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석학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e)』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사랑처럼 엄청난 희망과 기대 속에서 시작되었다가 실패로 끝나고 마는 활동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런 대가 없이 자신을 내던지는 것이며, 우리의 사랑이 상대방에게서도 사랑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희망에 자신을 완전히 내던지는 것이다. 만일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끊임없이 적극적으로 관심을 두는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내가 게으르거나 끊임없는 주의와 인식과 활동의 상태에 있을 수 없다면 사랑하는 사람과도 적극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이 글을 청년기에 읽었다면 그저 참고사항 정도가 되겠지만, 50+세대가 되어 읽는 이 글은 아무 저항 없이 그대로 공감이 된다. 사랑은 관계에 대한 서술이고, 관계의 원인에서부터 결과에 이르기까지 두루두루 영향을 미치는 결정적 요인이다. 사랑에서도 그렇듯이 관계에 있어서도 상대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과 끊임없는 주의가 요구된다.

 

 

그리하여 50+세대에게 사랑의 기술(Art of Love)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관계의 기술이다. 관계의 기술을 위해서는 그리 많은 돈이 들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관계에 있어서 흔히들 걸려 넘어지는 걸림돌이 있다. 속담 속에서 그런 현상을 찾아볼 수 있다. 바로 ‘죽 쒀서 개주기‘와 ‘아끼다 똥 된다‘는 속담이다. 죽 쒀서 개라도 주는 게 좋은지 아니면 아끼다 똥 되는 게 좋은지는 각자가 선택할 몫이지만 둘 다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

 

죽 쒀서 개주기

우리 속담에 ‘죽 쒀서 개준다’는 속담만큼 의표를 찌르는 말도 없다. 이는 애써 노력했는데 남 좋은 일만 시키고 엉뚱한 결과를 낳게 되는 경우를 말한다. 입맛이 씁쓸한 일이다. 이런 일이 발생하는 이유는 상황 전개에 대한 예측이 잘못되었거나 자신의 욕심이 앞섰기 때문이다. 50+세대라고 해서 젊어서부터 간직해오던 꿈과 욕망을 모두 상실한 것은 아니다. 욕망의 강도가 약화되었을 뿐이다. 성(性)과 돈, 쾌락과 명성을 얻고 싶은 욕망이 아주 사라진 것도 아니며 이와 더불어 삶의 깨달음과 지혜를 얻고자 하는 마음, 자신과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겠다는 결심이 마음속에 혼재된 채로 남아 있다. 그 혼재되어 있는 감정과 마음이 조화롭게 정리되지 않은 채 갈등으로 남아 있을 때 종종 죽 쒀서 개주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50+세대에게 있어 삶이란 때로는 모호하며 확실치 않은 것이고, 향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정답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진정한 삶은 작은 변화들이 일어나는 곳에 존재한다’는 톨스토이의 말처럼 작은 변화들의 흐름 속에서 그런 변화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이 삶의 실상이고 진실이다. 다만 우리는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일을 경험에 비추어 추측할 뿐이며, 반드시 예상대로 되지는 않는다 해도 주위 사람들과의 온전한 관계 형성을 기대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아끼다 똥 된다

비싸고 질감 좋은 한복을 큰마음 먹고 산 여인이 있었다. 그 여인은 소중한 옷을 장롱 속에 고이 모셔두었다. 집안에 경사나 좋은 행사가 있을 때 입고 가려고 잘 간직한 것이다. 가끔 그 한복을 꺼내보며 기분 전환을 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게 아끼다가 결국은 몇 번 입지도 못한 채 세월이 흘러 그 옷은 유행에 뒤쳐진 옷이 되고 말았다. 몇 년을 더 간직하다가 결국은 눈물을 머금고 버려야 했다. 과연 이처럼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을까만 과거 1960년대에 옷이 귀하고 형편이 어렵던 시절의 어머니 세대에서는 흔히 있던 일이었다. 어디 옷뿐이랴. 비싼 그릇 세트를 장만하고는 딸 시집갈 때 쓴다고 너무나 잘 간직하다가 막상 딸이 시집갈 때가 되고 보니 그 그릇 세트는 구식이라 결국 새 그릇 세트를 장만해야 한다. 철지난 그릇 세트는 그제야 빛을 보고 식탁에 선을 보이게 된다. 이런 일도 어느 집안에서나 가끔 벌어지는 일이다. 이 경우에는 그나마 버리지 않고 늦게나마 사용하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재물과 행복의 공통점은 움켜쥐면 쥘수록 빠져나간다는 점이며, 아무리 소중하다한들 감춰두고 활용하지 않으면 썩고 만다는 것이다. 가족 관계에서도 이런 일을 관찰할 수 있다. 가장 심한 경우는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드러난다. 50+세대에게 배우자만큼이나 소중한 존재는 없다. 부부는 서로를 필요로 하고 누구보다 더 상대를 잘 아는 관계이다. 그런데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친밀감의 표현보다는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을 때 주로 원망이나 분노를 표현하게 된다. 왜 그럴까. 배우자를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없어서일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세상에 배우자와의 인연만큼이나 귀한 인연은 없다. 머리와 생각으로는 그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생각은 습관적으로 마음의 방 깊숙히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처박아 둔다. 이는 '배우자가 소중하다'는 생각이 일상에서 충분히 작동하지 않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표현하기가 계면쩍기도 하고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묻혀 배우자에 대한 사랑과 존중의 마음은 장롱 속에 갇힌 귀한 한복처럼, 창고 깊이 처박아 둔 비싼 그릇세트처럼 마음 속 깊이 간직만하다가 나중에 늙어지면 용도 폐기되고 말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소중한 것일수록 잘 보이지 않는 곳에 고이 모셔두는 습성이 있는지도 모른다. 매일 마시는 공기처럼, 매일 마주하는 따스한 햇살처럼 늘 옆에 가까이 있는 것은 가볍게 여기거나 당연시하고, 옆에 없는 것을 찾아 헤매는 습성이 있다. 있는 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결핍된 것만 찾아다니며 굶주린 욕구를 채우려 들기만 한다면, 행복은 멀리 달아나고 결국 불행을 옆에 끼고 사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자신의 전체적인 인격을 발달시키고자 적극적으로 노력하여 생산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사랑을 위한 모든 시도가 결국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는 에리히 프롬의 지적은 관계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50+세대가 '관계'라는 작품을 멋지게 꾸미고 가꾸는 일은 돈이 생기는 일도 아니고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일과도 거리가 멀지만, 앞으로 살아갈 인생에 있어 그 무엇보다 가치있는 일임에 틀림이 없다. 행복은 조화로운 관계 속에서 부지불식간에 느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