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루브르(Louvre)박물관의 ‘모나리자’ 작품이나 남도 일번지 다산초당(茶山草堂)의 ‘정석(丁石)’ 표지 앞에 머물며 감상하는 시간, 몇 시간인가?  

눈치 없는 질문이라면, 그럼 몇 분? 아니 몇 초? 너무 미안해 마시라.

 

이탈리아의 탐사보도 전문매체에서 일하는 리사 이오띠(Lisa Iotti)가 런던의 테이트 갤러리의 연구 결과를 조사한 인용 글에 따르면 사람들이 작품 앞에 멈춰있는 시간은 단 8초였다. 너무했다고? 테이트 갤러리에서 직접 백남준의 작품을 눈으로 확인했던 내 경험에 비춰볼 때 8초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나마 우리 일행은 대한민국 예술가의 작품이라서 지체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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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런던 테이트 갤러리, 백남준 작품 앞에서

 

진품 앞에 서면 우리는 맨 먼저 폰에 인증샷을 담고 돌아서서 친구들과 80분 넘게 되새김 수다를 떤다. 슬로푸드, 슬로로드의 낭만적 저항에 맞춰 슬로루킹(slow looking)이 꿈틀대고 있지만, 정치인이나 무뢰한들에게는 여전히 ‘노룩인사’, ‘노룩악수’가 횡행한다.

 

오죽하면 동해안 한 사찰에는 두 가지 주의사항에 대한 소문이 있다. 하나는 잠시 스마트폰을 맡겨두는 것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사발’ 커피다. 원두를 볶고 갈고 내린 커피를 잔 대신 다완(茶豌)이라는 큰 사발에 담는다. 커피를 사발에 담는 이유는 두 손으로 속도와 싸우지 말고 공손히 받들어 드시라는 뜻이다.

속도와 무슨 원수를 졌는지 먹는 시간도 갈수록 초단타다. 오죽했으면 ‘뜨거운 것 빨리 먹는 사위, 처가 덕 본다’라는 잠언도 있다.

 

혼자서 고요히 움막에 지내다 보면 밥 짓는 것이 일이다. 하지만 요즘 첨단 밥솥은 신통방통하다. 밥솥에 밥을 안치는 순간, 미지의 여성은 10가지 넘는 옵션을 나열한다. 나는 늘 두 가지 선택지에 헷갈린다. 40분 ‘보통’과 15분 ‘쾌속’!

15분 ‘쾌속’으로 밥을 지을 때면 봄부터 여름 지나 무서리 가을까지 견딘 무수한 나락들과 농부들께 참으로 미안해하지 않을 수 없다. 쌀 ‘米’자에 담긴 88번의 수고와 80여 일 대장정의 쌀알들을 단 15분 만에 요리한다는 것이 바로 ‘죄’라는 생각이 든다.

더 가관인 것은 식당에서 모습이다. 15분 넘어도 메뉴가 안 나오면 삐질삐질 성질내고 그나마 내어진 밥상을 해치우는 속도는 경이롭다. 3분에 OK는 보통이고 1분 30초에도 뚝딱하는 식신들이 널브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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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부의 88번의 수고를 담은 ‘밥’

 

히말라야 산기슭의 나라에는 ‘아쉬라마(Ashrama)’라는 인생 주기표가 있다. 고대 경전 <베다>의 일생 4주기(四住期)에 따르면 100년 일생을 다음과 같이 4분 한다.

규범과 금욕, 학문과 기술을 배우는 ‘브라마치리야(Brahmacharya)’(0~25세), 결혼과 생업을 영위하는 ‘그리하스타(Gṛhastha)’(25~50세), 자연과 철학 속에 자기 절제를 확립하는 ‘바나프라스타(Vānaprastha)’(50~75세), 세속적 욕망 대신 탁발과 목샤(해탈)에 쏟는 ‘산야사(Sannyāsa)’(75세~ )가 바로 그것이다.

 

공자가 나이별로 제시한 지우학(志于學), 이립(而立), 불혹(不惑), 지천명(知天命), 종심(從心)과도 상응하지만 요즘 일보다 고기로 대접받는 워낭들도 양과 벌양, 천엽(처녑) 그리고 막창(주름위)으로 되새김하는 모습을 보면 시사하는 바가 있다.

 

여기서 주목하는 ‘바나프라스타’ 시기를 옛 인도에서 ‘산을 바라보기 시작할 때’로 해독한다. ‘Vānaprastha’라는 단어는 ‘숲’, ‘먼 길’(forest, distant land)을 의미하는 ‘vana’와 ‘행진’, ‘여행’(going to, journey to)을 가리키는 ‘prastha’가 결합된 말로 문학적 표현으로 하자면 은퇴 후 숲으로(retiring to forest) 들어가는 ‘자연인’의 삶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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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말라야 기슭의 부탄, ‘타이거네스트’

 

산도 산이지만 3면이 물로 싸여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는 바다가 주는 교훈도 새삼 크다. 바다는 언제나 살아있는 생명력이 있어 고산 윤선도는 5우(友) 중의 하나로 벗했다. 바다는 어떠한 물도 받아들이는 해불양수(海不讓水) 넓이와 품이 있다.

그렇기에 프랑스의 시인 폴 발레리(Paul Valéry)는 ‘해변의 묘지 Le Cimetière marin’에서 그 장엄함을 노래했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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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산도 가는 길
 

 

지자요수(知者樂水)요 인자요산(仁者樂山)이며, 

지혜자는 움직이고(智者動), 어진 이는 고요하다(仁者靜).

 

산도 멀고 바다도 먼 현실에서 불혹(不惑)을 넘긴 당신이라면, 강추한다!

50플러스센터로 가보라. 어쩌면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知天命)도 있겠다.

 

 

50+시민기자단 황용필 기자 (yphwang@skku.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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