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도시 을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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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락은 트랜드를 읽고, 핵심을 이해하여, 미래를 선점할 수 있게 합니다. 변화가 너무 빠른 도시는 인기끄는 트랜드 용어들로 치장되며 중언부언하면서 빠르게 도시의 맥락을 지워버립니다.

무작정 시간을 보낸다고 나아질 리는 만무합니다. 시간만 흐른다고 지혜로운 노인(도시)이 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나아지려는 노력없이는 그저 어리석은 늙은 도시로 몸과 마음만 낡을 뿐이며, 깨지고 쪼개져 더욱 거친 탐욕이 될 따름입니다. 스스로 나아지려는 노력은 자신(도시)을 돌아보고 생각해보는 즉, 맥락 알기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철공골목, 을지로!』

수 십년의 파티나(손때)가 묻어있는 연장들, 철쟁이들의 고단한 하루만큼이나 탁하고 칙칙한 공기, 기름때 묻은 공구상들의 거친 하루를 달래준 노포들, 그 위에 그려진 컬러풀한 셔터아트는 무거운 공기속에서 더 낯설게 번뜩입니다.

 

 

 

철강·미싱·인쇄·공구·자재·조명·타일·삼발이&사발이 오토바이.. 철가루, 기름자국, 녹슨 떼, 종이먼지 날리는.. 노가리와 골뱅이, 계란말이, 인현시장 먹거리.. 태풍 불면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것 같은 한옥 풍의 적산건물, 틈새라곤 1cm도 남김없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퓨전 양옥들, 꼬불꼬불한 골목은 과거와 현재를 넘어 미래를 가리키며 서울 속의 고즈넉함, 치열함, 그리움의 대표적인 타운 상권으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젊은 예술가들이 자리잡을 수 있는 저렴한 임차료, 서울 중심부라는 편리한 교통편, 지역 콘텐츠의 신박함으로 인해 이곳을 찾는 발걸음에 활력이 더해지는 곳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인쇄골목, 을지로!』

먼저, 조선시대 을지로에는 체찰사부(변경국방 담당), 혜민서(서민들의 병원인 보건소 역할), 사자청(외교문서를 정서), 장악원(국악인을 양성) 등의 행정관청이 모여 있었던 중심지였습니다. 당시 남산 물길에 의해 생긴 이 야트막한 황토흙 고개는 땅이 몹시 질어서 먼 곳에서 보면 마치 구리가 햇볕을 받아 반짝이는 것 같아서 구리빛이 나는 고개라는 자연 발생적인 지명인 “구리개”로 불렸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식민통치의 번영을 기원하는 호사스러운 새 이름 “황금정통”이라는 이름으로 수백년 동안 가져온 전통적인 지역명을 소멸됐고, 광복후 해방과 동시에 민족 정기를 회복하는 취지에서 일본식 지명은 모두 폐기하여 “을지로”로 개칭하였습니다. 일제(일본제국주의) 말 을지로 골목은 중국상인(화교)들이 장악하고 있어, 우리나라 을지로 상인들이 그들의 세력을 이겨보자는 의미로 정부에서 살수대첩때 수나라를 격퇴한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의 성을 따서 동네 이름을 을지로로 개칭하였습니다. (현재 을지로는 산림동, 입정동, 오장동, 방산동, 인현동을 아우릅니다)

 

이렇게 조선시대부터 행정관청들이 모여 있어 한지 가게들이 모여 있었고, 일제강점기부터 이 일대에 영화관이 모여 있어 영화 홍보전단 인쇄업체가 모여 있었고, 1970~80년대 지성의 상징이었던 저항서적과 민주화운동으로 을지로는 인쇄와 출판 문화 골목으로 정점을 찍게 됩니다.

 

『노포마을, 을지로!』

인쇄 노동은 작은 활판에 눈은 침침해지고, 그 무거운 종이에 등이 휘는 무척 고된 일입니다. 인쇄 단가는 낮아서 밤을 새워 일하지 않으면 밥벌어 먹고 살기 힘듭니다. 노가리는 명태새끼를 말린 것인데, 정품으로 팔수 없는 값싼 명태를 말려 싸게 유통시킨 것으로 도시 노동자의 삶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1960년대 당시 저렴했던 골뱅이 역시 이 동네 구멍가게에서 가난한 인쇄공들의 퇴근길에 빠르게 내놓던 간단 편의식이었습니다. (참고로 골뱅이는 고동의 일종이며, 굼벵이와는 다릅니다^^) 1970년대 청바지와 생맥주 열풍이 일어났고, 젊음의 상징이 막걸리에서 생맥주로 바뀌어서 생맥주 안주로 골뱅이무침이 크게 환영받았습니다.

 

 

 

시간을 뛰어 넘어.. 『예술도시, 을지로!』

바쁜 도시인의 삶은 실체도 없는 것들에 쫓기며, 시시각각 경쟁하는 속도전 속에 불안과 외로움은 더욱 깊어갑니다. 이국적인 것 혹은 판타지에 대한 열망은 바쁘고 지루한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꿈꾸는 탈출구입니다. 허름하고 싸구려인데 감성을 건드리고, 익숙한 일상과 낯선 일탈이 공존하고, 문을 여는 순간 홍콩 영화의 판타지가 펼쳐지는 탈출구 같은 곳 말입니다.

 

얼마 전 “을지로 아트위크”와 더불어 을지로에서 개최되는 “을지판타지아”라는 전시회를 다녀왔습니다. 이병찬, 박슬기, 신단비, 진기종 작가의 작품에서 왜 을지로가 도시인들의 발걸음을 빨아들이는 묘한 힘을 가졌는지를 조금 이해했습니다. 예술도시, 예술특구로 걸음마를 하고 있는 을지로는 카페·바(bar)·맛집·커뮤니티·전시공간으로 변화를 거듭하고 있었고, 을지로에 입성한 활동가(player)들 중 특히 청년 예술가들은 기존 프레임과 질서를 존중하며 저마다의 방식으로 새롭게 공존하는 것 같았습니다. 청년 예술가들의 개성과 열정은 낡고 오래되어 복잡하게 얽힌 을지로의 풍경에 색다른 변화를 불러오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노력을 보면서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다른 부분에서 부족한 부분을 메꾸는 방법이 연대이며 공동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상상력이 가미된 을지로는 각자에게 다른 이유로 소중한 하나의 장소이며 공간이 됩니다. 을지로에 발걸음을 하는 사람들, 일상좌파나 힙스터는 자유(취향)의 가치를 월급(돈)보다 조금 더 가져가는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한편에서 “무엇이든 다 만들어줄 수 있다는 패기와 자존심” 가득했던 곳에서 시작되는 “힘으로 밀어버리는 도시재생”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미래를 알 수 없기에 역사와 진화의 한 페이지로 생각해봅니다. “욕망은 왜 이렇게 더럽지만 이토록 매력적인가”라는 말처럼 자본은..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저 멀리 골목 끝으로 나만의 아름다운 골목을 하나쯤 간직하는 것, 거기에 작은 아지트 혹은 은신처 하나를 열고 들어설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올 우리 자신의 모습을 알고 있으니, 그런 영혼의 안식처 혹은 피신처를 하나 갖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행복한 여행,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