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전 이맘때쯤부터 글을 쓰게 되었다. 작가라는 호칭에 두근거려 잠을 못 이루기도 하고 밤새 글을 쓰며 꼬박 지새운 날도 많았다. 그날따라 운이 좋아 나의 글이 누군가의 마음에 들었고 나는 주부만이 아닌 또 다른 부캐가 하나 생겼다. 부캐는 온라인 게임에서 원래 캐릭터가 아닌 또 다른 캐릭터라고 한다. 사실 부캐라는 말도 일 년 동안 온라인상에서 글을 쓰며 작가님들과 소통하며 알게 된 말이다. 그래도 무엇인가 또 다른 나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글을 쓰면서 하루의 일과가 바뀌었다. 시간만 나면 마카롱 연습을 하고, 과자를 구워 지인들에게 선물을 하던 일 년 전과는 확연히 일상이 달라졌다. 새벽에 눈을 떴을 때 가족들이 깨지 않은 두어 시간에 나는 주로 글을 쓴다. 다른 작가님들의 글은 이동하면서 읽는다. 밤새 울던 매미도 잠들었을 것 같은 새벽의 고요가 좋다.
어느 날 에세이를 써서 작가라 불리어졌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으로 많이 불릴수록 다른 분들의 훌륭한 문체와 필력을 마주하다보면 나는 한없이 작아졌다. 그 마음은 목구멍이 부은 것처럼 삼켜지지 않고 의기소침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다른 문학으로 관심이 갔던 것도 어쩌면 주눅이든 나를 일으킬 길을 찾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할까 말까 고민을 하다 봄이 되면서부터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거리를 걷다 떨어진 목련꽃잎을 보면서 까맣게 널브러진 그리움을 적었다. 벚꽃 흩날리던 봄날엔 나비처럼 날아가는 벚꽃 잎을 노래했다. 그렇게 봄에 나는 시인이 되어 일상을 애달프고 아름다운 시선으로 보려고 했다. 오십에 시인이 되어 보는 세상은 연약하고 선하며 몽글몽글해지는 마음을 갖게 했다. 그러다 시를 돌아보지 않는 순간이 왔었다. 나의 시가 못나 보이고 다시는 쓰지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날도 왔었다.
그때 동시를 공모한다는 기사를 보고 며칠 동안 동시를 수십 편을 썼다. 그때는 날아드는 초파리도 동시의 소재가 되어야 했고 기어가다 멈춘 지렁이도 나의 동시 안에서는 주인공이 되어 주어야 했다. 시를 멈출까라는 생각에 빠졌을 때 동시를 쓴 것이 과연 나은 것이었을까 모르겠다. 시와 동시의 감정의 극간이 너무 커서 둘을 동시에 가져가는 것은 나에게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 다시 읽어본 동시들은 아이와 어른의 사이에 둥둥 떠다니는 감정의 부유물 같았다.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의 설렘과 솔직함이 어디로 갔을까. 왜 글을 쓰면서 주저하는 것일까. 며칠을 생각했다. 그러다 일 년 전과 지금의 다른 점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했느냐 안 했느냐에 차이에 있었다. 나를 위한 글을 쓸 때는 나의 글에만 충실했지만 누군가와 비교를 하는 순간 나는 주저하게 되더라는 것이다. 공부를 할 때도 남과 비교하는 순간 괴로움이 될 수 있는 것을 아는데도 말이다. 비교를 하면서 스스로를 바라봐 주지 않고 차가운 시선으로 나의 시간들에 생채기를 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빛이 있고 자신의 소리가 있다는 것을 잠시 잊었다. 처음부터 누군가를 위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쓰다 보니 사람들이 나의 글로 조금의 위안이라도 받게 된다면 더없이 좋을 것 같았다. 그것에 집중을 하면 된다. 나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글들을 내가 먼저 다독이고 좋아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써 두었던 시들을 천천히 다시 읽어보았다. 겨울을 보내고 봄과 여름을 맞던 설렘 가득한 봄날이 있었다. 감정에 최선을 다해서 썼던 글들이었기에 그때의 나에게 미안해졌다. 오십이 다되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면 다소 늦은 것 같긴 하지만 글을 쓰지 않던 작년과는 분명히 달라졌다. 할까 말까 하던, 하고 싶던 문학의 갈래길에서 이 길도 가보고 저 길도 가보는 내가 얼마나 자유로운지도 안다. 글을 쓰는 순간, 쓰는 마음에만 집중한다면 나는 가진 것이 아주 많은 사람이란 것도. 그래서 이 여름날, 이 시간이 더없이 소중하다.
50+에세이작가단 리시안(ssmam99@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