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현동천 물길 이야기
-
물길(trace)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물은 길을 따라 흐르고, 길은 물에 의해 생깁니다. 옛 물길은 묻혔지만, 그 흐름은 그대로 길이 되었습니다. 그 물길의 흐름 따라 길을 걸어보는 서울시도심권50플러스센터 ‘한양의 물길을 걷다’라는 투어에 참여했습니다.
회현동, 다동, 필동, 예장동, 남창동, 명동의 골목은 지류가 본류로 합류하는 강물처럼 하나같이 을지로를 향해 뻗어 나가고, 그 덕분에 주변 지역의 교통, 물류, 유동 인구가 모여들었습니다. 수많은 건물이 세워지고 철거되는 개발과정에서도 한결같이 지역의 중심을 굳건하게 지키고 있는 도로 그리고 넓은 구역을 예외없이 전부 가로지르는 도로. 그렇기 때문에 을지로(명동)은 오래된 랜드마크로 자리 잡은 동시에 그 자체로 주변 지역을 상징하는 지명이 된 것 같습니다.
남산, 인왕산, 북악산에서 내려온 물들이 많은 하천과 개천을 만들고 청계천, 정릉천, 성북천으로 흘러내렸을 것입니다. 수많은 하천의 이름보다 투어에 참석했던 회현동천 코스(서울로~남대문시장~다동~명동~남산옛길~회현동) 중 평소 가기 어려운 곳만을 중심으로 현재의 모습을 기록해보려 합니다. 회현동천의 물길은 남산에서 발원하여 3호 터널 입구 위를 통과합니다. 그리고 신세계백화점 옆 건물(구 제일은행 본점)을 끼고돌아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앞에서 을지로 방향으로 흐릅니다. 회현동천은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 3번 출구 근처에서 창동천과 만나 청계천으로 함께 유입됩니다.
남대문시장
남대문시장
남대문시장에는 지하쇼핑센터, 수입상가, 군복 골목, 액세서리 골목, 먹자골목 등 이색적인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있습니다. 온라인 시장은 커져가는데, 전통시장·재래시장은 점점 쪼그라드는 모습이 목도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야채호떡 집은 문전성시였습니다.
명동 길거리 모습
한국전력 서울본부
이제 명동으로 갑니다. 「한국전력 서울본부」 건물은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1호」로 지정된 건물입니다. 문화재적 가치가 충분하며 현재도 사용 중인 건물이기 때문입니다. 「구리개 표지석」은 건물 앞에 놓여 있는데, 이곳에 조선시대 흙 빛깔이 구리색(황토색) 나는 작은 고개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문득 텅 빈 거리를 보니 외환위기, 금융위기, 사드를 그럭저럭 잘 버티며 슬기롭게 넘겨 왔는데, 코로나는 정말 최악의 좌절을 안겨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씁쓸한 마음을 다잡고 회현동, 남산옛길을 오릅니다. 회현동천의 중간 정도를 거슬러 오르다 보면 우리은행 본점 옆에 커다란 은행나무를 볼 수 있습니다. 수령 500년이 넘은 보호수로 이곳에는 조선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동래 정씨 정광필의 집터가 있었다고 합니다. 정광필이 하루는 꿈속에서 서대(종1품 이상 관리가 허리에 매는 띠)가 나무에 12개 걸려있는 모습을 보았고, 실제 그 이후로 정승이 12명이나 나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가파른 길을 따라 좀 더 올라가면 오성 이항복의 집터와 함께 집 앞에 있었던 쌍회정(雙檜亭)이라는 정자 터가 남아 있습니다. 경치가 수려했던 이곳에 이항복이 나무 두 그루를 심었고 훗날 여기에 정자가 지어질 때, 쌍회정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주변의 일신감리교회, 계단집, 와인슈타인 등 동네 가게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회현시민아파트 가는 길
회현시민아파트로 오릅니다. 1979.12월 준공된 10층짜리 1개 동 352세대(16평 단일평형) 복도식 아파트로 엘리베이터, 주차공간은 없습니다. 특이하게 출입구가 1층과 6층 공중에 있는 독특한 구조이며, 와우아파트를 반면교사로 튼튼하게 건설되어 아직까지 사람이 살고 있는 곳입니다.
모든 땅은 길이라는 이야기로 대지 위에 아로새겨집니다. 모든 건축은 우리의 삶의 흔적과 기억으로 공간 안에 새겨집니다. 옛길이든 신축이든 이야기는 인류가 살아있는 한 계속될 것입니다. 물길이 없어져서 아쉽고, 도시를 보존하지 않아서 안타깝다고 하고, 도시재생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래된 하천과 길을 없얘고 직선의 도로를 만들어, 골목길 풍경을 지우면, 그 길에 세워진 오랜 이야기도 기억도 역사도 사라진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삼국시대, 아니 구석기시대로 복원하자는 것인가?” 이야기와 기억을 남기자는 낭만적이고 인문학적인 의도는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사는 사람들의 재무적 상실감, 박탈감, 희생과 분노를 전제로 하는 결정은 참으로 동의하기 쉽지 않습니다. 아파트와 도시재생에 주는 절대적 인센티브를 비교하며, 『공정』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우리의 도시는 서양처럼 평지가 아니어서, 개천은 메우고, 하천은 펴고, 산이나 언덕은 깎아서 목적하는 직선과 직각을 얻어서 땅의 효율을 얻어야 합니다. 서양을 따라 하자는 것도 아니고 일제강점기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효율적이기 때문입니다. 투어를 끝내며,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에서 나온 한 마디 대사가 생각납니다. “인생이라는 길고 긴! 강을 지나오고 보니, 잠시 머물 수는 있어도 멈출 수 있는 순간은 없었다. 그러니 너무 섭섭해하지 맙시다. 떠나간 자리는 또다시 새로운 물길로 채워질 거고,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니..”
행복한 여행,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