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칼이 하얀 할아버지가 중후한 모습으로 황금빛 오스카상을 들고 있다.

공로상Honorary Award 수상자인가?!

2018년 3월 5일 아침. 채널 CGV에서 90회 아카데미 시상식을 중계하고 있었다.

그러나! 89세의 제임스 아이보리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각색상Best Writing(Adapted Screenplay) 수상자였다.

 

< 콜미바이유어네임 각색상 제임스 아이보리 >

 

1983년 이탈리아, 17세 소년의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바치는 헌사로

도수 높은 안경을 쓴 제임스 아이보리는 신사복에 나비넥타이를 매고 흰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셔츠 안에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주인공 티모시 샬라메가 프린트되어 있었다.

고불고불한 머리칼과 예민하고 고운 얼굴의 소년이 할아버지 몸속에 들어있었다.

 

원작 ‘그해 여름 손님’을 각색한 그는 89세.

영화제의 역사는 90회.

게다가 제임스 아이보리는 85년 <전망 좋은 방> 92년 <하워드 엔드>를 만든 감독이다.

객석에서 주인공 올리버(아미 해머)와 엘리오(티모시 샬라메)가, 감독 루카 구아다니노Luca Guadagnino가 이탈리아 햇볕처럼 웃고 있었다.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된 티모시 샬라메는 온통 하얀색의 셔츠와 넥타이를 맨 턱시도 차림으로 하얀 천사처럼 앉아있었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초콜릿이 가득한 감미로운 청춘의 사랑이야기이자, 아버지들에게 바치는 헌사’라고 했다.

분노하고 윽박지르고 가르치고 구속하는 아버지가 아니라 휘청거리고 흔들리는 자식의 감정과 보폭을 보살피고 곁을 내어주는 지혜로운 아버지에게 바치는 영화라고.

 

지중해의 햇살과 흘러넘치는 초록의 나무, 반짝이는 호수를 뛰어다니는 두 사람을 만나려고 극장으로 달려갔다.

우락부락한 조폭 남성들의 살인, 끔찍한 음모와 배신과 죽음, 치정과 공포로 뒤덮인 영화에 지친 내게 좋은 사람들의 고운 이야기를 선물해주려고.

 

Welcome to my world. 내 방으로의 초대

열일곱 살의 청춘, 엘리오의 여름은 햇볕에 잘 익어 과즙이 흐르는 복숭아처럼 시작된다.

소년에서 청년이 되어가는 몸의 선과 성적인 에너지의 흐름이 그렇고 자기도 잘 모르겠는 변화무쌍한 감정, 첫사랑으로 달려가는 상기된 얼굴표정이 그렇다.

신비롭고 불안하면서도 빛이 난다.

이탈리아 북쪽 어딘가(Somewhere in northern Italy). 영화가 시작되고 1분도 안돼서 바로 2층 창가에 얼굴을 내민 엘리오에게 확 빠져든 것은 나도 그 때, 1983년에 청춘이었기 때문이다.

 

< 17세 엘리오 >

 

 


<안녕, 엘리오 올리버>

 

아무튼 세상의 좋은 것은 다 모아놓은 것 같은 아름다운 풍경 속 엘리오의 집으로 손님이 찾아온다.

내 방이 곧 당신 방이에요(my room is your room).

6주 동안 머물면서 아버지의 연구를 도와주러 온 올리버와 악수하며 엘리오가 한 첫 말이다.

예민하고 섬세한, 거의 항상 책을 손에 들고 다니거나 악보를 그리고 음악을 듣고 있는, 소년 엘리오가 올리버에게 자기 방을 통째로 내어주는 저 말은 이미 공간으로의 방을 넘어 내 몸과 마음속으로 낯선 존재를 받아들인 셈이다.

엘리오는 종종 낯설게 자기 방을, 자기 몸을, 자기 마음을 어리둥절한 채 바라본다. 나름의 질서로 평온했던 소년의 방과 몸과 감정은 낯선 손님이 들어오면서 흔들리고 재배치된다.

 

< 엘리오의 방이자 올리버의 방이 된 공간 >

 

낯선 손님 올리버가 찾아와 뒤흔들리기 이전의 엘리오의 방을 이루는 것들을, 그의 세계를 들여다보자.

문을 열면 우리 할머니 방에 으레 있음직한 나무 고리짝이 놓여있다.

그 위에 책 몇 권과 포터블 카세트플레이어가, 카세트테이프 여러 개가 차곡차곡 꽂혀 있다.

체스 판 하나가 벽에 기대있고 진초록 벽걸이형 책장이 있다.

목각무늬 단순한 흰 프레임의 침대위에 빨간 색 모포가 걸려있다.

이 붉은 색은 올리버의 반바지, 앨리오가 올리버가 왠지 그리워 그의 체취를 맡고 머리에 뒤집어쓰고 어쩔 줄 몰라 하던 반바지 색이다.

 

맨 왼쪽 포스터는 바이로이트BAYREUTH라는 글씨 하나. 바이로이트는 독일 남부 바이에른, W. 리하르트 바그너(W. Richard Wagner)가 살았던 곳이다.

매년 7~8월에 바이로이트 페스티벌Bayreuth Festival이 열린다. 음악을 공부하는 엘리오는 그곳을 이미 가봤거나 가고 싶어할 것이다.

그 옆에 24stunden LE MANS‘82라는 포스터가 있다.

프랑스 르망시에서 열리는 르망 24시간 레이스, 세계 정상의 자동차경주대회다.

일 년 전 1982년, 소년답게 자동차경주를 보러 갔다 왔을까.

저 포스터는 현재 판매가 51,000원으로 판다는 공고가 인터넷에 떠 있다.

 

옆으로 나란히 피터 가브리엘 Peter Gabriel 콘서트 포스터.

영국 프로그레시브 로커 피터 가브리엘은 섬세하고 똘똘한 엘리오가 좋아했음직하다.

죽기 전에 꼭 들어야 할 앨범 1001에 피터 가브리엘이 올라있다.

1982년 네 번째 음반 Security에서 피터 가브리엘은 이렇게 노래했다.

 

“네 주위의 리듬을 느끼고(the rhythm is around me) 삶에 입을 맞추어라(Kiss of Love). 너와 닿고 싶으니(I’m wanting contact with you) 네 손을 나에게 다오(Lay your hands on me).”

 

그 옆엔 마리오 메르츠Mario Merz 포스터다.

가난한 미술, 즉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 운동을 전개한 이탈리아의 설치 미술가이며 조각가다.

‘시간에 바탕을 둔 건축’을 발표한 것이 1981년이다.

 

또 하나. 1981년 Roland Garros에서 열린 프랑스오픈 포스터.

황금색 머리카락에 흰 테니스 헤어밴드를 두른 여자 뒷모습이다.

에두아르도 아로요Eduardo Arroyo가 전설적인 스웨덴 테니스 선수 비욘 보그Bjorn Borg를 그린 프리핸드 일러스트다. 1980년대 소년을 둘러싼 문화의 모든 것이 있는 방이다.

 

당신이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아니 당신이 알아주었으면 해서

매일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햇볕 속에서 수영을 하는 소년이, ‘나’를 이루는 많은 것들 속에서 평온하던 날들은 그 해 여름, 요동을 친다.

그야말로 큰 일이 났다.

참 다르고도 알 수 없는 신비한 존재가 확 들어와 뒤섞이고 바꾸기 때문이다.

 

엘리오는 제 마음을 헤집어보고 몸의 변화를 탐험한다.

만져보고 따라가고 당황하고 울음을 터뜨린다.

지금, 이 세상, 모든 것이 좋다고, 거기 모든 것에 너, 올리버도 포함된다고 고백하면서 엘리오는 당신이, 이 내 마음의 움직임을, 흔들림을 알아달라고, 내 세계의 변화를 알아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The meaning of the river flowing is 흘러가는 강물의 의미는

not that all things are changing 세상의 모든 것들은 변하므로

so that we cannot encounter them twice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but that some things stay the same only by changing. 어떤 것들은 오직 변화를 통해서만 같음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헤라클리투스Heraclitus의 <우주의 파편The Cosmic Fragments>이다. 변화만이 변함없이 일어난다는 것. 깊고 넓은 가르다 호수에서 건져 올린 청동상의 팔과 다리가 부서지고 사라지고 녹슨 것처럼, 그러나 입술과 눈빛은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처럼.

알 수 없는 고대의 내 몸 속에서 솟아난 것처럼 당황스런 서로의 몸을 가만히 매만지는 것처럼, 두 사람은 6주라는 한정된 시간을 예감하면서 서로를 사랑하기 시작한다.

 

< 모네의 언덕 엘리오와 올리버 >

 

시간의 물결-6주, 여름, 17세, 24세, 그리고 나중에later

말버릇처럼 곧잘 ‘나중에Later’를 사용하는 올리버는 6주 동안 변함없이 변해갈 것이고 익어가는 살구도 복숭아도 말라 떨어질 것이고 여름초록도 지쳐 겨울이 될 것이다.

그러니 변한다고 슬퍼할 이유는 없다는 것.

우주적 질서에 맞추어 흘러가듯 살아갈 것.

“더 빨리 말하지 그랬어요? 망설이면서 그냥 낭비한 시간이 아까워.”

첫사랑에 빠진 애닮은 소년의 조급한 마음에 읽어주는 속 깊은 지혜의 말일 수도.

 

둘은 마침내 “Call me by your name. and I'll call you by mine,”로 나아간다.

온전한 내존재를 일컫는 고유명사 ‘이름’을 서로 바꿔 불러준다는 것은 빼고 더할 수 없는 존재자체를 내 속으로 받아들이는 엄청난 일, 그 엄청난 일을 엘리오와 올리버는 속삭임처럼 조용히 합치고 바꾸어낸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세상에는 사실 좋은 사람들만 있다.

고고학자 아버지는 소년의 가늠할 수 없는 첫사랑을, 동성의 남자를 사랑하는 아들의 마음을 섬세하게 살펴준다.

속 깊은 엄마도 아들의 갈팡질팡 성장의 흔들림을 알아채고 배려한다.

 

그러나 어쩌랴.

올리버를 향해 강아지처럼 뛰어가고 고양이처럼 흐물흐물 안기던 엘리오에게 이별이 찾아온다.

낙심한 엘리오는 집에도 혼자 못 온다.

엄마는 철철 우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데려오고 아빠는 텅 빈 방에서 울다 나온 아들에게 지극한 위로의 말을 건넨다.

엘리오는 운이 좋다.

올리버는 자기 부모가 알았다면 정신병원에 끌려갔을 거라고 탄식했으니.

 

“우리는 빨리 나아지기 위해 우리 자신을 갈기갈기 찢어놓는데 익숙해. 서른 살이 되기 전에 벌써 무너져 버리지. 그러면 새로운 사람과 시작할 때마다 그들에게 보여줄 내가 더 이상은 없어져 버리게 돼. 아무것도 느끼지 않기 위해서 어떠한 것도 느낄 수 없어지면 안 되잖니. 곧 나아질 거야. 하지만 어떤 것들은 평생 너를 붙잡아 둘 때도 있어. 기억하렴. 우리의 마음과 몸은 오직 한 번만 주어진다는 것을. 그 사실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네 마음은 닳아버린단다. 그리고 우리의 몸은 언젠가 아무도 쳐다봐주지도 않을 때가 올 거야. 지금 당장은 슬픔이 넘치고 고통스러울 거야. 하지만 그것들을 무시하지 말기를. 네가 느꼈던 기쁨과 함께 그 슬픔들을 그대로 느끼렴.”

 

The first time과 For the last time의 순간들

두 사람이 폭포를 향해 달려가는 장면에서 수프얀 스티븐스의 노래 Mystery of Love가 나온다.

단계로 보면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절정인 시간에.

 

The first time that you kissed me, Boundless by the time I cried.

The first time that you touched me, oh, will wonders ever cease?

 

그리고 여름이 끝나 호수는 얼어붙고 온 세상에 하얀 눈이 쏟아진 겨울이 온다.

겨울의 별장에서 엘리오는 올리버의 전화를 받는다.

“모든 것을 그대로 기억하고 있어.”

 

그렇다한들 올리버는 이곳으로 오지 못한다.

엘리오는 전화선 저쪽의 올리버에게 여섯 번이나 자기 이름을 부른다.

엘리오, 엘리오, 엘리오...

 

전화 저쪽에서 올리버가, 한숨을 쉬듯 단 한 번, 아, 올리버, 자기 이름을 부른다.

타닥타닥 불꽃이 튀는 소리만 들리는 벽난로 앞에서 엘리오는 아무 말이 없다.

단계로 보면 가장 슬픈 사랑의 결말 부분이겠지.

왼쪽 어깨에서 파리 한 마리가 오른 쪽 어깨로 옮겨 다니는데 가만히 불가에 앉은 엘리오의 눈에 천천히 물이 차오른다.

수프얀 스티븐스의 노래 Visions of Gideon이 속삭임처럼 흐른다.

 

< IS it a video >

 

I have loved you for the last time. Is it a video? Is it a video?

I have touched for the last time. Is it a video? Is it a video?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는 올리버의 말이 ‘이게 그저 기억일 뿐인가요?’를 읊조리는 노래가 혼잣말처럼 4분여.

기억해 너의 전부를 잇는 First time과 Last time을 흘러간다.

 

두 사람의 여름날이 고스란히 엘리오의 눈 속에 흘러간다.

두 대의 자전거.

잘 익은 복숭아, 노란 살구주스, 얌전한 반숙달걀, 다윗의 별 목걸이, 프락시텔레스 청동의 조각상, 모네의 언덕 호수, 검은 밤 나무들, 공주와 기사의 이야기<엡타메롱>, 숲속에서 치는 기타, 부조니와 바흐의 피아노 연주, 바람에 흩날리던 종이공책, 커다란 하늘색 셔츠와 수영복 반바지.

F. R DAVID. WORDS. 베르가모 폭포, 올리버가 타고 떠난 기차.

헤라클리투스의 우주의 파편, 펄벅Pearl S. buck의 Dragon Seed.

우리나라 번역본 <용의 자손>.

엘리오가 입고 있던 티셔츠의 토킹헤즈Talking Heads.

하얀 오버탑 캔버스화를 신고 올리버가 춤출 때 흘러나오는 사이키델릭 퍼스의 Love my way, 그 시절 풍미했던 영화 <플래시댄스>에서 나왔던 Lady Lady Lady, F. R. David ‘Words’ 속 가사 ‘워즈, 돈 컴 이지 투 미.’

1983년, 이탈리아 북부 어딘가.

이름을 바꿔 부르던 엘리오와 올리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