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지나온 생을 돌아보며 바보같이 살았다고 자책하거나 후회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당시에는 열심히 산다고 살았지만 지나보니 잘 산 게 아니었음을 깨달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닐 것이다. 50+세대가 살아온 역정을 되돌아보면 사회가 안정되고 평화로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늘 불안했고 끊임없는 정치경제적 변화의 소용돌이 가운데 있었다. 50+세대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 변화에 적응해야 했고 생존경쟁의 대열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쳐야 했다. 그런 과정을 겪다보니 때로는 잘못된 판단을 하기도 했고 때로는 삶의 길목에서 정처 없이 방황하기도 했다. 시대를 탓할 수도 있고 환경을 탓할 수도 있지만 자신에 대한 자책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예상은 늘 어긋나기 십상이었고 기대는 곧잘 실망으로 바뀌곤 했다. 과연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50+세대가 되어 이런 고민을 안 해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여태까지는 그렇다 쳐도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잘 살았다고 소문이 날까.

 

바보 같은 자신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 두 가지

50+세대가 인생의 절반 이상을 살았다고는 하지만 완전히 성숙한 존재가 된 것은 아니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우리는 모두 '아직 영웅이 되지 못한 미숙한 자아'일 뿐이다. 한 인간의 진면목은 평소의 모습이 아니라 힘들 때 드러난다. 삶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누군가에게 상처받을 때 그 고통 속에 있는 나 자신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다. 그런 순간을 맞이하여 ‘내가 바보같이 느껴지는 기분’을 하염없이 감내하고 있어야 할지도 모르고 혹은 자존심이 상한 채 수치스러운 존재로 전락하는 것을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할지도 모르며, 그러다가 치밀어 오르는 화와 분노를 누구에게 표출해야 할지 몰라 어쩔 줄 모르고 속으로 분을 삭이고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이 모두가 나의 바보 같은 모습들이다.

 

 

어쩌면 우리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게 ‘바보 같다’는 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은 우리가 바보 같은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순간이나 상황이 불현듯 닥친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바보 같은 선택이었음을 인정해야 하는 순간이 어디 한 두 번이었는가. 내가 바보 같을 수 있음을, 바보 같은 상황에 처할 수 있음을 마음 깊이 허락하는 것이 오히려 현명한 건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완벽한 사람은 없다. 우리가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부족한 자신을 직면해야 한다. 그러니 차라리 자신에 대한 과도한 기대를 내려놓고 바보 같은 나에게 선물을 주자. 바보 같은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무엇일까?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못나고 바보 같은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친절을 베푸는 것이고, 둘째는 바보 같은 자신에게 웃음을 선물하는 것이다.

 

첫째, ‘잘난 나’와 ‘못난 나’ - ‘못난 나’에게 친절을 베풀기

50+를 살다보면 나에게는 ‘잘난 나’의 모습도 있지만 ‘못난 나’의 모습도 공존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더욱 견딜 수 없는 건 퇴직 후에 보니 ‘잘난 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못난 나’의 모습만 보일 때이다. 그 사실을 인정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잘난 나‘도 나의 일부지만, ’못난 나‘도 나의 일부이고 나의 진면목이라는 사실이다. 50+세대는 이제 그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가 되었다. ’못난 나‘의 모습을 보며 스스로 질책하고 자신의 못난 부분을 숨기려 하는 것이 과연 잘 사는 것일까.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일까. 여태까지 그렇게 살아왔지만 그래서 행복했는가. ’바보 같은 나, 못난 나‘야말로 진정 우리가 스스로 보듬어줘야 할 대상이 아닐까. 나의 못남을 보듬어줄 수 있어야 가족이나 타인의 못난 점도 감싸줄 수 있다.

 

잘난 자식도 자식이고 못난 자식도 자식이다. 못난 자식 꼴 보기 싫다고 맨날 골방에 들어가 있으라고 한다면 그 자식은 죽을 때까지 못난 자식으로 남을 것이다. 자기 자신도 마찬가지다. ‘못난 나’를 인정하기 싫어 기억 저편에 묻어두고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자신이 잘나게 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못난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격려하며 ‘그래도 괜찮다’고 위로해 주는 편이 좋다. 자신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고 맑은 마음으로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때 그 때 모든 것이 가능성으로 다가올 것이다. 어렵고 고통스러운 때일수록 자신을 질책하거나 상대를 비난하는 대신에 자신과 타인에게 친절을 베풀 수 있는 태도를 배워나가야 한다.

 

사실은 바보처럼 살면 자유롭고 행복하다. 미워도 예쁘다고 하고, 못해도 잘했다고 하면 진짜 예뻐지고 잘하게 된다. 자신과 타인의 ‘못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격려하며 친절을 베풀 수 있을 때 비로소 50+세대는 좀 더 조화로운 가족관계와 원만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바보 같은 자신에게 웃음을 선물하기

자신이 무기력하고 바보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면 바보 같은 자신에게 웃음을 선물하자. 자신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은 자신을 향해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활짝 웃는 것이다. 웃을 일이 없더라도, 아무런 기쁨이 없을 때라도 그냥 웃어보자. 숨을 깊이 들이쉬면서 입가에 웃음을 띠어보자. 긴장은 일시에 사라지고 기분은 좋아질 것이다.  소리 내어 크게 웃는다면 더욱 효과가 클 것이다. 웃음은 여유와 자신감을 불러오고 기쁨을 솟아나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혼자 방안이나 화장실에 있을 때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 웃어보자. 내가 나에게 미소 짓는 것은 나를 잘 돌보기 위해서다. 내가 나를 잘 돌보지 못한다면 다른 누구도 돌볼 수 없기 때문이다.

 

 

거울을 보고 자신이 피곤과 무력감에 찌들고 세상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찬 얼굴이라면 그 때가 바로 자신에게 따뜻한 미소를 지을 때이다. 스스로에게 미소 짓는 것은 자신에게 깊은 평화를 제공해준다. 우리는 자신이 평화롭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그리고 가족과 남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삶은 매 순간 기쁨과 평화를 맞이할 준비를 하게 되고 평화를 누릴 자격을 갖추게 된다. 우리 안에 기쁨과 평화가 있을 때, 우리 곁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도 평화를 전할 수 있고 우리 모두의 삶도 행복해질 수 있다.

 

괴로움과 고통을 기쁨과 행복으로 바꾸는 것은 일종의 정신적 연금술이다. 떠돌이 노동자 생활로 평생을 보낸 길 위의 철학자 에릭 호퍼는 <영혼의 연금술>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실로 매혹적인 피조물이다. 치욕과 나약함을 자부심과 믿음으로 바꾸는 짓밟힌 영혼의 연금술만큼 인간에게 매혹적인 것은 없다.

 

우리는 가족과 수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세상의 모든 존재와 연결된 소중한 존재다. 이 순간 우리가 인상을 찌푸리며 한숨짓는다면 주위 사람들을 우울하게 할 것이고 맥 빠지게 할 것이다. 그 대신 우리가 웃는다면 우리의 주변은 활기로 가득찰 것이다. 바보 같은 자신에게 매일 아침 웃음을 선물해보자. 새로운 하루를 향해 웃어보자. ‘참, 잘 살아왔구나!’ ‘사느라고 애썼구나!’ ‘앞으로도 잘 살 거야!’라고 아낌없이 자신에게 격려와 지지를 보내자. 매일의 삶은 힘들고 팍팍할지라도 우리는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있기에 미래가 있고 우리가 있기에 우주가 존재한다. 50+세대가 있었기에 대한민국이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성장을 달성할 수 있었고 또한 50+세대가 있기에 이 사회에 미래가 있다는 자부심을 갖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