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2B리포트]웹용_배너+및+이미지10.png 

최근 막 삼십대에 진입한 젊은 예술가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는 성인이 되고부터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많은 일을 했는가 설명하면서 “졸라리 열심히 했다”라고 말했다. ‘졸라리’라는 가벼운 욕이 나름 진지한 인터뷰에서 툭 튀어나왔을 때 우스우면서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지나가 버린 젊은 시절이 갑자기 눈앞을 쓱 지나가는 느낌이랄까. 내가 이 나이에 이런 상황에서 저런 욕을 하면 눈앞의 젊은 예술가가 했듯이 경쾌한 휘파람 소리처럼 휘발되지 않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를 느끼는 방식도 가지가지라는 생각과 함께 어쩐지 약간 서글퍼졌다. 

[50%2B리포트]웹용_배너+및+이미지11.png
 

별것도 아닌 욕에서 세대 차이를 느끼는 장면이 영화 <위아 영, While We’re Young>에도 등장한다.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조쉬(벤 스틸러)와 코넬리아(나오미 왓츠)는 전형적인 뉴욕의 중산층 지식인 중년 부부다. 부부는 우연히 조쉬의 강의를 들으러 온 20대 부부 제이미(아담 드라이버), 다비(아만다 사이프리드)와 친해진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존경의 표시에 마음이 녹은 조쉬는 제이미의 다큐멘터리 작업을 도와주려고 애쓰면서 동시에 ‘힙스터(hipster)1’로 살아가는 젊은 부부의 라이프스타일에 매료된다.1  

 

영화는 40대 커플과 20대 커플의 극명한 대비를 보여주면서 40대 커플이 20대 커플을 따라가려다 ‘가랑이가 찢어지는’ 웃픈 장면들을 자주 등장시킨다. 이를테면 중년 부부는 휴대폰과 노트북컴퓨터로 음악을 듣고 작업을 하는데 20대 부부는 엘피로 음악을 듣고 비디오테이프로 영화를 본다. 자전거를 타고 도심을 누비는 제이미를 따라 하다 조쉬는 허리를 삐끗하기도 하고 힙스터들의 밀교 같은 명상 파티에 따라갔다가 낭패를 보기도 한다. 

이들은 20대 부부가 서로를 향해 장난처럼 로맨틱하게 ‘f**k you’라는 말을 하는 걸 듣고 흉내 냈다가 대판 싸움을 하게 된다. “우리가 ‘f**k you’라고 하면 진짜 ‘f**k you’로 들린다구!” 같은 욕에도 연식이 있어서 젊은 사람이 하면 농담 같고 장난 같지만 나이 든 사람이 하면 진짜 폭력이 되고, 비천한 말이 된다는 거다. 

 

영화를 보면서 내내 마음이 짠했다. 조쉬와 코넬리아의 마음이 나의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조쉬 부부가 제이미 부부의 분방한 삶의 방식이나 취향에 매혹됐던 건 신기하고 근사해 보여서가 아니다. 억눌러왔던 자신의 욕망을 그들이 봉인 해제하듯 펼쳐놓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매혹된 레트로 문화는 바로 내 청춘의 추억이었고, 잘 꾸며진 리조트 바비큐장이 아니라 허름한 길모퉁이에서 병맥주를 마시며 흥청망청 즐기는 바비큐가 원래 내 취향이었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문화 속으로 들어가고 나니 왜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되는가 말이다. 

 

‘청년문화’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노년문화’도 당연한 건데 어쩐지 노년문화라는 말은 흔쾌하지 않다. 여든 살 정도가 되면 거리낌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다가오는 노년을 기다리는 입장에서는 전혀 반갑지 않다. 우선은 ‘청년’과 ‘노년’이라는 단어의 호감도에서 청년이 압도적으로 지지표를 받는 냉정한, 어쩌면 편견에 가득 찬 현실이 그 이유일 것이다. 두 번째는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한 번도 제대로 구현된 ‘노년문화’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미디어에서 주로 보이는 중장년 문화나 노년 문화는 대체로 호감도와는 거리가 멀다. 청년문화는 현실보다 화사하거나 멋있게 포장되는 게 당연한데 중장년 문화나 노년문화는 오히려 반대다.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개봉한 영화 <차인표>는 한때 청춘스타였다가 별 볼 일 없는 중년 배우로 쪼그라든 차인표를 차인표가 연기하는 자기반영적인 영화다. 이렇게 흥미로운 설정을 지니고 있지만, 영화 초반 등장하는 등산객 중년 여성을 그리는 건 낡은 전형에 묶여 있다. 꽃분홍색 점퍼를 떼로 입고 산길을 휩쓸면서 아는 연예인에게 최소한의 예의도 없이 달려드는 주책 아줌마들로 그려진다.

 

[50%2B리포트]웹용_배너+및+이미지12.png
 

노년문화는 어떤가. 늙음에 대한 성찰을 뛰어나게 그린 드라마 <눈이 부시게>에도 등장한 것처럼 노년들의 무대는 주로 다단계 판매 설명회 아니면 노인정이다. 노인정에서 그 앞 놀이터가 떠나가라 ‘내 나이가 어때서’를 합창하는 노인들이나 다단계 판매 설명회에서 동네 가수의 노래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는 할머니의 모습이 반복돼 비춰진다. 이런 걸 보면서 나의 노년을 결심한다. 노인정과 다단계 판매 설명회만은 절대 가지 않겠다고.  

 

사실 노인정은 죄가 없다. 팔순 넘은 우리 엄마에게 자식들보다 반가운 건 노인정 친구들이고, 우리 큰 언니 시어머니의 삶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는 건 다단계 판매 설명회다. 나와 내 친구들은 2년 전부터 ‘지루한 중장년의 전유물’인 것만 같았던 등산을 다닌다. 클럽에서 놀기에는 체력이 받쳐주지도 않지만, 산이 가진 청량한 기운의 매력을 중년이 돼서 알게 됐다. 

 

특별히 우스꽝스럽지도 한심하지도 않은 중·노년의 문화가 거부감을 주는 건 미디어가 그것을 희화화해 묘사하는 문제도 있지만 다른 방식의 노년문화를 좀처럼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몇 달 전 <69세>라는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갔다. 노년의 성폭행 피해자를 다루는 무거운 주제의 영화였는데 코로나 시국인 만큼 극장이 북적이지는 않았지만 노인 관객을 여럿 볼 수 있었다. 광화문에 있는 예술영화 전용 극장인 ‘씨네큐브’는 중장년 관객들이 많기로 유명한 극장이다. 요즘 트로트가 노인들의 전유물이 아닌 것처럼 예술영화 역시 젊은 관객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예술영화 감상’은 우월하고 ‘노인정’은 그렇지 못하다는 게 아니라 노인들이 향유하는 문화의 갈래 역시 청년문화만큼이나 다양하고, 앞으로는 더욱더 다양해져야 한다는 말이다. 

 

사실 제일 바라는 건 20대 힙스터들의 파티에 낀 조쉬가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되지 말고 거기서 녹아들어 어울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아무래도 중년이 된 나만의 바람이겠지. 나 역시 20대 때 나이 많은 어른들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영혼을 가출 보내고 싶은 심정이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비관적으로 볼 것만은 아니다. 적어도 지금의 40~50대가 본격적인 중장년기와 노년기로 달려가는 시기에는 노년문화라는 게 지금보다는 덜 납작한 모습으로 변모해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이전 세대보다 풍요롭게 자란 이른바 ‘X 세대’ 또는 ‘서태지 세대’는 문화적으로도 이전 세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걸 경험하면서 나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지난해 지금의 십 대와 이십 대 문화를 강타한 ‘탑골가요’가 90년대 음악들이라는 건 상징적이다. 

 

중장년이나 노년을 위한 별도의 문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런 건 오히려 나이 들어가는 걸 옹색하고 두렵게 만드는 장벽처럼 느껴진다. 20~30대에 경험하고 쌓아온 나의 취향을 중장년과 노년에도 장애물 없이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장들이 펼쳐졌으면 한다. 무엇을 새로 시작하는 게 아니라 지금의 것을 계속할 수 있다는 안도감이 노년의 진입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지 않을까.

 

 

 

1 1940년대 미국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용어로서, 유행 같은 대중의 큰 흐름을 따르지 않고 자신들만의 고유한 패션과 음악 문화를 좇는 부류를 이르는 말.

[출처] 네이버 어학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