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스테르담행 완행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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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 가는 완행

속도가 생명인 지금, 급행이 대세가 되고 완행은 인기가 없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 늦게 가는 걸 참지 못해 비싼 비용을 내서라도 특급이나 속성과정을 찾는 게 일반화되었다. 사람에 부대끼며 타던 완행열차는 찾아보기 힘들다. ‘빨리빨리’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용어가 됐다. 재수, 늦은 승진, 느리게 이루어지는 성공을 반기는 사람은 없다. 수월하게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게 인지상정이다. 좁은 길을 피하고 넓은 길로 가려고 한다. 힘든 과정을 생략하고 손쉽게 성공하려고 한다. 원해서 완행을 택하지 않고, 여건에 의해 완행을 택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완행의 맛은 여행에서 나타난다. 너무 빨리 이곳저곳을 지나가면 기억에 남는 장면이 별로 없다. 좀 힘들더라도 천천히 여유 있게 여행할 때 많이 느낀다. 과연 완행은 쓸모없고 급행이 능사인가.

 

 

 

 

 

암스테르담행 완행열차를 읽고

박찬순의 소설 『암스테르담행 완행열차』를 읽었다. 처음에는 제목에 끌려 선택했다. 암스테르담은 네덜란드의 수도이며 네덜란드 최대 규모의 도시이다. 네덜란드의 경제·문화의 중심이며 약 170개가 넘는 다양한 국적의 인구로 구성되어 전 세계적으로 다양성이 높은 도시로 손꼽힌다.

 

주인공 여홍주는 빨리 일을 처리하려고 KTX를 타려고 하다 파업으로 완행열차를 탈 수밖에 없는 난감한 경우를 당한다. 이전의 암스테르담행 완행열차를 탄 경험을 상기하며 KTX가 아닌 무궁화 열차를 거부감없이 탄다.

 

암스테르담행 완행열차 회상을 따라가 보자. 여홍주는 브뤼셀에서 회사 일을 끝내고 암스테르담을 경유해서 파리로 가서 인천행 비행기를 타는 촉박한 일정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짬이 생겨 바이올린과 첼로 중간에 있는 비올라 다 감바 연주를 3시간 이상 듣다가 10시 암스테르담행 특급열차인 탈리스를 타러 갔다. 기관사의 실수로 오후 10시 탈리스가 다른 위치에 서는 바람에 놓치고 불편한 완행열차를 타게 된다. 승객들 모두 다 그 나름대로 긴박한 사정을 안고 있다.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 이리스가 나타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하며 사람들을 설득한다. 브뤼셀에서 앤트워프까지는 벨기에 철도로, 앤트워프에서 인터시티로 갈아타고 로젠탈로, 로젠탈에서 완행열차인 스프린터로 암스테르담에 가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방안이다.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기차를 놓친 사람 칠십여 명은 함께 암스테르담행 완행열차를 같이 타고 가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교류하는 의미 있는 시간을 가진다. 시간은 많이 걸렸고 불편했지만 잃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히잡 쓴 아랍 여인의 수줍고 신비로운 웃음소리, 몇 년을 준비한 오디션을 놓쳤다는 헝가리 여인의 애절한 부르짖음, 만돌린처럼 생긴 아랍 악기의 소리, 피난 중에도 음악은 필요하다는 사실, 혀끝에 와 닿던 새콤달콤한 시리아 쿠키의 맛, 이리스가 보여주는 조용한 리더십이 그것이다.

 

누구나 편안한 길을 원하지만, 어느 순간 길이 없어지는 경우가 생긴다. 길이 없을 때 길을 만드는 사람이 나타난다. 길을 만드는 역할은 누구나 맡기 싫어하지만, 이들을 통해 상황이 전환되니 그런 자들이 필요하다. 인생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고 상황에 맞게 주장하며 사는 것을 배우는 과정이다. 이것을 인정하는 데 평생이 걸린다.

 

 

 

기다리는 것이 인생

기다리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예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자 기 마음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는다. 예기하지 못한 일이 빈번히 일어난다. 의도하지 않은 여건에 놓여 사태가 호전되기를 인내하며 기다린다. 기다림의 미학을 배우면서 나이가 든다. 누구나 그 무엇을 기다리며 산다. 좋아하는 시 ‘윤사월’에 눈먼 처녀도 기다리는 것이 있어 문설주에 귀를 대고 듣는 장면이 나온다.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기다리는 것이 없는 인생은 묘미가 없다. 기찻길에 서면 원하는 것을 찾아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충동에 빠진다. 기다림의 대가는 강태공이다. 세월을 낚시하며 때를 기다렸다. 기다리기가 쉽지 않다. 기다리는 것을 배우는 과정이 인생이다. 급행을 원했는데 완행을 택할 수밖에 없는 경우를 경험한다. 조급하게 서두르지 않고 여유 있게 대처하는 자세는 수많은 완행을 경험하면서 쌓인다.

 

『윤사월』

                                                 박목월

송화가루 날리는/외딴 봉우리 ​

윤사월 해 길다/꾀꼬리 울면 ​

산지기 외딴 집/눈 먼 처녀사 ​

문설주에 귀 대이고/엿듣고 있다.

 

완행의 유익

자연은 서두르지 않고 때에 맞춰 천천히 움직인다. 인간은 조급히 서두르지만, 자연의 순리를 거스를 수 없다. 봄이 지나 여름, 가을, 겨울이 오는 계절의 흐름은 도도하다. 완행은 좌절이고 실패이며 고통의 시간으로 보일 수 있다. 인생의 완행열차를 경험하는 중에 기다리는 것을 배우고 겸손해지며 원숙한 인격이 형성된다. 순탄하게 실패라는 것을 모르고 성공한 대학 친구가 있다. 한 번의 좌절 경험도 없었다. 그만큼 철저하게 준비하고 대비하며 인생을 살았다. 이 친구를 모델로 성공 다큐멘터리를 만들려고 하다가 포기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보는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사람들은 온갖 고통과 어려움을 겪고 성공한 사람에게 감동한다.

 

일부러 완행을 탈 필요는 없다. 그러나 완행이 주어지면 자신에게 무엇을 가르치려고 이번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하며 즐기자. 세상에 공짜는 없다. 쉽게 이루어진 성공은 쉽게 사라진다. 힘들게 경험하는 완행을 통해 자신만의 능력과 노력으로 성공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완행은 결코 기분 나빠할 일이 아니다. 확률적으로 급행과 완행은 교대로 온다. 전화위복이다. 완행이 더 나을 수도 있다. 급행이 오면 행운에 감사하고 완행이 오면 무엇을 배울 것인지 설레는 마음으로 대처하면 된다. 이것 역시 지나가리라. 일부러라도 완행을 타고 경치를 즐기며 느리게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