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저는 지금 작은 항구에 있습니다. 소금기가 별로 느껴지지 않는 갯바람이 불어옵니다. 넓은 계곡인지, 긴 호수인지, 바다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산을 끼고 푸른 물결이 흐르고 있습니다. 선착장에 여기저기 떠있는 별들, 불가사리가 이곳이 바다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긴 세월 동안 빙하가 산을 할퀴고 내려와 U자형 골짜기를 만든 협만입니다. 거친 바다가 뱀처럼 긴 혀를 내밀어 육지를 파먹은 듯 산자락은 휘뚤휘뚤합니다.
바다를 누구보다도 좋아했던 당신을 떠올립니다. 희한하게도 당신은 언제나 바빠 보였습니다. 실제로 바빠서 바쁜 것인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지요. 아침에 눈뜨면 의도하지 않아도 해야 할 일이 늘 밀려있다고 당신은 투덜댔습니다. 오늘 하루가 어제의 반복이고, 그런 반복이 내일도 모레도 계속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당신은 푸른 바다를 꿈꾸었지요.
기억하나요? 당신이 지도를 펼치고 붉은 펜으로 따라가던 항구에는 팔월의 햇살이 만(灣) 가득 고여서 푸릇한 능금처럼 싱싱합니다. 힘찬 엔진 소리를 내며 배가 바다로 출발합니다. 플롬–구드방겐 구간은 피오르드 여행의 하이라이트지요. 설레고 긴장되는 순간입니다. 아울란 피오르드(Aurland fjord)와 네뢰위 피오르드(Naeroy fjord)를 페리보트를 타고 구드방겐(Gudvangen)으로 가는 뱃길을 저는 당신과 함께 떠나기로 마음먹습니다.
플롬에서 구드방겐까지 가는 길
물은 물대로, 산은 산대로, 폭포는 폭포대로, 하늘은 하늘대로 대자연의 데칼코마니를 보여줍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세찬 물줄기가 산을 타고 내려와 바다로 곧장 떨어져 내립니다. 시원한 폭포수를 바라보니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물이 실핏줄을 타고 온몸으로 퍼지는 것 같습니다. 페리보트에는 다수의 여행객이 탔지만 지역 주민들의 운송 수단이기도 해서 배가 도착하면 ‘아울란’ 마을과 ‘운드레달’ 마을 주민들이 나와 짐을 싣기도 하고 내리기도 합니다. 마치 우리네 남도 섬마을을 떠오르게 하는 장면입니다. 여행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들의 일상이 한없이 평화롭습니다. 문득, 여행과 일상은 한 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당신과 제가 한 몸이듯이 말입니다.
“물 위를 떠다니는 배들도 가끔 육지로 올라와 쉴 때가 있지. 배 밑바닥에 붙은 조개 껍질도 떼어내고 온갖 이물질을 제거하기 위해 바다를 떠나있는 시간이 필요하거든.”
가끔 당신이 길을 떠날 때마다 읊조리던 말입니다. 낯선 도시를 떠돌며 길을 묻고 또 물을 수 있는 당신, 저는 그런 당신이 좋습니다.
험준한 산 아래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보입니다. 갑자기 아플 때나 시장이 멀어서 다소 불편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자연의 품에 안겨 사는 그들이 더 행복해 보인다는 생각이 점점 짙어집니다.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이 드는 마을, 어쩌면 달력 그림에서 한번쯤 마주쳤을 풍경입니다. 산간 마을인데도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호수 같은 바다 위를 굴러다닙니다.
당신도 좋아하나요?
햇살이 카랑카랑 쏟아지는 수면 위까지 내려온 산 그림자들, 비탈마다 무리지어 서 있는 사과나무들, 그리고 귀밑머리를 스치는 바람들…… 페리보트를 따라오는 갈매기 무리를 바라보다가 저는 난데없이 제 방에 두고 온 나의 당신을 사무치게 그리워합니다.
혹여, 꿈이나 그리움 따위는 잊어버리고 그저 눈앞의 일에만 급급하였는지 모르겠군요. 저 멀리 당신과 제가 당도할 구드방겐(Gudvangen) 항구가 보여요. 이제 당신을 에워싸고 있는 무수한 허물들을 벗어버리고 출렁이는 바다 어디쯤, 당신이 좋아하던 그곳으로 오십시오. 저기 새로운 시간들의 파도소리가 들리지 않으세요?
50+에세이작가단 김혜주(dadada-book@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