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 3강
인왕산
2019년 9월30일(월) 10:30~14:30
강사: 곽동운(역사트레킹 마스터)
인왕산 트래킹 만남의 장소는 3호선 경복궁역 4번 출구,
약속시간 10분 전인 10시 20분, 이미 여러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네요.
인왕산(339.9m)은 북쪽의 북악산(342.5m), 동쪽의 낙산(124.4m), 남쪽의 남산(270.9m)과 함께
서울의 중심부를 둘러싸고 있는 사신사(四神砂-左靑龍, 右白虎, 前朱雀, 後玄武) 중의 하나로
우백호에 해당됩니다.
오늘 그 유명한 인왕산 호랑이를 만나볼까요.
예전에 금천교 시장이었던 세종마을음식거리를 지나 사직단에 갔습니다.
잠깐 몸도 풀고 오늘의 트레킹을 준비합니다.
사극을 볼 때, “종묘사직을 보전하소서.”와 같은 대사를 들은 적이 있으시지요.
이 말은 종묘사직에서 유래 되었습니다.
사직(社稷)은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을 합하여 지칭하는 말로,
우리나라에서 사직에 제사를 지낸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며 조선왕조까지 이어졌습니다.
태조이성계는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면서 먼저 궁궐의 위치를 정하고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유교 예법에 따라 동쪽에는 종묘를 세우고, 서쪽에는 사직단을 세웠습니다.
종묘와 사직, 즉 종사(宗社)는 국가 그 자체를 상징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쟁 통에 불타기도 했고, 공원으로 바뀌고 정문의 위치가 뒤로 밀려가는 등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1908년에는 일제의 강압으로 아예 폐지가 되었고 일본통치하에서 사직단 부지가
아예 총독부로 넘어갔지요. 일제는 사직단 주위에 도로를 내고 사직단 일원을 공원으로 만들었습니다.
사직단 정문은 1967년 서울 최초의 터널인 사직터널이 개통되고
경복궁~사직터널 길이 새로 만들어지는 바람에 원래 위치보다 뒤로 20여m 밀려났답니다.
청명한 가을하늘 아래 코스모스 유난히 반짝입니다.
멋진 풍광을 눈에 가득 담고,
돌아가서 아쉬울까봐 서로 사진찍어주는 모습 .
그 모습도 아름답습니다.
언제나 도시락 먹는 시간은 즐겁기만 합니다. 서로 나눠 먹으니 더 맛있습니다.
인왕산 정상을 오르지 않고 호젓한 자락길과 오솔길을 걸어 창의문까지 걸어갑니다.
곳곳에서 그 유명한 인왕산 호랑이를 만났습니다.
아 , 황금색 호랑이도 있네요, 우백호면 흰색이어야 하는데..
어찌해서 황금색을 칠했는지 생각해 봅니다.
본래 서쪽은 오행중에서 금(金)에 해당되어 금은 흙에서 나오니(土生金)
그런 이유로 황금색을 칠하지 않았는가 추측해봅니다.
수성동 계곡에 잠시 내려갔습니다.
청계천 발원지가 백운동하고 이곳 수성동 입니다.
겸재 정선의 수성도에 나온 기린교가 그림과 함께 앞에 놓여져 있네요.
인왕산 수성동 계곡은 조선시대 안평대군이 살았고,
후에 그의 큰 아버지인 효령대군이 이어받은 옛 집 비해당이 있던 곳입니다.
이곳 계곡에는 기린교(麒麟橋)라는 오래되고 긴 통 돌다리가 놓여있는데,
조선 영조 때인 1750년경 겸재 정선의 수성동(水聲洞)을 묘사한 그림에도 이 다리가 보입니다.
수성동은 계곡의 물소리가 유명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경관이 뛰어나
겸재 외에도 추사 김정희의 시구 등 많은 작품 속에도 등장했습니다.
최근까지 이곳에는 1971년에 지은 옥인시범아파트(9개동 308세대)가 있었습니다.
계곡을 복원을 하면서도 시범아파트 흔적을 남기고 안내표지판을 세웠습니다.
18세기 수성동 계곡을 중심으로 인왕산 일대는 위항문학으로도 유명했습니다.
위항문학(委巷文學)이란 중인과 평민들의 한문학 활동에 따른 문학으로 중인문학이라고도 합니다.
위항이란 꼬불꼬불한 거리나 골목, 작은 집들이 많이 모여 있는 가난한 동네를 말하는데,
중인 이하 하급계층을 위항인이라 지칭한 예에 따라 편의상 위항문학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위항시인들의 본격적인 시사(詩社)는 1786년 7월 결성한 천수경 등 13인에 의한 옥계시사(玉溪詩社)로,
이들은 옥류동 부근에 집중적으로 모여 살면서 돌아가며 시회(詩會)를 열었습니다. 이들의 시회 장면은
그림으로도 기록되어 여러 장 남겨졌는데 풍속화의 대가 김홍도의 작품도 있습니다.
길을 돌고돌아 창의문으로 걸어갑니다.
이 길을 지나간 숱한 인물들을 생각합니다.
경복궁을 내려다 보는 눈물 가득한 단경왕후의 얼굴이 보이는가 싶습니다.
창의문 주변에서 거사를 앞둔 반정군의 거친 숨소리도 들립니다.
겸재 정선이 그림 구도 잡기 위해 지긋이 풍광을 바라보는 모습도 보입니다.
젊은 윤동주의 고뇌에 찬 모습도 떠올려 봅니다.
시인의 언덕에 올라 확 트인 전망 앞에 감탄사를 연발합니다.
바위에 새겨진 서시를 읽어보며, 마음을 가다듬습니다.
시인의 언덕 바로 아래가 창의문입니다.
한양도성 동서남북에 네 개의 대문(동쪽의 흥인지문, 서쪽의 돈의문, 남쪽의 숭례문, 북쪽의 숙청문)과
네 개의 소문이 있었습니다.
북소문은 창의문으로 장의문, 자하문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창의문은 건설되고 얼마 되지 않아 ‘창의문이 경복궁을 누르는 형국이라
사람의 자취를 통하게 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술사들의 주장에 따라 폐쇄됩니다.
창의문이 역사에 화려하게 등장한 것은 인조반정 때 1500명의 반정군들이
이 문을 통해 도성으로 진입하여 창덕궁을 점령하면서 부터입니다.
영조는 창의문을 개축하면서 인조반정 공신들을 이름을 적은 현판을 걸었습니다.
창의문에도 한번 이야기하면 끝이 없는 숱한 사연들이 있지요.
인왕산에서 내려오는 산세가 흡사 지네를 닮아 지네의 독기가 성을 넘어 침범할까봐,
창의문 천장에 닭을 그려 넣었다는 이야기(닭의 머리에 봉황 모양이란는 주장도 있음)부터,
숭례문이 불타서 다시 복원된 지금,
창의문이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문이 되었다는
가슴 아픈 이야기도 있습니다.
다음 주 안산 트래킹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오늘도 힐링한 행복한 마음안고 돌아갑니다.
학습지원단 신 동 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