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강도 소리를 내야 흐른다

"천 개의 스토리 천 개의 자서전" 특강 참석 후기

 

흔히 사람들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두 명의 위인을 얻는다고 말한다. 바로 아버지와 어머니이다. 커다란 성취나 성공을 이룬 저명인사가 아니더라도 부모는 오직 부모라는 이유만으로 위대한 존재다. 너무도 당연하여 감히 어깃장을 놓을 수 없는 말이다. 그러나 솔직히 이성적으로는 그 도덕적 당위와 논리적 타당성이 인정됨에도 불구하고 실제 생활에서는 부모와의 관계란 이런저런 이유로 소소한 갈등이나 데면데면한 관계 속에서 지내기 일쑤다. 간혹 어버이날 같은 특별한 날 미리 다듬은 살가운 문장으로 준비를 하고 모처럼 전화를 걸고서도 입안에서만 맴도는 단어들을 말로 끄집어내기란 쉽지 않다. "아니 뭐 그냥…"이라는 뚱딴지같은 소리만 더듬거려진다. 왠지 쑥스러워 변죽만 올리다가 괜히 '싱거운 녀석!' 이라는 명칭만 얻을 뿐이다.

 

옛 속담에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고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된다고 했다. '행동은 그렇게 하지만 제 마음은 아시지요?'라는 막연한 이심전심의 기대는 넣지 않은 소금과 꿰지 않는 구슬만을 남길 뿐이다. 자신의 생각을 진솔하고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행동해야 사랑은 한층 두터워진다.

 

 

부모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한 방법으로 부모의 자서전을 만들어 선물하자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있다. 바로 서울시50플러스재단에서 진행하고 있는 <천 개의 스토리, 천 개의 자서전>이라는 프로젝트다. 그 내용은 주최 측에서 요구하는 최소한의 자료를 제출하는 선착순 천 명에게 무료로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부모님의 자서전을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필요한 자료는 간단하다. 제시된 50개의 질문 중에 30개 이상의 답변을 부모님으로부터 얻어 기록하고 관련 사진 몇 장과 함께 제출하면 된다. 세부적인 사항은 50+포털이나 각 캠퍼스 사이트의 배너를 클릭하면 알기 쉽게 나와 있다.

 

 

지난 6월 22일, 서울50플러스 중부캠퍼스에서 이와 관련한 특강이 진행됐다. 강사는 이 프로젝트의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박범준씨였다. 교육 내용은 프로젝트에 관한 간략한 설명과 함께 부모님으로부터 지난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끄집어 낼 수 있는 인터뷰어의 자세와 태도 그리고 인터뷰 기법에 관한 것이었다. 강사는 부모님의 옛 이야기를 듣기 위해 마주 앉았을 때 '호기심, 존중, 경험, 경청, 공감, 용기'라는 몇 가지 원칙을 강조했다. 듣고 보니 조직의 소통을 강조할 때 자주 나오는 단어들이었다. 좋은 인터뷰도 결국 서로 교감하는 소통에서 나온다는 말이겠다. 두 시간이라는 특강 시간이 자서전이라는 거창한(?) 주제에 비해 좀 짧아 보였지만, 짧은 만큼 속도감 있고 군더더기 없이 핵심만을 전달하기에 충분했다.

 

 

"내 살아온 이야기를 소설로 쓰면 흥미진진에 파란만장을 더한 수십 권의 장편소설이 될 거야!"

 

언젠가 삼겹살 집 옆자리에서 술로 불콰해진 얼굴로 언성을 높이던 흰 머리의 어르신을 기억한다. 생각해보니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하는 어르신들을 다른 곳에서도 몇 번 더 본적이 있는 것 같다. 누구에게나 산다는 일은 가슴 깊은 곳에 남모르는 응어리를 쌓아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유난히도 굴곡이 많은 우리 현대사에 온갖 사회적 제약까지 감내해야 했던 부모세대에게 담아둔 사연들은 종종 치유 받지 못한 상처를 의미하며, 그것은 어느 세대보다 크고 또 딱딱하게 굳어져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서점과 인터넷에서는 갖가지 화려한 성공담들이 흘러넘칠 정도로 흔하다. 그럼에도 박범준 강사는 "모든 삶은 기록될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자신의 삶 속에서 스스로가 주인공임을 자각 할 때 절실하고 특별하지 않은 순간이 없을 것이고, 그것은 더 이상 평범한 '장삼이사'들의 해묵은 이야기일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이 과정을 통해 부모들이 각자의 삶에 가두어 두었던 응어리를 풀고, 자신이 걸어온 길과 따뜻한 화해를 나누는 기회를 제공받는 다는 것도 그들의 이야기가 기록될 가치를 갖는 이유일 것이다.

 

 

소리를 내지 않고 흐르는 강물은 없다. 겉으로는 장판처럼 구김살 없는 강물도 깊은 곳에선 거친 바닥을 스치며 흐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강바닥에 가라앉은 부모님들의 '장편소설' 같은 이야기를 끌어내어 소리 나게 해주는 것, 들어주는 것 그리고 기억해주는 것 - 우리가 조금은 서둘러도 좋은 일이겠다. 소설가 공지영이 <별들의 들판>이란 글에서 이렇게 쓴 바 있다.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 인생이고 누구도 그것을 수선할 수 없지만 
한 가지 할 수 있는 일도 있다. 그것은 기억하는 것, 잊지 않는 것, 
상처를 기억하든, 상처가 스쳐가기 전에 존재했던 빛나는 사랑을 기억하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