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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만에 다시 비가 온다. 재택근무하는 남편과 온라인 수업 중인 두 아들과 나, 모두가 각자의 시간에 있다. 남편과 아이들이 모두 있는 날이면 점심 식사에 신경이 쓰인다. 냉장고를 열어봐도 오늘 마땅한 재료가 없다. 항상 있던 달걀도 없다. 집 앞 편의점에 가서 달걀이라도 사올까 하다가 몸도 찌뿌둥해서 간단히 해결하기로 했다. 볶아 놓은 신 김치와 참치 통조림이 몇 개 있으니 김치볶음밥에 국물 대신 라면이면 될 듯싶다. 김치볶음밥엔 달걀 프라이지만 오늘은 없는 대로 먹자 싶었다. 예전 같으면 내가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뛰어가서라도 달걀을 사 왔을 것이다. 노른자 살린 달걀 프라이를 예쁘게 얹고 참기름 한 방울을 둘렀을 것인데 꾀가 난 건지 어쩔까 생각도 안 들었다. 가족들 음식 할 때만큼은 마음을 다하려고 했었고 맛있게 먹는 모습에 그렇게 좋았었는데 귀차니즘이 생길 걸까. 덕분에 아침 시간에 여유가 생겨서 내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다.

 

얼마 전 시집을 발간했다. 시집이라고 하기에도 부족한 편수였기에 다음번에 할까 고민도 되었지만 용기를 내어보았다. 글을 쓰기 시작하고 두 계절을 보냈으니 한 번쯤은 정리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작년 그날도 편찮으신 친정 엄마 일로 친정에 가고 있었다. 거리에서 받은 작가 승인 문자에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글을 처음 올린 날 진동과 함께 온 댓글에 아주 오랜만에 심장이 두근두근하는 소리가 온몸으로 들리는 것 같았다. 이런저런 일로 마음이 바닥을 쳤을 무렵이었다. 어떤 곳인지 전혀 알지 못했었기에 내 마음을 가득 푼 글을 보냈었다. 가감이 없었다. 읽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몰랐고 될 거라는 생각도 안 했었기 때문에 제동이 걸리지 않은 글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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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너도 한번 가져 봐"하며 선물처럼 날아온 문자 하나에 가슴이 두근거리고 떨렸던 그 마음한동안 나는 가만히 있어도 실실 웃음이 났고 날 세웠던 감정들이 뭉뚝해지는 것을 느꼈다. 며칠 전 친구가 말했다. 그때 내 얼굴에 얼마나 빛이 났었는지 모른다고. 나는 문학을 공부했지만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하며 살았다. 20대에 시를 쓸 때의 나는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려 했고 뒤틀기도 하고 다시 푸는 과정에 집중했었다. 단단하게 뭉쳐진 근육 같았다. 그래서 그 시절의 시는 딱딱하고 건조했던 것 같다. 이 나이에 쓰는 시들은 보이는 것과 느껴지는 대로 쓰게 된다. 그래서 쓰는 내가 편하다. 내가 편해지니 글이 말랑말랑해진다.

 

남편과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면서 글은 언제나 목마름으로 남았었다. 그렇다고 그런 마음을 챙길 여유가 내겐 없었고 그림은 직업이자 즐거움이었기에 나쁘지 않았다. 남편과 나의 노래방 18번은 안치환의 '내가 만일'이었다. 가족들과 노래방을 갈 때면 아들들이 엄마 아빠 곡이라며 번호를 눌러주곤 했다. 글로 쓰다 보니 오글거리는 것 같다. 우습지만 앞 소절을 남편이 부르고 뒤 소절을 내가 불렀었다. '내가 만일 시인이라면 그댈 위해 노래하겠어'라는 가사가 있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시인이 되면 남편을 위한 노래를 한다는, 정말 나의 청춘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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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어떤 모양으로든 흘러가기에 그 안에서 좋아하는 일을 할 수만 있다면 족한 것이다. 나를 위한 글로 내가 웃으면 나를 아끼는 많은 사람들도 함께 즐거울 테니 행복이란 것이 전파력이 커서 말이다.주어지지 않던 것이 주어졌을 때의 첫 마음을 기억해야겠다. 내가 그토록 좋았던 것은 글을 쓸 수 있는 공간과 내가 다시 글을 쓴다는 것뿐이었다. 그 안에서 얼마나 설렜었는지 생각이 난다.

 

많은 것이 그렇다. 없으면 있기만을 바라고 안 할 때는 하기만을 바라다가 하나씩 마음이 붙고 늘면서 다시 그것으로 인해 힘들어지기도 한다. 마치 우리 둘째 아이에게 공부만 시작했으면 바랬다가 더 잘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기는 것처럼.

 

내 모습에 나도 픽 웃음이 나왔다. 이제 나는 점심 준비를 하러 부엌으로 간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나니 글인데도 배가 홀쭉해진 것 같다.

 

50+에세이작가단 리시안(ssmam9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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