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든 식당이든 다섯 명 이상의 친구들과 둘러앉아선 안 되는,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에 지쳐가던 지난 초봄의 어느 날이었다. 우연히 ‘시역과의(是亦過矣)’란 단어를 발견했다. 서예가 김시현의 초대전 주제어였다. 현재가 아무리 힘들어도 이 역시 다 지나간다는 뜻이라 했는데, 내 안에선 묘하게도 안도감 같은 것이 올라왔다. ‘나만 힘든 게 아니라 남들도 다 힘들구나’ 싶어 위안이 됐다.
요즘은, 내가 속한 극단처럼 자체 연습장이 없는 시민극단에겐 블랙홀과 같은 시간이다. 무대에 서기는커녕 함께 모이기조차 어렵다. 이런 시기에 굳이(?) 우리와 연극을 하고 싶다는 이가 있었다. 스스로 좋아서 하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못 말린다. 이럴 땐 우선, 만나봐야 한다. 함께할 수 있을지 눈빛을 맞춰본달까? 지체 없이 그의 직장 근처 먹골역으로 달려갔다.
먹골은 지금의 중랑구 묵동을 가리킨다. ‘먹골’이란 지역명은 낯설어도, ‘먹골배’ 하면 ‘아하!’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먹골역 앞에서 만난 그는 말쑥한 정장 차림이었다. 가슴 뛰는 지점이 같아서인지, 우린 금세 친해졌다. 마스크 때문에 숨이 차든 말든, 연극에 관해 정신없이 떠들었다. 하지만 나는 수다의 강에 온전히 빠져들 수 없었다. 카페 건너편에 보이는 골목에 자꾸 시선이 쏠렸다.
골목 끝에 배나무밭이 있었다. 내 유년기에 외가 식구들과의 특별한 추억이 만들어지던 곳, 엄마의 친척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었다.
초여름이 시작되면 외할머니는 나를 앞장세워 그곳으로 향하곤 했다. 정확히는 외삼촌 집이었다. 대한민국 어느 집안이나, 많거나 적거나 돈이 있기만 하면, 한 번쯤 겪을 수 있는 재산 다툼이 나의 외가에도 있었다. 그 일로 온갖 고생을 하고, 막내면서도 친정어머니를 평생 모시고 산 나의 엄마는 외가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배솎기 ( 출처 cojmvianney의 블로그 포스트)
아픈 가족사 위로 하얀 배꽃들은 해마다 만개했다. 꽃이 떨어진 자리엔 작은 열매들이 여럿 맺혔다. 그러면 적당한 간격으로 암배 하나만 남기고 따내야 했다. 크고 맛난 배를 얻기 위해서였다. 배 솎는 철이 오면 외갓집엔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어른들은 일하느라 정신이 없고, 아이들은 노느라 정신이 팔렸다. 집성촌이었기 때문에,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 사이에는 친족 관계가 자리했다. 이모, 고모, 조카, 삼촌, 심지어 할머니도 있었다. 다행히 그 할머니는 나였다. 할매인 나는 골목대장이 되어 배밭을 휘젓고 다녔다.
더운 날씨에 새참까지 잔뜩 먹고 나면 슬슬 잠이 오곤 했다. 그때쯤이면 우리는 외삼촌 집 뒷마당에 있는 배 저장고로 향했다. 6.25 전쟁 시 외삼촌과 먹거리를 숨기려고 파놓은 곳이라고 했다. 끈적한 무른 배 향, 배를 싼 종이에서 나는 묵 삭은 냄새. 거기에 쿰쿰한 지하 냄새까지 더해지면 귀신놀이가 제격이었다. 그 곳이 사춘기 시절의 해방구였다던 엄마 얘기가 떠오른다. “거적 한 장 깔고 그 위에 누우면 천국이 따로 없어. 나를 찾는 이도 없고 아무 일 안 해도 되니까.”
저 위 아파트가 배 밭 터
저녁 식사를 같이 하자는 제안도 뿌리치고, 바라만 보던 그 골목으로 들어섰다. 온통 빌라와 아파트들 천지다. 외삼촌네 집터를 단번에 찾아낼 수 없었다. 배밭 터를 기준으로 동네를 돌아보니 그제야 ‘종남 아저씨’, ‘왕이모’ 집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외삼촌 집도. 그런데 문득,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다. 힘들었지만 모두가 함께였던 그 배밭과 맞바꾼 보상금으로... 다들 행복하게 지내는지, 모두의 안녕을 기도한다. 제목에 끌려 집어 들었던 책 「골목의 시간을 그리다」 속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지금의 삶이 과거보다 풍요롭기에 우리는 어렵고 힘들었던 예전의 삶을 돌아볼 힘을 가질 수 있다.’
중년의 내가 먹골 엘레지를 부르고 있다는 것은, 그래, 이미 슬픔이 과거의 한 추억으로 자리한 덕분이리라. 이젠 어서 빨리, 지금의 코시국(코로나가 창궐하는 현재의 세태를 뜻하는 신조어)이 지나가서 ‘코시국 엘레지’를 노래하고 싶다. 자유롭고 역동적인 일상이 회복되어서 ‘그땐 그랬지’라고 옛 노래 부를 수 있길 간절히, 미치도록 간절히 기도한다.
50+에세이작가단 정호정(jhongj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