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문 박물관 마을 도보여행>
최유선 해설사
최유선 해설사와 서대문 7번출구에서 첫 만남을 가졌다.
해설사는 서대문의 역사적 공간을 본 다음
돈의문 박물관 마을에 가서 다시 한번 돌아본 곳을 직접 확인하는 시간을
갖겠다고 오늘의 일정에 대해 이야기 하였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최대 상관은 마포, 서강지역이 최고의 상권이었다고 한다.
한강을 건너 숙박업, 선주 등 경강 상인들이 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정치 1번지, 외교 1번디도 서대문이었다.
전차가 시작되는 정거장은 바로 ‘이화여자외국어 고등학교’ 정문 바로 옆이었다.
조금 걸어가자 스테이션 호텔이 있던 자리에서 멈춰섰다.
그렇다면 스테이션 호텔 자리인지 어떻게 알 수 있나?
사진작가 “버튼 홈즈‘ 가 찍은 사진에 바로 위에 나무가 찍혀 있다.
600년된 회화나무, 영어로 ‘스콜라 나무’ 라고 학자가 있는 곳,
학교가 있는 곳에 많이 심었다는 나무다.
이어서 이 지역에 살았던 학자로 ‘김종서 장군’ 사실 22살에 문관에
합격한 학자란다.
갑자기 김종서 장군 이야기를 왜 하느냐 했더니
김종서 장군이 바로 이 지역에 살았단다.
단종이 폐위될 때 만약 김종서가 서대문 안에 살고 있었다면
단종을 지켜 낼 수 있었지 않았을까
그 당시 서대문을 잠그고 다른 문도 다 잠근 상태에서
김종서는 몇 번이고 궁 안으로 들어가려다 실패하였다고 한다.
그 이후 김종서는 살해 되었다. 슬픈 역사 이야기다.
농협박물관 앞 정자 앞에 모여 역사적 사실 들에 대해 진지하게
듣고 있다.
도로 건너 바로 앞에 ‘효성’이라고 쓴 건물 뒤로 4.19 혁명 기념관이
있는데 그 쪽에 ‘경기도청’ 이 있었다.
지금의 ‘강북 삼성병원’ 뒤쪽에 경교가 있었다. 뒤에 경교장
<김구선생의 거처>이 있고
경희궁 성으로 들어가려면 경교를 건너야 했다.
경기감영터 반송방에 대한 설명도 있었다.
이어 지금은 문화일보가 자리 잡은 옛날 동양극장 터에 대해 설명하였다.
"홍도야 울지 마라, 오빠가 있다." 를 구성지게 부르며 해설사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라는 신파극이 대 히트를 쳤던 동양극장에
대해 설명하였다.
그 당시 연극을 보고 나온 사람을 태우려는 인력거들이 이 앞거리에
즐비하였다고 한다.
이어 동양극장을 지나
경향신문사 앞에 서서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도로를 바라보면서
그 바로 앞에 서대문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교통량이 많아 지면서 서대문을 철거하게 되었단다.
경향신문사에서 도로를 건너니 “경희궁” 정문이 나타났고
그 옆에 그 옛날 전차가 전시되어 있었다.
<시내 전차>
아기를 업은 누이가 도시락을 놓고 가는 동생에게 도시락을 전해주고
형의 모자를 전해주는 동상이 앞에 세워져 있어 그 당시의 풍경을
보여 주었다.
직접 전차 안에 들어가 그 당시의 광고문도 보고
추억을 되새겼다.
전차가 놓여진 바로 뒤에는 '서울역사 박물관'이 위치해 있었다.
이어서 돈의문 박물관 마을로 이동했다.
<개항 이전의 돈의문 주변, 경희궁 주변 모습>
<개항 이후 돈의문 일대의 모습>
1876년 조선과 일본의 수호조규가 제정된 이후 1879년에는
돈의문 밖 경기중군영 안 청수관에 일본공사관이 설치되었다.
당시 개항장인 인천에서 도성으로 오는 길은 육로로 한강에 이른 뒤
양화진을 거쳐 돈의문으로 들어오는 길을 택하는편이 가장 빨랐다.
1882년부터 서양 각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한 이후, 미국과 유럽인들도
거의 이 길을 택하였다.
1883년 미국 공사관을 필두로 각국 공사관이 돈의문 인근 정동에
자리 잡은 것도 경운궁과의 인접성뿐만 아니라 이 같은 교통사정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돈의문 일대는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등 서양 외교의 중심
지역으로 부상하였다.
1899년에는 돈의문에서 청량리까지 왕복하는 전차가 개통됐고
1901년에는 돈의문에서 마포까지 전차선이 연장되는 한편, 돈의문 바깥에
경인철도 서대문 정거장이 설치되었다. 돈의문이 서울과 인천을 잇는 교통로의
기점이자 종점이 됨에 따라 이 주변에는 외국 공관과 교회를 비롯해 외국인들의
주거, 교육, 의료 시설들이 속속 들어섰다.
<일제 강점 이후>
일제의 강점 이후 한 때 줄어들었던 경성의 인구는 3.1 운동이후
급격히 늘어났다. 일본인 인구의 지속적인 증가와 함께 일제의 약탈적인
농업정책으로 인해 지를 잃고 일자리를 찾아 온지방 농민들, 신교육의
효용을 인식한 유학생 등이 속속 경성으로 모여 들었다.
1936년 일제는 성 밖의 광대한 지역을 경성부에 편입시켰다.
돈의문 철거 이후 서부 지역에서 성 안팎의 경관 차이는 크게 줄어든 상태였는데
경성부 영역의 확장으로 두 지역의 통합성은 한층 높아졌다.
이후 서대문에서 마포, 양화진, 홍제동 등지에 이르는 신작로도 만들어졌다.
도심부에 가까운 서대문 사거리 주변은적십자병원과 서대문경찰서,
서대문 우체국 등 관공서가 들어섰고 새문안로 가로변을 중심으로
근대회사, 문화시설, 부호의 저택들이 잇따라 들어섰다. 그리고
새문안 동네의 경관에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20세기 초 돈의문에서 소의문에 이르는 성벽 안쪽지대에는 미국인,
유럽인들이 많이 거주하게 되었다. 돈의문 주변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늘어나자
이들에게 일상 생활용품과 기호품등을 공급하는 상점들도 생겨났다.
개항이후 새롭게 조성된 서쪽 공간은 신문물을 조선에 소개하는 창구 구실을
하였다.
<버튼 홈즈의 서울 가는 길>
엘리어스 버튼 홈즈는 여행가라는 용어를 만들어 낸 미국의 여행가이자 사진가이다.
그는 1901년 부산에서 인천 제물포를 거쳐 서울에 도착했다.
서울 곳곳을 여행하면서 귀중한사진과 기록을 많이 남겼다.
서울의기차역에 도착하여 기차에서 내리자, 길고 헐렁한 흰 컽옷을 입은 젊은이가
영어로 말을 걸어온다.
“스테이션 호텔, 훌륭한 숙박시설, 적절한 가격, 요란한 군대행진 나팔 소리에서 멉니다.”
그는 그 상냥한 청년을 따라 스테이션 호텔로 갔다.
그가 남긴 말
“서울은 내가 지금까지 가 본 곳 중에서 가장 낯설고도 흥미로운 도시이다.
지금까지의 여행 중에서 코리아의 수도를 방문했던 것이 가장 재미있는
선택이었다.“ 라고
<미국제 기차>:
“제물포 항구로부터 수도인 서울까지는 기차로 갔다. 승객은 의심할 바 없이 한국인들이다.
그 들 대부분은 흰 옷과 버선을 신고 갓을 쓴 양반이었다. 우리는 복잡하게 짜인 모자에
호기심을 느끼고 하나를 사서 한가롭게 분해하여 살펴보았다.“
<서울의 기차역>
“서울의 기차역은 도시 외곽에 있다.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서울과 그 근교의 총인구는
약 300만명이다. 300만명의 이상한 사람들이 낯선 옷을 입고 우리와는 판이하게
다른 생각과 관습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 동양 극장과 홍도야 우지마라>
1936년 7월 23일 , 장안의 기생들이 동양극장 앞에 모여 들었다.
‘홍도야 우지마라’로 잘 알려진 이 연극 제목은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였는데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고 한다. 현재 이 자리에 문화일보사가 들어서 있다.
<전차 381호> 모형
이 전차는 1930년경부터 1968년 11월까지 약 38년간 서울 시내를 운행하였다.
서울에서 전차 운행이 처음 시작된날은 1899년 5월 17이었으며 운행구간은 서대문에서
청량리까지 였다. 이후 전차는 1960년대 초반까지 서울 시민의 대표적인 교통수단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 이후 버스와 자동차를 운행하는데 방해가 되자 1968년
11월 전차 운행을 일제히 중단하였다.
이 전차는 서울에 마지막 남은 2대의 전차 가운데 하나다.
2007년 12월에 서울역사박물관으로 옮겨온 후 1년간의 보존처리과정을 거쳐서
전시하고 있다.
밖의 조각상은 학교 모자를 놓고 간 오빠에게 급히 전차를 세워 전해주려는
모습과 깜박 놓고 간 도시락을 전해 주려는 조각상이 만들어져 있다.
<2003년 돈의문 뉴타운 지정 후>
돈의문 안과 밖의 새문안 동네와 교남동 일대는 2003년 ‘돈의문 뉴타운’
으로 지정되었다. 돈의문 밖, 인왕산 능선을 따라 성곽 아래로 한옥과
나지막한 집들이 펼쳐진 교남동과 주변 동네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풍경
만큼이나 오랜 시간의 정취가 배어있고 정든이들의 추억이 쌓여가는 그윽한
동네였다. 한편, 돈의문 안에는 ‘작은 시간의 섬’처럼 새문안 동네가 자리했다.
오래된 골목 사이로 한옥과 근현대 기와 집들 할 것 없이 식당과 가게들이
들어서 때가 되면 찾는 손님들로 북적이는 활기찬 동네였다.
서울 역사 박물관은 이러한 동네의 모습을 서울 생활 문화 자료조사 사업을
통해 기록하였고 그 결과물을 ‘돈의문 뉴타운 조사모고서 - 돈의문 밖,
성벽 아랫마을 (2009년) 로 발간하였다.
<돈의문 전시관 내부에서 바라본 경희궁 뜰의 모습>
<사라져 간 옛 가옥, 교남동과 새문안 동네 한옥 마을의 자재들도 전시되어 있다.>
뉴타운 지정 후 10년이 지난 2013년 교남동 일대의 전면 철거가 시작되었다.
근린공원으로 계획되어 일부 건축물만 남기고 사라질 뻔한 새문한 동네는
골목과 집들을 보존하는 방향으로 계획이 구상되었고 이태리 레스토랑이었던
‘아지오 AGIO' 공간을 복원해 ’돈의문 전시관‘으로 거듭났다.
<돈의문 전시관 터, 옛 아지오 레스토랑 을 전시관으로 복원하다보니 경희궁 터의 유물들이 발굴되어 그대로 보존하였다.>
사라지고 잊혀져가는 교남동의 골목과 집들을 모형과 영상으로 만들었다.
집과 골목, 나무와 사람, 간판과 맨홀까지 주민들이 살던‘한창 때 동네의
모습‘을 영상에 담고 있다.
<돈의문 전시관에서 나오니 앞에 넓은 뜰이 있다. 이곳에서
상시 공연도 있나보다. 옆에는 한옥 마을의 일부분 모습이다>
한편, 새문안 동네의 예전 모습은 답사와 기록을 바탕으로 영상과 그래픽으로
표현했다. 성곽터를 따라 들어선 유한양행 본사, 골목찬에 있던 LP BAR,
현재 ‘돈의문 전시관’으로 쓰는 레스토랑 아지오와 한정, 한옥 식당 골목 등을
골목 지도안에 담았다.
<돈의문 박물관 마을 옆 도시건축센터, 강북삼성병원 옆 골목에서 이 건물을 끼고 들어오면 찾을 수 있다.>
<새문안 동네>
새문안 동네는 돈의문으로 들어오면 만나는 작고 오래된 동네다.
1890년 영국인 윌터 힐러가 촬영한 사진에서 돈의 문과 성곽,
경희궁 사이, 나지막한 언덕에 자리잡은 옛 모습을 볼 수 있다.
1930년대에 지은 도시 한옥에서 일식 목조주택과 해방 후 등장한 슬라브집,
현대의 콘크리트 건물들까지 크고 작은 건물들이 오래된 도시 조직과
어울려 새문안 동네는 ‘작은 시간의 섬’을 이루게 되었다.
<교남동>
2013년 봄 오래된 성밖 동네 교남동은 뉴타운 건설을 위한 철거현장이 되었다.
사라질 동네의 모습을 안타까이 생각하여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고 생각은 바로 행동으로 옮겨졌다.
철거될 계획이었던 새문안 동네의 도시한옥과 일식집, 양옥집들의 대부분은 조사기록작업과
리모델링 작업을 거쳐 돈의문 박물관 마을로 다시 태어났다.
이제 옛 동네 교남동은 사라지고 돈의문 뉴타운 새동네가 만들어졌다. 새로운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삶의 층들이 또 쌓여갈 것이다.
성밖 교남동과 마주보고 있던 성안 새문안 동네는 돈의문 박물관 마을로 다시 태어났다.
그 안 깊숙한 이 곳, 옛 아지오 건물은 서울 역사박물관 돈의문 전시관이 되었다.
글, 사진 : 모더레이터 이재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