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의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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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의 저녁 우리 집은 계곡을 사이에 두고 길 양쪽으로 소형 빌라와 자그마한 단독주택들이 오밀조밀하게 마주 보고 있는 언덕의 중반부에 있다. 계곡은 일찌감치 복개되었지만, 올해처럼 비가 많이 오는 장마철에는 길 아래로 물이 흐르는 소리가 우렁차게 들리기도 한다. 예전에도 물이 아스팔트를 들고 솟구치는 바람에 길이 끊어져 멀리 돌아다닌 적이 있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경사가 상당히 급한 것이다. 동네 거주자들은 차를 몰고 난이도 최상의 가파른 S 코스를 미끄러지듯이 조용히 다니는데 방문객들은 일단 무서워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오고 가는 차들이 좁고 가파른 골목길을 통과할 때 누가 정하진 않았어도 서로 지키는 룰이 있는데, 이 동네에 처음 오는 방문객들은 그런 걸 알 턱이 없으므로 종종 마찰이 일어나기도 한다.

 

 

예전에 내려가는 차와 올라가는 차 중에 누가 길을 비켜줘야 하는가 하는 문제 때문에 고성이 오가고 멱살잡이를 하고, 지나가던 아줌마도 끼어들어 말리고, 그러다가 기어이 경찰까지 출동하는 일이 있었다. 지형상 소리가 고여서 공명이 일어나는지 집안에 앉아 있어도 진짜 자세히 다 들린다. 잘잘못을 따지자마자 등장하는 귀에 익은 대사. 나이 먹음의 윤리.

 

"너 몇 살이나 먹었어?"

"나잇살이나 먹어서."

 

아 진짜……. 내가 싸움 당사자가 아니라서 그런 걸까? 방 안에 들어앉아 심판을 보고 있었는데 이때쯤 되면 누가 잘하고 잘못하고 그런 게 없어 보인다. 레드카드를 꺼내 든다. 그런데 이젠 코로나19로 이런 싸움마저 없어졌다. 손을 잡고 머리를 맞대는 일은 물론이고 멱살마저 거리를 두는 시대.

 

 

북악산 너머로 달이 뜨고 동네가 어둠에 잠기기 시작하면 골목길을 향해 열려있는 창이 있는 방에선 바깥의 소리가 낮보다 더 잘 들린다. 올봄 한동안은 이 골목도 적막감이 감돌아 택배 차량만 오르내리는 소리뿐이었지만 봄이 지나면서 서서히 소리가 돌아왔다. 퇴근하는 아가씨들 하이힐 소리, 엄마를 찾는 핸드폰 통화 소리, 아이들의 명랑한 지저귐이 지나가면, 그다음은 술 한잔 걸친 중년 아저씨들의 묵직한 발걸음. 옷깃에 검은(아마도) 비닐봉지가 스치는 소리가 들린다. 가끔 힘겹게 언덕을 오르며 부르는 노랫소리도 함께.

 

 

‘검은빛 바다 위로 밤배 저 밤배. 무섭지도 않은가 봐 한없이 흘러가네.’

밤배를 부르는 마음과 멱살을 잡는 마음은 한마음일까? 사람 마음의 갈피가 내장까지 들여다보이는 우리 동네는 어쩌면 여느 아파트 동네보다 사는 게 더 피곤할지도 모르겠다. 어쨌건 인생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하고 싶은 생각이 싹 다 사라지고 특히 남의 인생을 함부로 평가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없이 흘러가는 밤배처럼 무심하라는 계시인가? 힘겹게 언덕을 오르며 부르는 내 나이 또래의 노래(‘밤배’를 아는 세대)를 들으니 얼마 전 골목 싸움에 대해 논평을 했던 내 드넓은 아줌마표 오지랖이 아무 의미 없이 느껴졌다.

 

멀리서 타이어 마찰음을 울리며 사라지는 자동차 소리만 아니라면 여기가 서울 한복판이라는 걸 깜박 잊는다. 각종 SNS에는 멋진 카페나 맛집들 사진이 #해시태그를 달고 떠돌고 있지만 정작 이 동네의 참모습은 여기서 터를 잡고 예전부터 살고 있던 주민들의 삶 속에 녹아있다. 골목이 많아 코너마다 있던 구멍가게들이 편의점으로 다 바뀌고 나서는 동네에 불이 꺼지지 않는 등대가 생긴 듯했다. 오, 편리해! 하지만 컵라면이나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는 누군가의 구부정한 뒷모습을 보는 게 잦아지고 플라스틱 테이블에 캔맥주가 뒹구는 모습을 보면서 어느 동네나 획일화되어가는 이 풍경이, 똑같은 냄새가, 아직도 낯설고 신기하다. 병문안 갔던 대학병원에서 예전에 단골이었던 동네 슈퍼 아저씨를 봤다. 이 가게는 카드가 안 된다고 하는 바람에 세상이 어느 땐데 그러시냐고 나랑 싸우면서 정들었던 아저씨. 초췌해진 모습으로 사모님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모습을 보고 당황스럽게도 ‘내 시대도 저물고 있구나!’라고 느꼈다면 너무 뜬금없는 말일까?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골목에 울리고 밤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온다. 뒷집 아이는 한 시간이 넘게 리코더를 불고 있다. 해가 져서 바람에 찬기가 감도는데 매끈하지 않고 어설픈 피리 소리가 오히려 듣기 좋아서 뒤쪽 창문을 열어 놓는다. 기나긴 코로나 시대의 터널을 지나는 와중에 연분홍 일상을 떠올리게 하는 반가운 소리로 들린다. 아주 작고 힘없는 것처럼 보였던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새삼 귀하다.

김수영의 <봄밤>이라는 시에 나오는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이다.

 

 

 

 

 

[글/사진:50+시민기자단 임영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