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집’은 서울시50플러스재단에서 시행한 공익활동 지원사업에 참여한 더함플러스협동조합의 결과물입니다.

이 책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재사용하려면 반드시 더함플러스협동조합과 서울시50플러스재단의 서면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나의 뜨락으로 간다

 

육현주

 

 

리틀 포레스트

‘배가 고파서 왔어, 정말이야’ 허기진 배, 굶주린 영혼의 혜원이 무심한 듯, 그러나 입 안으로 꼭꼭 되씹듯 뱉은 말이다. 그 한 마디 대사만으로 영화는 그 소임을 다했다. ‘쿵’하고 내려앉은 마음에 서서히 꽃이 피고 별이 떠올랐다.

3월의 어느 주말 심야에 숨어들듯 구겨 앉은 한 영화관에 서 ‘쉼’과 ‘안도’의 평온을 누렸다. 앵글은 소박한 시골 마을의 사계를 느린 눈으로 펼친다. 청춘들의 단기 내면 성장사가 자전거 바퀴에 굴려간다. 하이얀 눈 빛, 노오란  빛, 푸르디 푸른 성장 빛, 낙엽 내음 번지는 빨간 빛, 다시 조락의 하얀 빛.

 

혜원의 허기를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 독을 긁는 마찰음만 가득, 1인분도 못 미치는 쌀. 혜원은 눈밭에 얼어있는 배추 밑동을 찾아내 언 손 불어가며 캐낸다. 모락모락 고향의 인정을 피어 올리는 배추 된장국밥. 화면이 생기를 띠며 꽁꽁 얼어있던 실내에 온도를 채운다. 혜원은 향수에 대한 갈증을 단숨에 씻어낸다. 정글 도시에서 품었던 독기와 긴장을 풀어 헤치며 단잠에 빠져든다.

 

그녀의 귀환을 반기는 재하는 일찌감치 귀향해 농사를 짓는다. 기업조직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라 자복한 처지다. 군더더기 말도 필요 없이 새끼 백구 한 마리 건네며 씨익 웃는다. 그 멋쩍은 웃음이 ‘네 맘 뭔지 알거든?!’ 하는 듯하다. 비언어의 상징성이 갖는 신뢰감에 또 한 번 마음을 놓는다. 또 한 사람, 친구들이 다 떠나는 고향마을을 지키던 은숙. 호시탐탐 도시로 튈 생각을 하지만 기껏 읍내 농협은행을 지키고 있 을 뿐이다. 재하를 향한 홀사랑이 그녀의 욕망을 잠재울 수 있을지 관전 포인트다.

 

더 이상 머물 곳이 아니라 싶어 탈출을 감행했던 고향. 묻어야할 기억들 사이로 삐집고 나오는 ‘따듯한 영혼의 밥상’.  혜원은 엄마가 만들어주던 요리를 복기하며 기억을 캐낸다.

 

‘쏭쏭쏭, 탁탁탁 ᆢ 보글보글’


생기 넘치는 경쾌함은 언제나 요리를 하고 완성되어가는 그 순간이다. 귀로 먹고 눈으로 먹고 있다는 착각이 인다. 두릅, 배추, 푸성귀볶음, 얼린 무조림의 주요 반찬뿐만이 아니다. 밤조림, 고구마말랭이, 수유잼, 쇠뜨기조림 등 이제는 고급스런 퓨전 한정식 집에서나 만남직한 음식들이 화면 가득 식욕을 자극한다. 청춘의 코드는 낫또떡, 양배추케익, 누텔라, 팥 튀김 등 형형색색의 성찬을 차려낸다.

 

직접 빚은 막걸리까지 그들은 천국을 통째로 업어왔다. 마냥 행복에 겨워 배를 불리고 마음을 채우고 웃음을 회복하는데, 난 내내 눈가가 젖었다. ‘자연, 요리, 딸’로 자신의 ‘리틀 포레스트’를 만들고 간신히 버텨냈던 혜원의 엄마. 세상의 전부였던 혜원에게 엄마는 어느 날,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혜원에게 진정한 ‘독립’을 선물하고자 했던 것일까?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고 온전하게 자기 발로 선다는 건 이런 거였다. 모태를 잃은 혜원에게 고향은 더 이상 보금자리일 수 없었으리라. 독기를 품고 고향을 버렸던 혜원. 그런 그녀가 하얀 밤에 숨어들었다.

 

일상을 회복하고 순간순간을 제대로 느끼고 숨 쉴 수 있을 때. 진정한 자신과 만난다. 마루 한가운데 풀지 않은 채 꼿꼿이 서 있던 혜원의 배낭. 언제든 도시로의 탈출을 준비하고 있지만, 겨울, 봄, 여름, 가을을 지나도록 그 소임을 다하지 못한다. 자신만의 ‘케렌시아’에서 영원히 둥지를 틀게 될지 감독은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았다. 다만 이제 혜원은 시공을 초월한 케렌시아에 깃들어 있다는 걸 알 뿐.

 

린다가 돌아왔다. 몇 개월 이국 이곳저곳을 머물러 있던 그녀는 반드시 ‘Y표 밥상’이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김치, 된장 찌개만으로 충분하다고 떼를 썼다. 이름하여 7공주(공간의 주인) 모두가 귀국환영을 핑계로 양평 국수리 Y의 집에 깃들었다. 국수역 뒤 한 하우스 개발 단지 내에 이들 중 몇몇이 아주 작은 집을 지어 이웃으로 살기로 되어있었다. 먼저 둥지를 튼 Y의 집은 자연히 우리들이 숨어드는 다락방이자 아지트가 되었다. 지친 영혼들은 누구라도 무시로 드나들며 숨구멍을 틔운다. 오늘의 회동이 내겐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 대한 오마쥬인 양 싶었다. 아무 준비없이 맞은 식객들을 위해 그녀는 ‘치륵치륵, 쏭쏭쏭ᆢ’ 분주히 칼질을 했다. 더러는 널부러진 채 조불조불 지껄이고 더러는 한 손 거드느라 분주히 씽크대 사이를 오갔다.

 

스파클링 와인의 달콤함에 굳어있던 주름이 펴졌다. 찹 스테이크 속 파프리카의 아삭함에 활기를 얻었다. 두툼한 계란 말이로 입을 채웠다. 구수한 된장찌개로 속을 데웠다. 낙지속젓의 칼칼함이 기분 좋게 혀를 자극 한다. 서두르지 않고 느린 말투로 저마다의 입맛을 세심히 살피는 그녀 덕에 지친 영혼이 녹아 내렸다. 간헐적으로 지나가는 철마의 단말마에 몸도 둥둥 떠오른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일상의 거룩함 내지는 위대성에 대해서 오래도록 생각해왔다. 오늘 치유의 밥상이 제대로 기능을 했다. 장시간 외유에서 돌아온 린다만 치유의 밥상이 필요했을까? 실은 나도 허기지고 헐벗은 마음이 어떻게도 채워지지 않았다. 지난 겨울, 나는 혹독한 시간을 견뎌야 했다. 지금까지도 그 후유증을 고스란히 겪으며 트라우마를 떨치지 못한다. 심한 내상으로 죽고 싶기까지 했던 시간.

 

일과 관련해 문의가 있는 사람에게 관련 업체를 연결시키고 알아봐주다가 한 사람을 알게 되었다. 의지가지없이 외국에서 떠돌다 한국에 일과 관련해서 들어와 있던 K는 모국에 대한 원망이 많았다. 본인의 말에 의하면, 유년시절부터 부모로부터 상처를 깊게 입었으며, 거래로 만난 한국사람들에게 수없이 당해서 한국 사람을 믿지 못하는 성향이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믿는 편인 내가 편했는지 정신적으로 의지해왔고, 고향을 잃은 그의 일생을 동정하여 안쓰러움에 다독여줬었다. 비상사태란 늘 예고 없이 오는 거지만, 하필이면 현실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내 한 몸 지탱하기도 힘들었던 바로 그때 소용돌이를 몰고 왔다.

 

119 응급차에 실려 가면서 다급히 전화가 왔다. 내 양심으로는 도저히 사람을 내칠 수 없었다. 병원에 도착한 후, 눈 깜빡할 찰나지간에 모든 일은 흘러갔다. 어느새 내 손으로 ‘연대보증인’ 사인을 하고 말았고, 한 달에 걸쳐 보호자 아닌 보호자로 두 번의 심근경색 스텐트 시술비용을 고스란히 떠 안게 되었다. 근 5천만 원에 이르는 병원비를 마이너스 대출과 신용카드 결제로 감당했어야 했다. 대책을 마련하러 입국 한다던 동료들은 감감무소식인 채, 불안함이 현실로 다가왔 다. 돈도 돈이었지만 하나하나 드러나는 K의 정체성에 대한 진실이 사람을 절망하게 만들었다. 거짓으로 속였던 사안들이 밝혀지는 것이 불안했는지, 혹은 자신을 대신해 결제하러 오겠다던 사람들의 실체가 없었던지, 결국은 깜쪽같이 사라져버렸다.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사람에게 도저히 해서는 안될 일을 하고 말았다.

 

사방팔방으로 탕감할 방법을 찾아 문의를 하고 다녔다. 제 도권에서 탕감할 수는 없는지, 혹은 그의 근거라도 찾아서 미친 듯이 헤매었지만, 주민등록까지 말소된 지 10년이 넘어 의료보험을 살릴 방법도 없고 설사 선처를 해도 본인이 없으면 속수무책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어떻게 내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묻고 또 물어도 답을 구할 수 없었다. 한 달 여를 넋을 잃은 채, 울다가 지쳐 잠이 들었 다. 자신의 무지와 무조건 사람을 믿는 어리석음만 탓했다. 자동차 핸들만 잡으면 벽에 그냥 쳐 박아 버리고 싶은 충동을 종종 느꼈다. 사태의 심각성을 지켜 본 후배 J가 아예 작정을 하고 나를 지켰다. 24시간 우리 집에서 기숙을 하며 나를 돌봤다. J가 박사반 강의를 들으러 가서 없는 시간이면, Y가 전 화를 해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나를 혼자 있게 두지 않았다. 아무 하는 말이 없어도 그저 숨소리만이라도 들으면서 끊임없이 말을 걸고 안전을 확인하곤 했다.

그 충격 때문이었던지 허리 디스크가 급성으로 와서 꼼짝을 하지 못해 결국은 병원 도수 치료를 하러 다녀야 했다. 치료를 다니는 자신이 어이가 없었다. 평생 사람을 좋아하고 내걸 아끼면서 나보다 불행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돕길 좋아 했다. 마음을 나누며 함께 세상을 건너는 재미로 살았는데. 염치를 알고 폐를 끼치지 않는 삶을 살기위해 노력했는데, 집을 지어 가을에 이사하기로 한 계획도 틀어져서 자꾸 늦춰지고 있었다. 이사에 대비해 소유했던 집을 진작에 팔았다. 임시로 있기로 했던 곳의 월세만 꼬박꼬박 지출하고, 운영하던 사무실마저 정리해서 일거리도 확 줄었다. 무엇 하나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던 아픈 시간이었다. 이런 청천벽력까지 떨어지고 보니 자존감은 바닥을 치닫고, 평생을 살아왔던 신념과 가치체계가 송두리째 흔들려 나는 왜 사는지 알 수 없었다.

 

해가 뜨고 지는 것에 대한 실감조차 없이 망연히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후배들은 내 회복을 위해 정성을 다하느라 자신들의 삶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들을 더 이상 괴롭힐 수 없었다. 퍼뜩 정신 차려 내 일상을 회복해야 했다. 한 겨울 비 바람을 피할 공간이 있는 게 고마워지기 시작했다. 밥 한 술 뜨는 일에 대한 감사함으로 매번 목이 메어 왔다. 내 마음이 지옥일 때 천당도 경험하게 되는 거였다. 거짓말처럼 짠 듯이 지인들로부터 구호품(?)들이 답지해왔다. 먹을거리가 떨어지지 않고 냉장고를 채우고, 심지어는 통장에 돈을 채워둔 친구와 선배 언니들이 있었다. 나중에는 누구에게도 계좌번호를 알리지 않도록 단도리를 해야 했다. 기적적인 일들을 함께 경험하면서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고 살았는지 실감했다.

평소에도 나는 ‘사람부자’라서 내 ‘사람통장’에는 잔고가 그득하다고 큰 소리쳤는데 검증이 된 셈이었다. 뒤늦어 소식 전해들은 이들도 어떻게든 나를 도우려 했지만 빚만 쌓이는 게 또 힘들어 고사했다. 한 푼 아끼겠다고 난방을 끄고, 잘 차려먹는 것조차 죄가 될 듯해서 반찬 한 가지로 내핍에 내핍을 거듭하며 견뎠다. 사람을 만나는 게 겁이 났다. 아는 사람 눈 마주치면 눈물부터 쏟아져 내려서 가만히 집에 은둔하고 있는 일이 가장 편한 노릇이었다.

집 밖으로 나갈 용기가 생길 때까지 집안을 뱅글뱅글 돌면서 뭐라도 했어야 했다. 너저분하게 쌓아두고 있던 짐들을 하나하나 분류해 정리를 시작했다. 물건들이 꽉꽉 채워져 있는 서랍장, 거실장들이 나를 압박이라도 하는 듯, 가슴이 답답했다. 큰 침대부터 없애버리고 대형 TV를 줘버리고 나자 방이 훨씬 넓어지면서 마음의 공간마저 커졌다. 옷장을 정리해서 주변에 나눠주고 여백을 만들었다. 넘치게 있는 것만을 잘 쓰고 버리는 것을 목표로 하자 여기저기 뒹굴던 샘플조차 귀하고 고마웠다. 그렇게 묵혀둔 것들을 찾아 쓰면서 모든 게 감사해졌다. 여전히 참 많은 것을 가졌구나, 지금이 아니었으면 절대 깨닫지 못했을 것들을 보고 느꼈다. 가급적 단촐하고 단순하게 살아야한다고 관념으로 갖고 있던 일들이 비자발적 실천으로 이어졌다. 물리적 공간이 넓어질수록 내면의 사색 창고도 커져갔다. 굶주리지 않으며 정신적 각성 상태로 나만의 동굴 케렌시아에서 겨울잠을 푹 자는 시간이 늘어났 다. 비워야 차게 되는 ‘텅 빈 충만’을 몸으로 느꼈다. 하나를 잃으면 또 다른 하나의 깨달음을 얻게 되는 이치가 자명했다.

 

그래도 그래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절대 그래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아무리 궁지에 몰렸어도 자신을 믿어준 사람을 그런 식으로 되갚아서는 안될 일이었다. 어쩌다 K는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을까? 곰곰 생각해보면 K는 노숙인이나 다를 바 없었다. ‘관계’가 다 끊어져서 누구도 없다고, 그런데 자신은 사람을 믿지 않기에 그런 ‘관계’조차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고. 그런데 좋은 사람들과 소소한 행복을 맛보며 재미나게 사는 내 모습을 보면서 사람답게 살아야 하는 게 뭔지 수시로 깨닫게 된다고 제 입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K의 정체가 탄로나자 후배 J가 연신 당부했다. 갚을 돈을 청산하고 나면 다시는 나타나 언니를 괴롭히지 말라고.

 

성공이라는 프레임에 갇혀서 헛된 욕망을 꿈꾸고 외국을 떠돌았던 세월에 그는 ‘집’에 깃든 사람의 온기를 경험하지 못 했다.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가족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만들어내는 편안함이나 안정감을 어디에서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주변에 마음을 나누는 사람 하나 없이 스스로 고립이 되었다. 과거의 상처에 갇혀 부모에 대한 원망을 품은 채, 피해의식으로 사람들을 믿지 못했다. 처음으로 한국에 돌아와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조건 없이 ‘진심’으로 자신을 대하는 사람을 처음 봤다고, 그러나 말 뿐이었다. 그는 절대 모른다. 일상의 진실이 ‘습’이 되고 체득이 되는 그 과정이 빠져 있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담한 겨울을 보내고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았던 봄도 찾아왔다. 휘적휘적 허공을 떠돌더라도 한 걸음씩 나아가야 했다. 공백의 안부를 묻는 이들을 만나면 다시 생생히 기억되는 이야기. 트라우마로 화인이 되어 잊혀지진 않았다. 그래도 내성이 생기는지 점점 일체의 물기를 빼고 몇 줄 요약이 가능해져갔다. 내 잘못이라고 참담하도록 부끄러워서 어디 가서 입도 뻥긋 못할 줄 알았는데 체계적 둔감법으로 익숙해지는 편이 옳았다. 그 과정에서 ‘네 잘못이 아니다’라고 끊임없이 나를 다독이는 손길을 만나고, 안쓰러움으로 따듯한 눈길들이 포개졌다.

 

군대에 가서 첫 휴가를 나온 아들은 ‘엄마 암이라도 걸린 줄 알고 가슴 졸였잖아. 그래도 엄마는 사람 목숨 하나 살렸어. 그걸로도 큰일 했어. 괜찮아. 엄마가 더한 걸 다 잃어서 내가 빚쟁이로 살아야 해도 괜찮아. 엄마 혼자 마음 많이 졸였지? 이리와, 엄마 안아줄게.’ 철없는 아해 마냥 아들의 품에 안겨 목을 놓아 울었다. 못난 엄마가 여전히 세상에 적응 못하고 군 복무 중인 아들에게 걱정을 끼치고 있는 꼴이라니...... 민망함에 견딜 수 없었다. ‘엄마는 또 유사한 순간이 와도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인 거 알아. 이제 그런 일이 펼쳐지지 않길 바랄 뿐이지.’ 아이는 이 순간만큼은 전적인 수용으로 나를 안심시켰다. 내 편을 가진 충일감이 깊이 스며들었다.

‘가족이란 누가 안 보면 쓰레기통에 콱 구겨 넣어 버리고 싶은 존재’라고 어느 TV 드라마에서 말했단다. 전적으로 공감했다고 한 지인이 인용했다. 아픔을 주고 고통을 주는 징글징글한 그들에게서 해방되는 날만 기다린다고 넌더리를 쳤 다. 그렇게 말하는 당사자는 그 무심한 남편과 유별난 딸들 을 위해 정성을 다한 건강식을 차려낸다. 각자 방을 갖고 싶다는 딸들을 위해 없는 형편에도 대대적인 인테리어 공사를 해서 그들의 구미에 맞춰주었다. 공간이 주는 만족감으로 제법 긴 시간, 그녀 가족들의 입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는 걸 보았다. 그런 거다. 가족이란 희노애락을 겪으며 서로 엉켜 있는 칡덩굴. 그리 지독하게 얽혀있기에 맛은 쓰나 몸에는 좋은 그런 존재.

 

다행하게도 집 공사가 활력을 띠고 7월 준공을 앞두고 있 다. 땅을 처분하고 집 짓는 일을 포기해야 하지 않을까 궁리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에게는 물리적 심리적 변화가 절실하다. 폭넓은 치맛자락처럼 깊고 넓게 뿌리를 드리울 곳이 필요하다. ‘양평陽平’이란 이름처럼 볕이 골고루 펼쳐지는 곳에서 따스한 햇살로 젖은 영혼을 말려야 한다.

 

마른 물기를 나의 그녀들이 걷어줬다.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토닥이며 느슨한 연대로 울타리를 쳐준 그녀들. 관계망을 잃은 자들은 극단을 선택하게 된다. 스스로의 잘못된 확신이든, 감정의 미숙이든 더 이상의 심리적 연대 ‘관계’가 없다고 섣부른 판단을 내리는 이들. 그런 상태에 이르기 전, 비명이라도 지를 수 있는 마음들에 손을 내밀어 주고프다. 억울하고 분한 사람들을 위해 나는 내 뜨락 한 귀퉁이를 무심히 내어 놓을 것이다. 별이 쏟아지고 비가 흩뿌릴 다락방에서 맘껏 울도록 음악도 짱짱하게 볼륨을 키워줄 거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자신의 존재이유와 가치를 잃어버린 이들에게 결코 ‘네 잘못이 아니라’고, 그들을 아프게 한 그 웬쑤들을 향해 대신 욕지기를 한 바탕 쏟아주기도 할 거다. 잠 못 드는 새벽녘, 길동무 되어 새벽별을 맞으러 갈 거다.

 

내 마음이 지옥일 때, 욕망을 향한 일체의 번민을 멈출 수 있었고, 그제서야 비움의 미학을 만졌다. 소확행소소하나 확실한 행복을 차근차근 가만가만 누린다. Y가 차려준 소박한 밥상, 세월을 함께 견뎌주는 친구들. 햇빛 한 줌, 바람 한 오라기. 나만의 케렌시아, 리틀 포레스트가 그 곳에 있었다. 이제 내가 그녀를 쫓아 누군가의 입가에 미소가 머물 수 있도록 작은 뜰을 가꿀 거다. 그 곳엔 ‘행복’을 의미하는 세잎클로버만 그득 했으면, 네잎클로버의 행운을 쫓으려 ‘지금’을 놓치지 않으리라. 지천으로 널린 ‘행복’을 주워 담으러 내 집 뜨락에 간다. 오롯한 ‘나’는.


 

육현주

‘나다움’의 삶을 살려는 사람들의 성장을 돕습니다.

동기부여/ 진성 리더십/ 인권/ 인문학/ 중국어 관련 강의와 상담, 코칭을 합니다. 양평 자택 자통재(自通 齋)를 힐링 문화공간으로 공유하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