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癡呆) 아닌 인지(認知) 저하(低下)입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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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산시 상록구 치매안심센터(https://sangroksoo.nid.or.kr)의 젊은 직원이 간단한 질문을 했다.

엄마는 겨울이라는 것도, 날짜도, 시간도, 숫자 계산도 거의 하지 못했다. 나를 돌아보며 도움을 청하는 엄마 눈빛이 어찌나 애처롭던지.

 직원은 치매안심센터에서 무료 뇌 검사를 하려면 두 주 정도 걸리고, 일반 병원에서 검사를 진행하면 보호자 부담이지만 결과는 금방 나온다고 했다. 나는 엄마가 다니던 종합병원으로 가서 MRI 검사를 신청했다. 40여만 원 넘는 검사 비용에 가슴이 철렁했지만, 빨리 진단받고 치료받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에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엄마가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커다란 기계 아래 누워 계신 걸 보는 내내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모처럼 비싼 식사를 하고 싶었지만, 엄마는 언제나 그랬듯 싼 데 가자고 하셨다. 아껴야 한다는 신념은 절대 사라지지 않으실 게다.

 '혈관성 치매’ 진단서를 받아들고, 다시 치매안심센터에 가서 엄마 사진, 지문을 등록하고, 양말 등의 간단 지원 물품을 받았다.

 

 안산에 사는 남동생 부부에게 엄마를 맡기고 이집트행 비행기에 올랐다. 여행 기간 중 건강보험관리공단에서 노인 장기 요양 등급 조사를 나온다 해서, 그동안 봐온 엄마의 인지 장애 증세를 낱낱이 적은 장문의 편지를 썼다. 직원에게 전해달라고 올케에게 맡겼고, 올케에도 그동안의 엄마 식사, 변화 등을 기록해 보여드리라 했다.

 여행이 여행이 아니었다. 여행서 돌아온 다음 날, 몹시 피곤했고 비도 퍼부었지만, 남동생 집에 가서 엄마를 모셔 오기로 했다. 난생처음 여행 선물이라는 걸 사와 올케에게 건넸다. 약소한 거지만, 엄마를 열흘 동안 맡기고, 올케가 해주는 밥을 드시게 했다는 게 엄청난 부담이었다. 엄마도 수시로 “선희가 언제 오냐?”고 물으셨단다. 아들 집에 있는 내내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것 같았다고, 엄마는 내 집에 오자마자 털어놓으셨다. 엄마는 아버지 돌아가신 이래 20여 년 이상을 혼자 사셨고, 아들 집에서 자 본 건 그때 열흘이 전부였건만. 며느리가 해주는 밥 얻어 드시는 시어머니들, 어떻게 미안함을 견디는지 모르겠다.

 

 엄마가 당장 입을 옷가지만 챙겨, 빗속을 걸어 종로 내 집까지 왔다. 나는 운전면허를 소싯적에 따두었지만, 차를 소유해본 적이 없다. 대기 질을 망가뜨리는 데 일조하지 않는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러나 엄마를 내 집에 모신 이후로 차 없는 게 얼마나 불편한지, 매일매일 실감하다 못해 서럽다. 잘 걷지 못하는 엄마를 모시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여러 기관을 찾아다니는 게 너무나 힘들었다. 엄마는 걸을 수 있다, 차비 아깝게 왜 택시 타느냐 고집하셨고, 그러나 몇 걸음 못가 주저앉으시곤 해서, 넉넉하게 시간을 안배하고 움직여야 했다. 운동을 위해서라도 걷게 하고 싶었지만, 둘째 보낸 슬픔에 잠겨 누워만 지내던 엄마에겐 무리였다.

 

 

 

 

 

 며칠 후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엄마의 장기 요양 등급이 ‘인지 지원’이라는 서류와 노인장기요양보험 급여 이용 안내 책자를 받았다. 그동안 공부를 많이 했다고 자신했건만, 인지 지원 등급의 범위나 혜택은 어디까지인지, 다음 단계로 엄마에게 어떤 기관이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건지, 급여 비용이라니, 그 계산은 어찌하는지, 책자를 읽고 또 읽어도 수학책 넘기는 것처럼 알 수 없는 단어와 숫자 나열이었다. 모두 한글로 쓰여 있지만 대부분 한자 용어니, 쉬운 우리말로 풀어쓰든가, 한자를 곁들여 설명해야 하지 않겠나. 우리나라는 한글이라는 아름답고 쉬운 우리글과 한자 문화권이라는 덤까지 활용할 수 있는 복 받은 나라다. 적어도, 아니 특히 관공서는 쉬운 우리말로 바꾸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으니, 반드시 한자를 병용해야 한다. 

 

 그때부터 얼마나 많은 기관을 찾아다니고, 인터넷 검색을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물으며 눈물을 쏟았는지 모른다. 치매 관련 지원 기관이 없지 않지만, 일괄 서비스가 아닌, 협소한 영역만 다룰 뿐이며, 이용 자격 기준은 대부분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수급자 우선이었다. 전체 맥락에서 도움을 주는 기관이 있으면 싶다.

 후배가 “선생님 걱정 마세요. 이 분이 다 해결해 줄 거예요.”라고 자신하며 관련 기관에서 일한다는 분을 연결해 주었는데, 이 분은 내가 인터넷에서 알아낸 것보다 아는 게 없었다. 기관 이름만 거창할 뿐, 책임자라는 이가 이 정도라니. 인지 지원 관련 기관은 반드시 인지 저하를 겪는 부모나 가족을 돌본 경험이 있는 이만 일할 수 있도록 법제화하면 좋겠다. 그러지 않고서는 인지 저하 어르신에게 필요한 단계 별 지원이 무엇인지, 그 보호자의 애타는 심정도 절대 알지 못한다.

 

 그나마 종로구 치매안심센터(https://jongno.seouldementia.or.kr) 직원들의 친절이 심리적 위안을 주었다. 심리적 위안을 강조하는 이유는 실제 도움은 미진하기 때문이다. 어르신과 보호자에게 안심을 주려면 적어도 인지 저하 진료를 하는 병원 안내와 장기 요양 등급 재신청 시에 필요한 의사 연결 정도는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다. 치매안심센터는 그럴 권한이 없단다. 등급 재심사 신청을 하려면 의사 진단서가 필요한데, 종로 일대 정신과 병원에 다 전화해 봐도 인지 저하 관련 진료는 하지 않는단다. 결국 서울대학교병원에 갈 수밖에 없는데, 서울대학교 병원 진료 예약은 하늘의 별 따기며, 의사는 단 1초도 내 어머니 얼굴을 보지 않았다. 그때의 참담한 심정은 후에 다시 상술하련다. 

 

 엄마의 주소지를 안산에서 종로 내 집으로 옮기면서 그 외 바꿔야 할 것, 서류 낼 것, 어르신 관련 지원이 있느냐고 물었는데, 주민지원센터에선 교통카드를 새로 발급받아야 한다는 기본조차 안내해 주지 않았다. 안산에서 쓰던 엄마의 교통카드를 들고 지하철을 타려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이런 식이다 보니 한 기관을 몇 번이나 오가며 서류를 떼고 알아봐야 했다. 자기 분야라는 데도 모르는 게 많았고, 다른 부서에 알아보라고 미루기 일쑤였다. 내가 프리랜서이니 망정이지, 직장 다니는 자식이라면 관공서와 지원 기관 오가는 일을 할 수 없어, 부모 모시기가 불가할 것이다. 실업자가 되어야만 부모 모실 수 있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