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로 보는 세계 역사 - 고대 편
도심권 50+센터 열린 학교 '미술로 보는 세계 역사' 첫 시간.
모든 미술작품 속에는 시대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고대인들과 만나고, 그들의 문화를 살펴본다.
시대의 가치를 교감하고,
아름다움의 기준,
역사가 주는 의미를 듣는다.
미술 전문 변호사(미국) 김형진 강사
아름다움은 누가 정했는가?
구석기인들은 왜, 컴컴한 동굴에다 수천 개의 그림을 그렸을까?
왜, 그곳에만 그렸을까?
왜, 사냥하는 중요한 일을 하지 않고 그림을 그렸을까?
고대나 현대나 사회는 꼭 이성적이지 않다.
1) 동굴 속에 그려진 동물은 살아움직이듯 생생하게 표현되어있다.
2) 천정까지 가득 채워진 그림은 놀라움을 자아내게 한다.
3) 세계 최초의 비너스는 풍요의 상징을 나타낸다. 그런데, 왜 얼굴은 없는 것일까?
4) 뿔 달린 동물이 두발로 서있다. 사람인지, 동물(사슴)인지 알 수 없다.
현대인은 13만 년 전의 이 그림에 '마법 마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비례와 섬세함이 뛰어나다. 구석기 사람들 그림 실력은 대단했다.
바벨탑 - 메소포타미아 평야를 지배하던 신바빌로니아는 더욱 강대해졌고, 웅장한 신전과 궁전
등이 지어졌다. 바벨 탑과 공중 정원도 생겼고, 수도 바빌론은 구바빌로니아 시대보다 번영했다.
구약성서의 창세기에도 등장하는 바벨탑이다.
메소포타미아 길가메시 신화에 노아의 방주와 거의 동일한 이야기가 나온다.
성서보다 더 오래 된 역사기록으로 남아있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자체가 하나로 결합된 여러 시를 포함하고 있다.
12개 토판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11번째 토판에 홍수 이야기가 들어 있다.
바빌론은 인류 문명 중 초기 2천 년가량 세계 중심이던 도시였다.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 비옥한 초승달 지대 남동쪽에 위치했다.
인류 문명 초창기 관개농업을 시행한 도시들 중 하나이고,
현대 시계에도 사용되는 60분 체계를 확립했다.
잉여 자원을 통해 교역을 적극적으로 시행했으며, 인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고대도시다.
유대인들은, 자기 나라를 멸망시킨 바빌로니아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갖고 있었고,
탐욕과 죄악으로 가득 찬 악의 도시로 성경 속에서 그리고 있다.
역시, 역사는 승자에 의해서 기록된다.
바빌론의 거대함과 아름다움은 여러 문헌에서 많이 거론된다.
특히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라고 하는 바벨탑과 바빌론의 공중정원이 유명하다.
100년 전까지만 해도 성경 속에서나 나오는 전설 중 하나로 치부했으나,
고고학자 로베르트 콜데바이가 실체를 찾아내면서 실존했던 도시임이 드러났다.
전설적인 고대 바빌론의 문도 이 도시에서 발굴되었다.
* Robert Koldewey(1855~1925)는 독일 고고학자로 18년간 바빌론 유적을 발굴, 바빌론이 실제 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1) 동전에 새겨진 바빌론 황제, 네브카네자르 옆모습
2) 메소포타미아 미술품은 지금까지 그 원형 색을 유지하고 있다.
현존하는 그리스 조각품은 다 하얗게 보이지만 원래 빨, 노, 파 등의 색깔이 햇빛과 비바람에
탈색되었기 때문이다. 메소포타미아 조각과 미술품이 그래서 더 위대해 보인다.
3) 이집트 피라미드
4) 인류 최초 뇌 수술 사진
중세 이발사는 외과의사를 겸업했고, 뇌 수술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
메소포타미아 미술은 이집트 피라미드, 중남미 마야 잉카 이즈택 문명으로 흘러갔고,
한국 석굴암(불상 의상이 흐르듯 표현된 기법)과 일본 7층 집(피라미드처럼)까지 흘러왔다.
특이한 것은 한국엔 이층집이 없다는 것이다.
탑 종류는 7층, 9층이 있어도 집은 2층조차 짓질 않았다.
왜일까? 온돌 때문일까?
바빌론은 사라졌어도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계속 오리엔트 세계 중심 지위를 누렸다.
바빌론 위상을 대체한 크테시폰이 이슬람교 발흥 이후,
사산 왕조에 쳐들어온 아랍인들에 의해 파괴되었지만
그 옆에 또 다른 새로운 도시 바그다드가 세워지면서 수백 년 동안 번영했다.
그 후, 수천 년에 걸친 집약적 관개 농업으로 토양 염화와 사막화가 진행되었고,
훌라구의 몽골군이 바그다드를 파괴해 폐허로 만들었다.
역사는 흘러, 그 찬란했던 도시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이라크로 남아있다.
멕시코에 있는 피라미드 탑 - 인간을 제물로 바치던 탑이다. 사람을 죽여 계단으로 굴러
떨어트렸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제물로 삼았던지, 나중에 인구가 부족할 지경에 이르렀다.
중남미 마추픽추, 잉카제국 옛 수도 쿠스크에 관한 설명도 흥미롭다.
특히, 페루 나스카 평원의 거대한 문양은 현대에도 불가사의하다.
거대한 문양은 비행기를 타고 내려다 보아야 보인다.
1939년 하늘 위에서 처음 확인된 나스카 라인은
태평양과 안데스산맥 사이에 위치한 나스카 평원 곳곳에 그려져 있다.
약 1~6세기 고대 나스카인들이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문양으로
원숭이, 도마뱀, 고래 등 동물을 비롯, 각종 기하학적 도형까지 수백여 개가 발견되고 있다.
나스카인들은 이처럼 거대한 지상화를 왜 그렸을까?
귀족 두상 - 마야 문명의 또 다른 수수께끼다.
사람의 두개골이 사진처럼 저렇게 생길 수 있을까?
태평양 한가운데 떠있는 칠레 이스터 섬.
이곳에는 수백 개 '모아이'상이 태평양을 등지고 서 있다.
이스터 섬은 폴리네시아 제도 끝에 해저 화산 폭발로 생긴 화산섬이다.
칠레 영토에서 가장 외딴섬으로 본토에서 서쪽으로 약 3,500㎞ 떨어져 있다.
약 2900년 전에 폴리네시아 인들이 처음 이 섬으로 이주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
원주민들은 이스터 섬을 ‘커다란 땅’을 의미하는 ‘라파누이(Rapa Nui)’라고 부른다.
네덜란드의 제독인 야코프 로헤베인(Jakob Roggeveen)이 오랜 항해를 하던 중,
1722년 부활절에 이 섬을 발견했다.
모아이(Moai)라 불리는 887개 석상으로 유명한데,
탄소 연대 측정 결과 1100~1680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석상의 높이는 대부분 약 3.5~5.5m, 무게는 20톤 정도 되지만,
일부 석상은 높이가 10m, 무게가 90톤이 나가기도 한다.
이런 석상이 이 작은 외딴섬에 있는 자체만으로도 신비로움을 불러일으킨다.
고대인은 이곳에, 이런 석상을 왜 만들었을까?
고대 미술사는 수수께끼로 가득 차 있다.
고대 미술을 보는 커다란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이집트 '왕들의 계곡'이다.
유물은 거의 다 도굴 당했고, 이집트 유물은 보려면 영국 박물관으로 가는 게 낫다.
이집트에 잘 보존되어있는 것은 많은 미이라뿐이다.
현재 이집트에 살고 있는 이집트 사람들은 이슬람인 들이고,
실제 파라오의 후예인 이집트인들과는 전혀 다르다.
파라오인이 살던 이집트는 BC 3,000년 전부터 3천 년간 유지되어온 대단한 국가다.
당시 이집트는 일부일처제 국가였고, 모든 것을 파피루스에 기록하여, 현재까지 남아있다.
이집트인들은 상형문자를 성스러운 문자로 생각했고,
세계 최초의 종이책 '사자의 서'는 파피루스에 상형문자로 쓰인 두루마리 책이다.
스핑크스 - 나폴레옹은 이집트 정복시 스핑크스의 코에 포를 쏘았다.
그때 스핑크스의 코가 무너졌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은 나폴레옹이 만든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스핑크스(Sphinx)는 원래 그리스 미술과 설화 속에 나오는 상상의 동물이다.
사자 몸통과 다리와 발에 여자사람의 머리, 그리고 조류 날개와 뱀 꼬리가 달린 짐승으로 묘사된다.
피라미드 - 피라미드는 정복한 국가들에서 끌고 온 수많은 노예들 착취해서 짜낸 고혈의 결과물이란
설(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생산한 통설)이 있다.
그러나 고고학자 마크 레너와 자히 와하드 등의 주장은 이를 뒤집고 있다.
정부와 동등한 계약을 맺은 일반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역작이었다는 견해다.
이들은 풍족한 임금을 받았고 하루 8시간만 일했으며 8일을 일하면 2일을 쉬었고,
채찍질도 없었고 휴일에도 임금이 나왔다.
일당이 밀리면 파업을 했고, 피라미드 옆에 자기를 위한 무덤을 세우기도 했다.
1) 물동이를 인 소녀
2) 이집트 왕비 조각상. 당시 최고 미인 얼굴
3) 고대 이집트 제18왕조 아케나톤 왕(재위 B.C. 1379년경~1362년경)과 네페르티티 왕비
기념우표 네페르티티 흉상은 서 베를린, 국립미술관(샬롯덴부르크중 이집트관)에 있다.
이집트 3대 미인으로 네페르티티, 네페르타리(람세스 2세의 부인), 클레오파트라가 꼽힌다.
그림과 조각상을 보면, 아름다움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사진은 네페르티티 흉상)
기원전 1323년경, 파라오 투탕카멘(위 사진)은 18세에 사망했다.
자손을 남기지 않고 죽은 그의 뒤는 총사령관이며 ‘왕세자’의 칭호로 불리고 있던
호렘헵(Horemheb), 혹은 재상인 아이(Ay)가 이을 것이라 여겨졌다.
호렘헵이 아시아에 나가 있는 사이에 투탕카멘이 죽었으므로 아이가 먼저 손을 썼다.
그는 투탕카멘 왕비인 앙케센나멘을 자신의 부인으로 취하고, 파라오 자리에 올랐다.
그의 재위 기간은 4년에 불과했다.
확실치는 않으나 호렘헵이 쿠데타를 일으켜 다음 파라오가 되었다.
그는 유능한 왕이었으나 자식을 두지 못했는데,
죽기 전에 그의 오른팔로 충실히 일해온 재상 파람세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가 람세스 1세로, 이집트 제19왕조 시조다.(호렘헵을 19왕조 시조로 보기도 한다)
황금가면은 이집트 제18왕조 제12대 투탕카멘 왕의 유물이다.
룩소르 왕들의 계곡의 무덤 군에서 발견되었다.
투탕카멘은 중신 '아이'와 노장 '호렘헵'(모두 후에 국왕)의 보좌에 힘입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18세 젊은 나이에 죽은 왕의 죽음에 대한 의혹은 풀리지 않고 있으며,
업적에 관한 기록도 남겨지지 않아 알려진 것이 없다.
왕묘가 테베 서쪽 교외 외곽인 ‘왕가의 계곡’에 조영된 탓으로 도굴당하지 않은 채,
발굴되어 유명해졌다.
붕대로 감은 미이라 얼굴에 파라오 얼굴 모양대로 만들어져 씌워져 있었다.
이마 위에는 이집트 수호신인 대머리 수리와 코브라가 조각되어 있다.
투탕카멘 왕과 왕비인 안케센아멘.
투탕카멘 왕은 10살 때 즉위해서 배다른 누나 안케센아멘과 결혼했다.
당시 사회는 근친혼이 많았다.
18살 투탕카멘 왕은 죽음을 앞두고 있고, 왕비 얼굴엔 수심이 가득하다.
안케센아멘 왕비의 우려대로,
국무총리 '아이'는 왕위에 오르고, 왕비를 아내로 맞이하지만, 아이도 즉위 4년 후, 사망한다.
안케센아멘도 아이 사후, 호렘헵에 의해 숙청당했다는 설도 있지만,
아이와 결혼한 이후 모든 기록이 사라졌기 때문에 사실을 알 수는 없다.
람세스 1세는 이집트가 지중해와 만나는 나일 삼각주 중,
옛날 힉소스(Hyksos) 족이 점령했던 지역 출신이다.
아시아계의 핏줄이 섞인 것으로 보이며,
군인 가문의 자손이었는데 귀족, 또는 평민이었다고 전해진다.
람세스 1세는 2년밖에 재위하지 못하고 죽지만, 아이나 호렘헵과는 달리 아들에게 왕위를 넘긴다.
그가 세티 1세이며, 세티 1세도 다시 10여 년 뒤 아들에게 이집트를 맡기고 죽는다.
그 아들이 바로 유명한 람세스 2세다.
오늘날 가장 유명한 파라오를 꼽으라면 투탕카멘과 클레오파트라, 람세스 2세다.
람세스 2세는 위풍당당한 왕의 이미지로 명성을 누렸다.
룩소르 신전은 나일강 동안에 위치해 있다.
룩소르 신전은 정교하고 거대한 예술품이다.
4천 년이 지난 지금도 웅장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신전에는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 곳은 현재 룩소르라 불리는 고대 도시 테베에 있는 고대 이집트 신전 단지다.
아문 신에게 바치는 보다 작은 규모의 중왕국 시대 구조물이 있던 자리 위에 세워졌다.
'스핑크스의 길'은 룩소르 신전에서 시작하여 북부의 카르낙 신전까지 3킬로미터가량 뻗어 있다.
높이가 24미터에 달하는 오벨리스크는 기원전 1300년, 제19왕조 파라오 람세스 2세가 세운 것이다.
신전 입구 '스핑크스의 길'이 끝나는 곳에 서 있다.
원래 두 개였으나, 하나는 1829년 프랑스 왕 루이-필립에게 주어져
지금은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에 서 있다.
그 입구는 역시 람세스 2세가 건축한 열주식 안뜰로 이어진다.
람세스 2세 왕비, 네페르타리는 18왕조 파라오 아이의 증손녀, 또는 파라오 아크나톤 왕비
네페르티티의 방계 혈족으로 추정되며, 람세스의 가장 큰 총애를 받았다.
그녀가 왕 재위 40년경에 죽자, 람세스는 전무후무한 규모의 무덤을 그녀에게 만들어 주었다.
람세스의 수많은 왕자들은 군대 지휘관이 되거나 멤피스와 헬리오폴리스 사제로 일했다.
그러나 람세스 2세는 그가 수립한 종교 질서 상 최고의 권위를 갖는 카르나크 신전 제사장직은
누구에게도 물려주지 않고 평생 스스로 겸임했다.
오랜 재위 중 ‘왕자의 난’이 일어난 흔적은 보이지 않다.
이는 그의 뛰어난 정치력, 또는 리더십 증거가 되기도 했다.
람세스는 90을 넘긴 나이에, 노령으로 숨졌다.
카이로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그의 미라를 보면 매부리코에 강한 턱을 가졌으며,
이집트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붉은 머리였다.
부왕이 60여 년이나 재위하다 보니 아들들은 이미 고인이 되어버린 경우가 많았으며,
왕위는 열세 번째 아들인 메네프타에게 돌아갔다.
아부 심벨 대신전 - 람세스 2세의 웅장한 석조 신전들이며,
람세스가 영광을 떨치기도 했던 곳이다.
1813년 스위스의 동양학자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하르트에 의해 재발견되었을 때,
신전은 거의 모래에 뒤덮여 있었다.
이탈리아 도굴꾼 조반니 벨초니가 1817년 무덤 안에 들어가,
갖고 나올 수 있는 것은 다 가져가 버렸다.
사랑의 여신 하토르에게 바쳐진 두 번째 신전이자 좀 더 작은 신전이,
람세스 2세가 가장 사랑했던 아내이며
그가 '태양은 그녀를 위해 빛난다'라고까지 일컬었던 네페르타리를 위한 건축물이다.
1960년대 초, 아스완 하이 댐이 건설되고 있을 무렵,
유네스코는 세계적인 캠페인을 통해, 자금과 전문적인 기술을 동원했다.
아부 심벨 신전들이 나세르 호수 물에 잠기지 않도록 더 높은 지대로 옮겨졌다.
고대 미술은 신비하다.
다 알 수 없지만, 인간의 능력은 참으로 대단하다.
이집트 찬란한 문화는 인류의 소중한 문화사이기도 하다.
이집트 미술품 이집트가 아닌 영국 박물관에 대부분 소장되어있다.
우리나라 신라, 고려 시대 유산이 모두 사라진 것은 몽골군이 불사라 버렸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집트 유산을 불사라 버리지 않은 것으로 위안을 삼지만, 승자만의 역사가 아쉽다.
모더레이터 박옥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