양의 삼각산으로 그 독특한 모양이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데, 우뚝 솟은 예각의 봉우리 모양으로 인해 ‘초원(Matter)의 뿔(Horn)’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체르마트는 스위스 알프스 산맥 가운데 위치한 작고 아름다운 마을로 마테호른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어 많은 여행자들이 몰린다. 산골 마을이지만 호텔과 식당들이 모여 있어 마을 풍경은 아기자기하면서 예쁘고 다정하다. 마을을 가로질러 흐르는 작은 개울 고르네라(Gornera)는 마치 여행자들을 마테호른으로 안내하듯 흐르고 있다. 그 길을 따라 쭉 올라가면 마테호른을 만날 수 있다.
여행자를 환하게 맞이하는 알핀로제
체르마트역에 내려 스위스풍 예쁜 건물들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 미리 예약해둔 숙소를 찾아갔다. 체르마트에서는 내연기관 차량의 운행이 금지되어 있어 다른 도시에 비하여 마을 곳곳이 쾌적하다. 밖에서 바라본 호텔은 테라스마다 예쁘게 늘어뜨린 꽃들이 내부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를 불러온다.
호텔의 아담한 로비에는 마을 상징인 마테호른의 커다란 그림이 우리를 반긴다. 알프스 산장 같은 분위기의 숙소는, 테라스로 나가면 정면으로는 푸른 잔디의 언덕이 보이고 측면으로는 가파른 산록이 자리하고 있어 산골 마을의 분위기를 한껏 느낄 수 있고 단풍든 나무들이 마을의 가을풍경을 평화롭고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었다.
▲ 체르마트 마을풍경, 곳곳에 예쁜 꽃들이 장식되어 여행객을 맞이한다. © 시민기자단 강명주 기자
드디어 만난 마테호른의 위용
숙소에 짐을 풀고 마테호른을 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좁고 길게 이어진 길 양쪽으로 호텔, 상점, 식당과 카페들이 이어져 스위스풍 마을 풍경을 이루고 있다. 거리 군데군데 걸린 스위스 국기와 지역을 상징하는 큰 깃발들은 알프스를 가진 관광대국으로서의 자부심을 보여주는 듯했고, 그곳을 찾은 여행자의 마음을 덩달아 들뜨게 했다.
작은 번화가를 벗어나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아담하지만 품위를 갖춘 교회를 지나게 되는데 여기서 길은 자연스레 마을을 가로질러 흐르는 개울을 지나는 키르히다리(Kirchbrucke)로 이어진다. 다리 위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모여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여기서 멀리뾰족하게 솟아 있는 해질녘 마테호른을 감상하고 있었다. 멋진 마테호른의 자태를 바라본 저마다의 소감을 말하며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생각보다는 먼 거리에 있지만 피라미드 모양으로 깎아지른 독특한 자태는 감탄사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 해질 녘 마테호른과 첫 인사를 나누었다. © 시민기자단 강명주 기자
일단 저녁 무렵 마테호른을 처음 만나는 데는 성공했다. 누군가 마테호른을 제대로 보는 행운을 마테호른을 ‘영접한다‘라는 표현을 쓸 만큼 특별한 일이라고 했다. 그런 선입견 때문인지 아니면 마테호른의 뾰족히 솟아오른 특별한 경관 때문인지 역시 마테호른을 처음 본 느낌은 경이롭고 신비로웠다. 마테호른을 보기 위해 모여든 인파들에 섞여 여러 장의 사진을 찍고 숙소로 향했다. 내일 아침 동틀 무렵 햇살이 비쳐 빛나는 황금 마테호른을 기약하며, 마테호른을 첫 대면한 감동을 마음속에 간직한 채 작은 마을 길을 산책하듯 내려왔다.
개울이 굽이쳐 흐르는 작은 마을, 체르마트
체르마트는 건물마다 예쁜 꽃들이 장식되어 있어 마을을 구경하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스위스 특유의 벨 모양 시계 종탑이 있는 작은 교회당, 평지에 누운 비석과 꽃들이 어우러져 작고 예쁜 공원처럼 보이는 묘지, 알프스의 빙하가 녹아 마을을 따라 흐르는 시냇물, 야외 식탁에서 음식과 술로 저녁을 즐기고 있는 여행자들의 활달한 분위기... 곳곳에서 요란하지는 않지만 생동감 있는 마을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내일 일찍 아침 햇살이 빚은 황금빛 마테호른을 ‘영접’할 수 있을까?‘ 기대감을 가지고 하루 일정을 마무리했다.
▲ 아기자기한 식당,카페,호텔 등이 늘어선 체르마트의 거리는 여행자들을 정겹게 맞이한다. © 시민기자단 강명주 기자
새벽녘 수 많은 별들의 속삭임
새벽녘 잠이 깨어 테라스로 나가보니, 총총하게 빛나는 수 많은 별들이 어두운 하늘을 빼곡히 메우고 있다. 마치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의 무대에 몰래 나와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소곤거리듯 반짝거리고 있었다. 하늘의 별이 이렇게나 많다니... 익숙했던 도시의 하늘과 알프스의 하늘은 분명 다른 세상으로 느껴졌다. 체르마트를 방문하게 된다면 촘촘히 박힌 밤하늘의 별들을 꼭 만나시길.
▲ 밤이 되면 뜰안 가득 별빛이 쏟아진다. © 시민기자단 강명주 기자
이른 아침 ’영접‘한 황금빛 마테호른과 마을 산책
본격적으로 마테호른과 함께 할 하루를 시작했다. 우선 동틀 무렵의 마테호른을 보기 위해 옷을 따뜻하게 챙겨입고 숙소를 나서, 전날 석양빛 마테호른을 마주한 키르히다리로 향했다. 기대감에 충만하여 다리에 이르러 바라본 마테호른은 구름 한점 없는 황금빛 봉우리로 그 자태를 빛내고 있었다. 역시 자연의 아름다움은 신의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신의 영역에서만 가능한, 인간이 감히 흉내 내지 못할 경이롭고 신비한 아름다움으로 인간은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한참을 머무르며 황금빛 마테호른의 장엄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지나 황금빛이 이울고 밝은 빛이 봉우리를 감쌀 때까지 마테호른의 아름다운 자태를 감상한 후 마을 길을 천천히 내려왔다.
▲ 떠오르는 햇살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나는 마테호른 © 시민기자단 강명주 기자
아침 마을산책은 상큼한 공기와 함께 맑은 햇살에 비친 예쁜 집들과 꽃들로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 자전거를 타고 ‘굿모닝’ 인사와 밝은 미소를 건네며 스쳐 지나가는 청년, 유치원에서 소풍을 나왔는지 서로 손을 잡고 선생님 뒤를 따라가는 귀여운 아이들의 무리, 이리저리 동네를 둘러보며 얘기를 나누는 여행자들의 모습, 모든 풍경이 평화롭고 여유 있어 보인다. 마을 안에는 여러 채의 오래된 목재가옥을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는 구역이 있다.
▲ 마을안에 전통가옥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는 힌터도르프 구역 © 시민기자단 강명주 기자
이곳은 힌터도르프(Hinterdorf) 구역으로 체르마트를 방문하는 여행자들에게 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느끼게 해준다.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나올 법한 통나무로 지어진 오래된 농가주택과 창고들이 잘 보존되어 있는데, 오랜 세월 연기에 그을려 까맣게 변한 가옥들을 보며 오래전 체르마트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조금은 상상해볼 수 있다.
마테호른에 더 가까이.. 고르너그라트 전망대
마테호른을 감상하기 위한 마지막 코스로 고르너그라트(Gornergrat) 전망대를 향했다. 좀 더 가까이에서 알프스산맥에 이어진 마테호른을 만나기 위해 산악열차를 타고 고르너그라트 전망대에 올라가기로 했다. 고르너그라트에 오르기 위해서는 체르마트역 바로 맞은 편에서 출발하는 고르너그라트 산악열차를 이용하면 된다.
체르마트에서 고르너그라트역까지는 약 30분 정도가 소요되는데 차창 밖 자연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고 모든 승객들은 사진 찍기에 바쁘다. 열차가 선로를 따라 산모퉁이을 돌 때 마다 나타나는 절경은 알프스 자연의 아름다운 풍경에 푹 빠져들게 한다.
▲ 알프스산맥이 병풍처럼 둘러싼 풍경의 고르너그라트 전망대 © 시민기자단 강명주 기자
산악열차는 전망대에 오르기 전 몇 개의 정차역을 거친다. 내려올 때도 마찬가지여서 중간에 내려 하이킹을 즐기기 위해 등산장비를 갖춘 여행자들도 꽤 많아 보였다. 마지막 종착지인 고르너그라트 전망대역에서 내려 역사 위 높은 곳에 위치한 전망대에 서면 알프스 산맥으로 둘러싸인 풍광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체르마트에서 멀리 올려다 보던 마테호른도 거대한 산맥의 한 부분으로 이어진 봉우리다. 마테호른은 홀로 서 있는 주인공의 모습이 아닌 주변 친구들과 어울려 자연 속에 편안히 자리하고 있는 듯 평화로워 보인다. 때로는 홀로 빛나는 주연보다 다 함께 어울려 조화롭게 빛나는 조연이 더 아름다워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프스 산맥의 일원인 마테호른
먼 발치 마을에서 올려다 본 마테호른의 모습과 더 가까이 다가가 산맥의 한 부분으로 바라본 마테호른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 체르마트에서 본 마테호른은 그야말로 신비롭고 경이롭게 빼어난 자태였다. 감히 범접하지 못할 고귀한 자태로 성스럽고 고고하게 보였다. 또한 아침 일찍 ‘영접’한 황금빛 마테호른은 떠오르는 태양빛 아래 화려하게 빛나는 주인공의 모습으로 우뚝 서 있어 감탄을 자아냈다.
그 마테호른을 좀 더 가까이 보기 위해 올라온 전망대에서 바라본 마테호른은 그 독특한 모양은 그대로이지만 알프스 산맥의 하나의 봉우리로 다른 산들과 잘 어울려 존재했다. 홀로 돋보여 도도한 혼자만의 산이 아니라 만인의 시선을 벗어나 주변 경관의 하나로서 평범하고 편안하게 자리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 알프스 산맥의 한 봉우리인 마테호른의 모습은 다소 평범해 보였다. © 시민기자단 강명주 기자
빼어나거나 평범하거나
체르마트 마을에서 올려다본 마테호른은 홀로 외롭게 서 있는 황금빛으로 장식된 귀족의 모습이었다면 가까이 다가가 바라본 마테호른은 그다지 화려하지 않고 알프스산의 일원으로써 말없이 제 몫을 하며 서 있는 평민의 모습처럼 느껴졌다.
마테호른은 자신의 어떤 모습을 바라고 있을까? 묵묵히 서 있는 마테호른의 속마음이 궁금해진다. 두 가지 모두 마테호른의 모습일 것이다. 누군가를 바라볼 때 선입견을 갖고 한 측면을 바라보기 보다는 좀 더 가까이 다가가 그 사람의 이면을 이해하고, 두 모습 모두를 인정하고 좋아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으리라. 바라보는 이들이 자신의 프리즘을 통해 보이는 것만으로 친구나 주변을 이해하려 든다면, 나는 그들을 얼마나 잘 이해한다고 할 수 있을까? 마테호른의 느낌이 다른 두 모습을 통해 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본다.
전망대에 모인 여행자들과 알프스의 시간
고르너그라트 전망대에서는 마테호른 뿐만 아니라 멀리 만년설과 빙하로 둘러싼 산악지대도 볼 수 있다. 깊으면서 푸르고 투명하면서 하얀 빙하는 햇살을 받아 눈부시다. 거대한 얼음으로 만든 병풍 같은 풍경은 신이 빚은 예술작품으로 화려하고 장엄하다. 험준한 산맥으로 이어진 풍경 속에 화려하게 빛나는 거대한 보석산을 마주하고 있는 듯 매력적인 풍광이다.
세계 곳곳에서 모여든 여행자들은 국경 없는 친구가 되어 눈이 마주칠 때마다 미소로 인사하고 서로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말을 걸어온다. 여행자로서의 동지애, 이 경이롭고 아름다운 자연을 함께 느끼는 유대감 때문이리라. 가족여행자들, 신혼여행자들, 은퇴여행자들... 지구 어딘가에서 자신의 삶을 가꾸고 살아가는 여행자들은 알프스 한 곳에서 모여 인생의 한 순간을 함께 즐기며 아름답게 채워가고 있었다.
▲ 만년설과 빙하로 둘러싸인 알프스 풍경 © 시민기자단 강명주 기자
멀리 산비탈을 힘차게 올라오고 있는 빨간색 산악열차가 눈에 들어온다. 잠시나마 세상과 동떨어진 환상의 마을에 우리를 데려다 준 산악열차는 다시 우리를 태우고 인간 세상으로 내려갈 참이다. 신이 빚어놓은 신비로운 자연풍광과 지구 곳곳에서 모여든 이름 모를 여행자들과 함께 어울렸던 아름다운 알프스의 정경을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한 채 산악열차에 올라탔다.
▲ 톱니바퀴가 달려 가파른 산비탈을 오르내리며 여행객들을 알프스로 데려다주는 산악열차 © 시민기자단 강명주 기자
시민기자단 강명주 기자(silkang@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