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지내는 날이 있다. 입에서 군내가 날 것만 같은 그런 날 말이다. 홀로 독립해 나온 그 무렵, 나의 일상은 두렵기도 했지만 들뜨기도 했다. 내가 무엇을 하든 간여하는 이가 없으니 더욱 그랬다. 그야말로 자유의 만끽. 평온했다.

그리고 온종일 골방에 들어박혀 글만 쓰며 지내는 일상이 이어졌다. 해가 거듭될수록 사람들과의 교류도 잦아들었다. 오랜 독립생활에 찾아온 것은 적막감이라고 해야 할까.

어쩌다 내 집을 찾은 노모는 불편함을 드러냈다. 내가 쫓아다니며 머리카락을 줍는다는 게 이유였다. 내 눈에 보여서 줍는 것일 뿐인데, 노모는 내가 너무 깔끔을 떤다고 여겼다. 그러고는 당신의 딸이 곁에 사람을 두는 꼴은 못 보겠군, 하셨다.

정말로 내가 그렇게 까다로운 사람인가 싶었다. 내 집에 손님이 오면 잠깐 기쁘고 며칠 혹은 한 달을 지내자 하면 불편을 견딜 수 없어 할까. 어느 순간엔 나 자신을 시험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뭐어? 집에 다른 사람을 들였다고? 불편하지 않아?"

다른 누군가가 내 집에 들어와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지인들은 한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사람의 움직임이 느껴져서 좋은데……, 나쁘지 않아, 괜찮아."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지인들은 고개를 내저었지만 나는 진심으로 괜찮았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좋았다. 나 아닌 누군가가 내 집에 있다는 사실이.

정작 불편해하는 것은 나의 지인들이었다. 아무 때나 전화를 걸어 편하게 수다를 떨던 친구는 주말이면 내 집에 전화 거는 일에 눈치를 보는 듯했다. 내게 동거인이 생긴 까닭이다. 그 동거인을 나는 생활동반자라고 칭했다.

대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상경한 이후로 나는 줄곧 언니네 가족과 함께 살았다. 그때도 남들은 불편하지 않느냐고 걸핏하면 말을 넣었지만 나는 어깨만 으쓱했다.

사람은 상황에 적응한다. 불편은 어디에나 조금씩 있는 것이고 그것을 어떻게 일일이 신경 쓰며 산단 말인가. 식구가 함께 있어서 불편하다고 느끼는 것들은 대부분 불편한 것들이 아니다.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이고 혹은 무심하게 넘어가는 것들이다.

아무튼 언니네 가족과 북적대며 살다가 독립한지 십여 년 만에 나의 생활은 자유로움에서 적적함으로 옮아갔다. 야단스러움을 좋아하지 않는 내 성격도 한몫했을 듯싶다. 그리고 새로운 식구가 내게 생겼다.

지방에서 생활하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상경하게 된 지인이다. 일 년만 내 집에 들어와 살게 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땐 노모의 말과 더불어 살짝 고민이 되긴 했다. 반나절을 넘기지 않은 고민이었다.

 

 

나는 무심하고 흔쾌하게 낯선 식구를 받아들였다. 혼자 살다가 둘이 지내니 불편한 점이 있기도 하겠지. 하지만 둘이 지내면 장점도 있지. 내 딴에는 가족이 아닌 누군가와 한 집에 사는 일은 시험해보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뜻하지 않은 일이지만 아침저녁으로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움직임과 목소리가 집 안에 머무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외롭지 않아? 애완견을 키워보는 건 어때? 고양이도 괜찮지."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고개를 저었었다. 외로움 때문에 강아지나 고양이를 집에 들이는 이도 있지만 사람을 들이는 일이 내게는 더 맞았다.

각자의 생활방식에 익숙해진 타인이지만 각자의 생활방식을 인정하니 불편할 일이 없었다. 생활동반자가 생긴 지 어느덧 9개월 차가 되었다. 한두 달은 탐색했고 그 기간이 지나자 한 집에 있어도 오래된 일상처럼 익숙해졌다.

나의 생활동반자는 매일 아침 출근해 저녁 늦게 돌아온다. 집에서 작업하는 나의 일상을 방해받을 일이 없다. 저녁이면 그날의 일과를 놓고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아침이면 서로의 하루를 응원하는 요즘이다. 혼자일 때보다 활기가 돈다.

옛말에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가까운 이웃이 먼 친척보다 낫다"는. 나의 생활 근거지와 동떨어진 곳에 산다면 친척 아니라 가족이라도 데면데면한 관계가 되기 쉽다. 일 년에 한두 번 마주하면서 얼마나 속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며 매일의 소소한 일상을 또 어떻게 나눌 수 있을 것인가 말이다.

아파트로 대두되는 도시의 일상은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는 것이 편하다고들 한다. 민폐를 끼치지 않고 사는 방법이라 여기는 듯도 하다. 하지만 사회적 인간인 우리가 누군가에게 민폐를 전혀 끼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사람마다의 생각이 달라서다. 혼자 있는데, 이웃의 누군가가 찾아왔다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심심하던 차에 말벗이 생겼다며 누군가는 좋아할 것이다. 또 누군가는 혼자 있고 싶은 시간에 찾아온 이웃을 귀찮고 성가실 수도 있다. 같은 상황일지라도 개개인의 성격과 취향과 상황에 따라 민폐가 되기도 하고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황이 전개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내게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에서 나타난 이웃이라면 은인이 될 수도 있다.

언젠가 내 글쓰기 수업에 오시는 분을 동네 길거리에서 만난 적이 있다. 같은 동네 살아도 이런 일은 거의 없는 일이다. 움직이는 시간대가 서로 달라서다. 그럼에도 내 집 가까운 곳에서 그 분과 종종 마주치곤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분은 사회복지사로 은평구 내의 돌봄이 필요한 이들의 집을 가가호호 방문하고 다녔다.

그녀가 찾아다니는 분들은 거의 혼자 지내며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었다. 내 일상의 주변을 자주 오간다는 사실을 알고는 내 집에도 가끔 방문을 해주면 어떻겠냐고 웃으며 부탁을 하기도 했다.

혼자 지내다보면 종일 입 한번 떼지 않고 넘어가는 날도 있다. 생각도 몸도 쓰지 않는 날이 있기 마련이다. 이런 날은 누군가 나를 귀찮게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안 좋은 생각에 빠져있을 때는 몸을 써야한다. 혼자서는 움직이는 일조차 귀찮아 그대로 눌러앉기 쉽다. 하지만 이웃의 누군가 찾아와준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산책을 가자고 한다면, 영화라도 보러가자고 제안해준다면. 귀찮은 생각은 잠깐, 아주 잠깐이다. 밖에 나와 서로 어울리다 보면 기분은 한결 나아진다.

우편물이 쌓이는 것이 못내 신경 쓰여 장기간 집을 비우지도 못하는 성격이다. 이런 일쯤은 옆집에 부탁해도 되지 않을까. 그럼에도 쉽지가 않다. 날이 갈수록 SNS와의 소통은 폭주하는데 얼굴을 대면하는 이웃과는 소통 단절인 경우가 태반이다.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나만 해도 SNS를 통해 나의 취향과 성향이 동일한 이들을 찾아 친구를 맺으니 말이다. 지역과 상관없이 나와 소통할 수 있는 이들을 가장 빠르게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그럼에도 SNS에서 만나는 이들은 가면을 쓴 이웃이기도 해서 조심스러운 일면도 있다.

"가까운 이웃이 먼 친척보다 낫다"는 말은 단순한 옛말이 아니라 현실이 되어야한다. 일인가구가 늘어가는 상황에서 언제, 어떤 일이 나의 일상에서 벌어질지 모르잖은가. 이웃은 내 일상의 동료이자 이웃이라는 또 다른 가족이다. 소소한 민폐쯤은 아량으로 넘길 수 있는 이웃에 관대한 우리가 되어야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