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은퇴한 중년의 세 남자

1. “살아야 할 의미가 없습니다. 제가 왜 계속 살아야만 하죠?”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앉아 토해놓은 한마디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던집니다. 힘을 잃은 눈동자는 고단한 영혼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90cm 거리에 있는 내 눈을 바라보지 못하고 바닥만 이리저리 살핍니다. “답은 없을 것이지만 그냥 왔습니다.”

직장을 퇴직한 B 씨는 수입이 없습니다. 자녀 교육비와 알뜰하게 생활하지 못한 탓에 퇴직금은 중간 정산으로 사용했고 모아둔 돈은 없습니다.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100에서 몇 자릿수를 뺀 만큼 이력서를 넣었지만 실패했습니다. 아내에게 들은 말들은 수모에 가깝습니다.

 

2. P씨는 건축업을 하며 사업가로서 자신감 하나로 살아왔습니다. 돈도 벌고 자녀도 잘 성장시켰습니다. 몸도 약해지고 일을 그만하고 싶어 사업을 정리하고 은퇴했습니다. 막상 은퇴하고 나니 할 일이 없고 주변에 사람도 없어졌습니다. “돈을 벌기만 했지 쓸 줄을 몰라서 주변에 사람이 없네요.” “지금부터라도 친구를 만들면 되잖아요.” “사업만 하다 보니 의심이 많아서 사람을 못 사귀어요.”

가족들도 P씨를 외면합니다. 달리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자녀 양육문제로 퇴직하고 전업주부로 살아온 아내는 요즘 여기저기서 가르치는 일과 강의 등으로 얼굴 보기가 힘듭니다. 자녀들은 장성해서 가장인 P씨의 영향력 밖에 있습니다. 건설현장에서 지휘하며 일을 해결해나가던 사업가 모습은 사라졌습니다. 가정에서 가정경제를 책임지며 아내와 자녀들에게 보여주던 리더의 모습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습니다.

 

3. 퇴직한 L씨는 오전에 집을 나와 맥없이 돌아다닙니다. 집에 있기 싫고 저녁이 되면 들어가기는 더 싫습니다. 고분고분하고 부드럽던 아내가 어느 순간부터 대들기 일쑤며 방도 따로 쓰자고 해 결혼해서 출가한 아들 방에서 잡니다. “원하는 것은 한가지입니다. 모든 것은 그대로인데 각방 쓰는 것이 힘듭니다. 아내랑 한방에서 자고 싶습니다.”

 

남자의 파워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김용태 상담학 교수는 ‘중년의 배신’(Denstory, 2016년) 책에서 남자의 파워를 경제력, 일과 사회적 지위, 성적 능력으로 이야기합니다. 남자에게 직장은 두 가지 의미입니다. 일을 통해 돈을 버는 것과 사회적 지위입니다. 직장생활 동안은 수입이 발생하고 가정경제의 중추 역할을 합니다. 직장에서 지위는 사회적 지위와 동등한 위치이기도 합니다.

두 가지 파워를 받쳐주고 있는 직장(일터)은 남자의 존재 의미입니다. 퇴직은 일순간 두 가지를 잃게 합니다. 이때 정체성 혼란이 옵니다. 청소년기에 겪는 정체성 혼란을 중년기에 다시 겪습니다. 돈 못 벌어오는 자신에게 막말을 퍼붓는 아내 때문에 죽고 싶다는 내담자의 흔들리는 눈빛이 선합니다.

퇴직금을 가지고 창업에 뛰어든 경우도 같은 맥락입니다.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 확보를 위한 과정입니다. 남자에게는 평상의 과업입니다.

중년기를 넘어서며 신체에 변화가 찾아옵니다. 성 기능이 떨어집니다. 남성은 서서히 떨어지지만, 여성은 갱년기 이후에 급속히 떨어집니다. 여성과 달리 남성은 매우 위기감을 느낍니다. 성적 능력이 존재의 파워로 작용했는데 기능이 떨어지면 더 집착하게 됩니다.

각방 쓰기를 요구하는 아내 때문에 L씨는 집에 있는 것이 고통스럽습니다.

 

여자의 무기

5060세대 남자들이 퇴직 후 집에 있으면 외톨이가 되기 쉽습니다. 아내는 자녀들과 결속되어 있고 대화의 자리에 끼어들면 어색하고 불편합니다. 아내는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아도 자녀와 함께 이야기하며 지내면 됩니다. SNS 가족 대화방에서 많은 대화가 오가도 B씨는 유령처럼 조용합니다. 딱히 대화에 끼여 할 말이 없고 어쩌다 한마디 하면 아내와 자녀들은 조용합니다.

아내가 자녀 양육과 진학을 모두 책임진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해외건설현장에서 주로 근무한 B씨가 ‘나는 돈 벌어다 주는 기계였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시점입니다.

 

자녀가 성장해 독립하거나 결혼해 출가하면 여성은 개별화로 새로운 삶을 찾아 나서고 남성과 역할변화가 일어납니다. 중년기 여성의 개별화는 전업주부인 여성이라면 남편과 갈등을 가져옵니다. ‘당신이 이제 살림 좀 하세요.’ P씨 아내는 자신이 교사를 그만두고 아이들 양육과 교육, 가사노동에 전념했으니 이제는 하고 싶은 것을 해야겠다며 P씨에게 집안 살림을 맡깁니다.

 

가족공동체

남자가 경제적 능력과 사회적 지위, 성적 능력에 목메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관계의 부족함을 만회해보려는 심리일 수 있습니다. 파워를 가지고 있을 때는 관계에 소홀합니다. 중년기 이전에는 자연스럽게 파워소스가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일과 직장에서 성공을 이루고 경쟁 사회에서 뒤처지지 않도록 힘쓰며 가족관계에 관심과 노력을 덜 가집니다. 관계는 한꺼번에 회복되지 않습니다. 관계는 관심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또한, 상호주관적인 것으로 일방적인 소통이 아니라 쌍방소통입니다.

중년기 이전이며 가족관계를 소홀히 하는 남자라면 삶의 중심과 방향을 수정해야 합니다. 가족이 행복해야 일과 지위에서 성공이 의미가 있습니다. 퇴직 후 가족으로부터 환영받고 ‘수고하셨어요’라는 감사의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퇴직하고 나서 가족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한 남성은 돈과 지위와 성적 능력으로 파워를 유지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동안 부족했던 부분을 솔직하게 가족과 함께 이야기하고 관계회복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가족이 진정 원하는 것이 계속 돈 벌어오는 남편, 아버지일까요? 성적으로 왕성한 남편일까요? 충분히 서로 대화하고 가족이 하나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남편을 따돌리고 자녀와 결속된 아내, 갱년기를 지나며 개별화 과정으로 나아가는 나를 찾겠다는 아내는 가족이 공동체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공동체는 희생자가 생기면 깨어지기 쉽습니다. 조금씩 양보하고 이해하고 협조를 구해야 합니다. 역할변화에도 유연히 상호 대처해야 합니다. 도와주고 맡기고 하는 차원이 아니라 가족공동체 일원으로 당연히 적절하고 서로 기분 좋게 집안일을 함께해야 합니다. 남자의 파워, 여자의 무기는 가족공동체 안에서는 무용지물이 되어야 합니다. 행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