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인간은 남녀가 한 몸?

대학 시절에 ‘서양철학사’ 과제인 플라톤의 ‘향연’(La Banquet, Symposion)을 읽고 여운이 오래 남았었습니다. 에로스(사랑)에 대해 펼쳐진 이야기 중에 내 마음에 꽂힌 다음 내용 때문입니다. ‘원래 인간은 남녀가 한 몸이었고 힘과 야심이 있어 신을 대적하기도 했다. 신들은 고민 끝에 인간을 둘로 갈라놓았다. 둘로 갈라진 인간은 갈라진 반쪽을 그리워 하다가 한쪽을 만나게 되면 다시 한 몸이 되려고 서로 끌어안고 있다가 굶어 죽었다.’

미천한 지적 능력 탓에 감탄사를 연발하며 이성에 대한 끌림의 원천이 플라톤의 ‘향연’ 속에 있었음을 발견한 것에 놀랐습니다. 한동안 머릿속에는 가슴에서 흐르는 사랑의 샘물은 반쪽 찾기라는 생각이 똬리를 틀고 있었습니다. 이성에 대한 끌림이 모든 생명체의 본성인 것을 플라톤은 문학적으로 표현해냈습니다.

잠자는 아담의 몸에서 갈비뼈 한 개를 빼내 여자를 만들었다는 기독교 경전에 쓰인 이야기도 있지만 경험적인 인류사를 볼 때 남녀는 분명이 서로 다른 인격체입니다.

 

운명적인 만남

성인이 된 남녀는 서로 마음이 끌려 사랑하게 되고 함께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한 공간에서 살게 됩니다. 만남에서 결혼에 이르는 과정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운명적인 만남이 있습니다. 남녀 관계에서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남녀 관계 만남은 극적인 요소가 있을 것 같아 흥미롭습니다. 이성을 보는 순간 ‘당신은 내 운명이야.’ ‘내 반쪽이구나.’ 는 생각이 들었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영화나 소설에서 많이 보지만 현실에서도 그런 만남, 특히 남녀 사이의 운명적인 만남을 많은 사람이 기대하고, 운명적인 만남이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플라톤의 향연이 머릿속에서 뱅뱅 돌고 있었던 이유가 저도 반쪽 찾기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 운명적 만남의 환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란 생각입니다. 현실에서 운명인 사람이나 반쪽이 나타났을 때 일치감을 알아차리려면 계속 머릿속에 대상을 그리며 생각하고 기억 해내야 합니다. 운명적인 만남, 내 반쪽 찾기를 많은 사람이 기대합니다. 두 가지 일수 있습니다. 나와 같거나 비슷한 사람은 반쪽 일 것이고, 운명적인 사람은 같거나 비슷한 사람이거나 내가 원하는 사람이겠지요.

왜 운명적인 사람(사랑), 반쪽(배우자)을 찾을까요? 그런 사람과 함께 한다면 인생이 행복할 것이란 생각 때문이겠지요. 나와 똑같은 사람, 내가 그리던 사람을 만나면 행복할까요? 행복이 내 주관적인 생각에 의해 이루어지면 가능하겠죠. 내가 행복하다고 다른 사람이 행복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행복이 내 행복과 같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 똑같은 사람이 있을까요? 특히 남녀는 염색체가 다릅니다. 운명적임 만남, 반쪽이라고 생각되는 이성을 만나 결혼하더라도 행복은 그저 생기지 않습니다. 행복은 삶의 과정을 통과하면서 생겨난 결과물입니다. 운명과 반쪽 개념은 자기 주도적인 관계 형성 냄새가 납니다. 두 사람이 한 몸이라는 일체감, 자기 주도적 일체감 측면이 강합니다.

 

여러 음악가, 미술가와 혼인 관계, 연인 관계를 가진 알마 말러(1879~1964)는 ‘키스’ 그림으로 유명한 구스타프 클림트와 연인 관계, 그리고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와 연인, 혼인 관계를 운명처럼 맞이했지만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알마에게 첫눈에 반한 말러는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알마를 이용(?)하고 알마의 작곡 활동을 용인하지 않았습니다. 알마도 열세 살 때 끔찍이도 사랑해 주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아버지와 같은 대상을 찾아 운명적인 만남을 마음에 품고 만나고 살았지만 만족스런 행복한 삶이었다고 감히 말하기 어렵습니다.

 

사람의 마음

아무리 알고 싶어도 다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깊은 우물과 같습니다. 들어다 보고 싶어도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이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일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다 알 수 없는 것은 다른 인격체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입니다. 결혼은 인격체끼리 만남입니다. 운명적인 든, 반쪽 찾기 성공이든 각각 인격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다른 인격체끼리 만남으로 함께 살면서 생기는 일들은 참 많습니다. 좋은 일이 있지만 안 좋은 일도 있습니다. 부부 두 사람 사이에 생기는 안 좋은 일들이 문제입니다. 어떤 일일까요? 두 사람 의견이 다르거나 성향, 취향, 행동, 습관에서 나타납니다. 이 문제는 다음 칼럼에서 구체적으로 다루기로 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다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말투, 느낌, 표정, 행동으로 알 수 있습니다. ‘너는 내 운명이야. 내 반쪽이야.’ 는 배우자를 옥죄는 말이 됩니다. 기대하는 것이 있으며 보상 심리가 작용합니다. 기대가 어긋나거나 보상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화가 나고 불쾌해집니다. 내 중심이기 때문에 정작 상대 배우자는 알지 못합니다.

 

운명보다 우선은 상대방의 마음을 잡는다.

결혼으로 행복해지기를 원합니다. 운명적임 만남, 반쪽 찾기 성공으로 부부의 연을 맺었더라도 함께 살아가면서 계속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상대 배우자는 부담이 됩니다. 부부 사이에 힘의 강약이 존재할 수 있고, 약한 쪽은 강한 쪽에 맞춰 주거나 참고 견디게 되죠. 상대방도 좋다면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한계점에 이를 때 탄성을 잃게 됩니다.

급기야 다투고 관계가 깨어집니다. 반복되면 회복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렇다고 당장 관계가 깨어지지는 않습니다. 힘의 균형에 변화가 생기거나 자신의 자립에 자신이 생기면 관계에 변화가 옵니다.

실직이나 퇴직, 은퇴 등으로 경제활동이 중단될 때 위험합니다. 자녀가 독립하거나 결혼으로 부부 중심 가족이 될 때 주의해야 합니다. ‘고양이를 잡으려면 목덜미를 잡고 토끼를 잡으려면 귀를 잡고 사람을 잡으려면 마음을 잡아라’ 는 서양 속담이 있습니다. 부부간의 행복은 운명적임 만남보다도, 반쪽이라는 인식보다도 배우자를 한 인격체로 인정하고 배우자에게 잘하면 따라옵니다. 나에게 잘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배우자가 잘해 주는데 마음을 주지 않은 배우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주 단순한 원리지만 잘 실천하지 못합니다. '가는 정이 고와야 오는 정이 곱다', 'Give and take' 세상 어느 곳에서나 먼저 주는 것이 행복의 원리입니다. 받기 전에 먼저 주어야 합니다. 상대 배우자의 마음을 헤아려 잘해 주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옵니다. 내 운명, 내 반쪽 생각에서 벗어나 배우자의 마음을 잡으려면 먼저 주는 것이 진리입니다. 행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