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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간 세상의 중심에 선 것 같은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바로 소백산 정상 비로봉에서 펼쳐지는 드넓은 능선을 걸을 때이다. 정상 비로봉은 1,400m가 넘지만 어의곡탐방소에서 오르기 시작해서 비로봉까지 왕복하는 길은 12km 정도이다. 국립공원의 위엄을 보여주는 비로봉까지는 계속 오르막이고, 숲이 울창하다. 올라가는 길 왼쪽에는 계곡이 있다. 이리저리 얽힌 바위 위에 보드랍게 앉아 있는 이끼는, 소백산이 품은 세월의 흔적이다. 자연은 자신이 겪은 시간을 다채로운 풍경으로 보여 준다. 두 다리만 튼튼하고, 폐활량이 넉넉하면 소백산의 깊은 품속으로 성큼 들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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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계곡을 따라 완만한 숲길이 이지만, 점점 가팔라지고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한겨울에도 온몸에서 땀이 흐를 정도다. 몸은 정직하다.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 달라지고, 움직이는 만큼 신호를 보낸다. 오르막에서는 웬만해선 막을 수 없는 땀이 흐른다. 살갗으로 넘쳐흐르는 땀은 일종의 정화 의식이다. 평소에 나쁜 생활 습관으로 세포와 혈관에 쌓인 노폐물이 씻기는 시간이고, 생활인으로 뇌세포를 차곡차곡 채우고 있는 근심과 걱정까지 땀과 함께 빠져나간다.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무거운 두 다리를 들어 올린다.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불씨를 살리려는 것처럼 에너지를 모아 몸의 움직임에만 집중하게 된다.

 

정상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다 보면 잡념으로 불투명했던 머릿속이 맑아진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충만한 의지와 달리 몸은 나아가길 격렬히 저항한다. 내 몸이지만 내 몸이 아닌 것처럼 여겨져 몸과 한참 실랑이를 벌이다 보면, 바람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익 쉬-. 산 아래에서는 항상 여러 가지 소음이 주변에 어지럽게 널려있어서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일 여유가 없다. 바람은 침묵한 적이 없지만, 우리는 바람이 침묵한다고 생각해 버린다. 바람 소리가 들리면 비로봉까지 얼마 안 남았다는 신호이다. 비로봉은 겨울에 칼바람으로 이름을 날리는 곳이다. 바람이 순한 날에도 국망봉 사거리에 가까워지면, 바람은 거대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바람 소리가 저 멀리에서 들려오기 시작해서 점점 커졌다가 빠르게 지나가면서 멀어진다. 바람은 산에서 울리는 파도 소리 같다. 소백산 바람 소리를 들으면 보이지 않은 것을 보는 초능력을 가진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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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소리가 들리는 곳에는 오랜 세월 동안 버틴 소나무 숲이 있다. 소나무를 보면서 가쁜 숨을 고른다. 가혹한 날씨를 견딘 소나무이파리는 고개를 들어야 보인다. 소나무의 키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무 사이로 바람이 지나는 길이라 이파리들이 위로 몸을 피한 탓이다. 고도가 낮은 곳에 자리 잡은 소나무와 다르게 사는 모습이다. 나무도 사람처럼 환경에 맞춰 살아가고, 그 모습을 밖으로 그대로 보여준다. 풍경에는 가만히 멈춰서 봐야 보이는 것이 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바람의 협연은 계속되고, 햇볕이 나뭇가지 사이로 들어와서 빛 그림자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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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고른 후 걸음을 옮기면 목책이 쳐진, 지금까지와는 다른 풍경을 만난다. 갑자기 파란 하늘이 초록 능선과 맞닿아 초원이 펼쳐진다. 그 끝이 어딘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넓게 이어진다. 높은 산 위에서 바람이 너무 거세서 나무가 살지 못하기 때문인데, 덕분에 스위스 알프스 같은 풍경을 만날 수 있다. 해발 1,400m가 넘는 곳에 있다는 사실을 잊을 만큼 완만하고 긴 능선이 펼쳐진다. 넓은 능선을 따라 걷는 사람들은 작은 점이 되어 흩어진다. 그 순간 하늘과 푸른 능선에는 만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프랑스 철학자 프레데리크 그로는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에서 눈 아래 보이는 것들을 뚫어지게 응시하다 보면 그것들은 우리의 소유가 된다. 우리는 산을 오름으로써 이 모든 것의 주인이 된다.’ 고 했다. 대자연의 중심에 들어가서 즐기는 순간, 풍경의 주인이 되는 일은 신비롭고, 강렬한 체험이다. 이보다 생생한 메타버스가 있을까.

 

50+에세이작가단 김남금(nemones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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