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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된다란 말을 좋아한다. 팬데믹에도, 폭염에도, 시간은 흐르고, 흘렀다. 이번 여름, 내 일상 자체가 폭염 같았다. 대책 없이 뜨거운 열기 속에서 매일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느라 마음이 바싹 타들었다. 마음은,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부스러져 가루가 될 것만 같았다.

 

우리는 곁에 있는 사람, 사물, 풍경을 닮아가는 속성이 있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는 사람은 자연에서 선한 것을 얻는다고 말했다. 자연을 도시 생활에서 나타나는 충동을 진정시킬 수 있는 올바른 이성의 이미지로 보았다. 자연 속에 있으면 우리는 자연에 동화되어 착해지고, 순해진다. 돌아와서 순한 마음이 다시 오염될지라도. 당장 떠나야 하는 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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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 년 만에 강릉에 갔다. 오죽헌에 들러서 신사임당의 기개를 크게 들이쉬고, 경포호부터 사근진 해변까지 걸었다. 강릉 바우길 5구간 일부이다. 이십 대에 종종 드나들며 많은 이야기를 묻어둔 곳인데 말끔해진 모습에 어리둥절했다. 존재 자체만으로 싱그럽고 풋풋했던 이십 대가 사회생활로 언변도 유창해지고, 차림새도 말쑥하게 변한 것 같았다. 예전과 달리 말끔해진 곳을 보면 마냥 기쁘지만은 않다. 나란 사람이 옛날 사람인 탓일까? 개발과 더불어 개인의 이야기가 다 사라지는 것만 같다. 쾌적하고 편리함도 좋지만 가끔은 이야기를 찾아 나설 수 있는 곳으로 남겨두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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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을 하며 경포호를 걸어 경포 해변에 도착했다. 정갈한(?) 해변 풍경 앞에서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졌던 마음이 날아올랐다. 모래사장을 채우는 파라솔의 향연, 바다 물결에 몸을 맡긴 삼삼오오 사람들, 캠핑 의자에 앉아 넓은 바다 품에 안긴 사람, 양산 아래서 뜨거운 태양을 피해 바다를 마주한 사람, 물살을 튀기며 보트를 타는 사람. 코로나19 탓인지, 여름 끝자락이라서 그런지, 해변 풍경은 차분하면서도 이국적이었다. 경포 해변에서 사근진 해변까지는 모래밭 위에 나무 데크가 놓여있어 발에 모래알도 안 묻히고 걸을 수 있다. 하지만 멀리서 바라보는 구경꾼이 되고 싶진 않았다. 모래밭에 두 발 푹푹 빠뜨리며 풍경의 주인공이 되었다. 풍경을 음미하면서 서두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해변의 경계는 누가 만든 걸까?

 

외지인 눈에는 경포 해변과 사근진 해변의 경계를 알 수 없어 비슷한 해변 풍경이었다. 걷다 보니 어느새 이정표가 나타났다. 곧 지형도 달라졌다. 말쑥한 경포 해변과 달리 사근진 해변은 조금 낡은 펜션들이 바닷가 바로 앞에 줄지어 있었다. 펜션 건물 사이에 자연스럽게 골목이 생겼고, 골목으로 바다가 보였다. 마치 펜션과 펜션 사이에 난 창 같았다. 펜션이 없다면 탁 트인 바다였을 텐데 바닷가를 따라 늘어선 펜션이 사근진 해변 풍경을 다르게 만들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수평선이 펼쳐진 해변을 벗어나 바다와 숨바꼭질하는 것 같았다. 골목으로 바다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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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가까이서, 편하게 즐기려는 사람들의 욕망이 담긴 해변이라 나처럼 산책하는 사람에게는 배타적이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펜션 손님이 아니면 골목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서 굳이 고개를 쑥 빼고 바다를 보려고 했다. 바닷가 쪽으로 걸으면 일부러 고개를 빼며 애쓰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다. 펜션 뒤쪽으로 난 길로 걸었다. 원래 하지 말라고 하면 하고 싶은 법이다. 삐딱한 마음보다 너그럽게 바다와 숨바꼭질하는 순간을 즐겼다. 다 바다 덕분이다.

 

여행자가 되면 한껏 너그러워진다. 이 너그러움은 여행자의 탐욕에서 나온다. 여행을 즐기고 싶은 마음에, 이 시간은 한 번뿐이라는 생각에, 하나라도 더 눈에 담고 느끼려고 한다. 이는 여행의 기술이고, 여행 후 일상으로 돌아와도 놓고 싶지 않은 기술이다. 여행 기념품으로 여행자의 너그러움을 일상으로 가져와서 오늘을 즐겨봐야겠다

 

50+에세이작가단 김남금(nemones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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