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모교에서 간호학과를 졸업한 동기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재상봉 행사를 가졌다. 졸업한 지 무려 25년 만에 만나는 친구들이었지만 하나같이 젊고 푸른 시절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마치 어제도 본 친구처럼 우리들의 수다는 끝이 없었다.

 

서로가 돌아가면서 본인의 근황과 함께 “25년 전의 나는, 그리고 25년 후의 나는”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데 한 친구가 “글쎄... 25년 후에 나는 살아만 있어도 감사하겠어.”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그러고 보니 이 자리에 빠진 몇몇 친구들의 근황이 궁금해졌고, 안타깝게도 그 중 몇몇 친구들은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새삼 ‘죽음’이 먼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처럼 마냥 행복하게 잘살 것만 같지만 내년에도 여전히 이 친구들을 볼 수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 못 하겠구나 싶었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받아들이기 힘든, 그리고 내 주위에서 종종 일어나지만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게 바로 ‘죽음’이라는 단어일 것이다. 그래서 잘 준비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웰다잉은 더욱 어려운 과제일 터이다.

 

웰다잉(Well Dying)은 살아온 날을 정리하고 죽음을 준비하는 일련의 행위를 말한다. 그동안의 삶을 기록하거나 유언장을 미리 작성할 수 있고, 더 적극적인 경우엔 본인의 장례식을 직접 체험하고 준비하는 경우도 있다.

 

최근에 각 지방자치 문화센터 등에는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하는 장례 문화 강연이 인기라고 한다. 교육 과정 중에 참석한 분들은 이른바 ‘작은 장례식’ 실천 서약서를 작성하기도 한다. 장례식 때 입을 비싼 삼베 수의나 수백만 원짜리 원목으로 된 관 대신 평소 본인이 즐겨 입던 편한 옷과 종이 관을 쓰겠다는 내용이다. 본인 장례 절차를 간소화하여 자녀들에게 부담을 줄이고, 어차피 화장하면 다 불살라버려질 것들에 낭비하지 않는 등 허례허식을 막겠다는 취지다.

 

넓은 의미에서 웰다잉은 존엄사나 무의미한 생명연장을 거부하는 것 등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평균 수명 백세 시대라지만, 건강한 백세가 아닌 병원에서 심폐소생술을 통해 생명을 연장하고 인공호흡기 등으로 연명치료를 해서 사는 백세라면 과연 삶의 의미가 있을까? 연명의료결정법, 일명 존엄사법은 그러한 문제점에서 비롯된 것으로 우리에게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

 

환자 뜻에 따라 수명 연장 의료를 중단할 수 있는 존엄사법이 시행되면서 합법적 존엄사 사례가 나오고 있고 이를 주제로 다룬 의학드라마가 방영되기도 했다. 합법적 존엄사의 국내 첫 사례로, 연명 의료를 받지 않겠다고 밝힌 50대 남성은 스스로 선택에 의해 항암제를 중단했다. 임종을 앞두고 생명 연장에 치중한 집중 치료를 거부한 대신, 환자는 가족과 이별하는 시간을 갖고 삶을 마무리하기로 선택한 것이다. 한 달 후 그는 자연사로 생을 마감했다.

만약 적극적으로 치료할 것을 주장했다면 생명을 더 연장할 수도 있었기에 존엄사법이 죽음을 방치하는 것인가 아니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인가에 대한 논란은 팽팽할 수밖에 없다.

 

 

합법적인 존엄사의 의미를 존중하고 본인에게도 그런 일이 닥친다면 존엄사를 선택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막상 현실은 그런 선택이 쉽지 않아 보인다.

일례로 주변에서 흔히 들리는 말 중에는, 부질없는 희망을 가지고 온갖 치료를 하다가 빚만 안겨주고 떠난 분을 원망을 하는 사람도 있고, 가족 중 한 분이 무의식 상태인데 차마 호흡기를 뗄 수가 없어서 집중치료실에 몇 년 동안 입원 중이라는 사람들도 있다. 오랫동안 한 병원에서 버티는 것도 어려워 이곳저곳 병원을 옮겨 다니느라 남은 가족들이 시름을 앓는 경우도 허다하다. 환자 본인이 원해서 계속적인 치료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모두 연명의료 의향을 사전에 제대로 밝히지 않아서 생기는 불상사인 것이다.

우리가 몸과 마음이 건강할 때 웰다잉이나 존엄사법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이처럼 언제 어떤 형태로 닥칠지 모르는 불의의 사고나 병마에 대비해 자신의 삶과 죽음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죽음은 따로 예고가 없기 때문에 그게 당장 내일이 될지, 내달이 될지, 내년이 될지 모른다는 사실을 누구나 안다. 그런데도 대부분이 설마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까 하고 죽음을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도 사실이다.

평소에 입버릇처럼 내가 빨리 죽어야지, 죽어야지 하는 어르신들도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대해 여쭈면 “내가 일찍 죽기를 바라는 거냐?”며 불쾌하게 여기신다. 임종하는 장면을 가정하는 것조차 거북해서 인상을 쓰며 죽음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 자체를 금기시 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생의 마지막 장면이 품격 있기 위해서는 미리부터 죽음에 대해 평소 가까운 지인들에게 이야기하고 준비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각종 영양주사와 항생제를 주렁주렁 매단 채, 인공호흡기의 기계음과 함께 생과 사를 오가며 중환자실에서 혼자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불의의 사고를 당하거나 혹은 의식불명으로 의사 결정이 어려울 경우를 대비하여 자신이 어떤 수준의 의료 치료를 받고 어떻게 죽기를 바라는지 알려야 한다. 불필요한 연명치료에 대한 부담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들이 경제적으로나 심적으로 힘들어지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더욱 계획과 준비가 필요하다. 또한 장기기증 서약을 통해 한 번의 선택으로 이웃의 생명을 살리거나 여러 명의 인생을 가치 있게 변화시키는 일에 동참한다면 매우 의미 있고 용기 있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