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그림책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읽었으나, 어느 순간부터 그림책이 오히려 나에게 더 유익하고 위로가 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어른이 된 요즘도 그림책을 자주 사는 편이다. 미술관에서 보는 그림들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그림책들. 그 안에 많은 인생이야기들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오늘 얘기하고 싶은 책은 ‘조나단 빈’이 쓰고, 그린 ‘한밤중에’다.

 

<한밤중에/조나단 빈 지음/ 엄혜숙 옮김/ 고래이야기>

 

책 표지는 뒷면과 앞면이 하나로 펼쳐진 그림이다. 해질 무렵의 어떤 집 옥상의 정경이 푸른빛으로 채워져 있다. 뒤편에 있는 집들 창문에는 하나 둘 불이 켜지고, 강렬한 빛을 잃은 해는 중턱에 있고 엄마는 빨랫줄 앞에 테이블보 같은 걸 들고 서 있다. 딸은 물 조리개로 화초에 물을 주고, 검은 고양이는 우아한 자세로 그걸 지켜보고 있다.

“자연은 한순간도 우리를 품지 않은 적이 없고, 부모는 한순간도 아이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 라는 글도 적혀있다. 아마 책을 살 사람들에게 이 책에 대한 정보를 주기 위한 문구라 짐작이 된다. 이 글귀는 우리나라 출판사에서 적어 놓은 것인지, 원작에 그런 문구가 있어서 번역해 놓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과 좀 다른 시각으로 이 책을 보게 된다.

 

 

책 뒷부분에 드넓은 하늘을 바라보다 잠드는 딸과 그것을 뒤에서 지켜보다가 딸 곁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엄마의 모습이 그려져 있기는 하다. 그래서 대자연과 부모의 사랑을 연결시켜 생각했을까?

그러나 내 눈에는 가족들이 모두 잠든 후에도 잠이 안 와서 뒤척이다가 창밖에서 살랑이며 들어오는 바람을 느끼는 어린 소녀의 감성, 가족 모두가 방문을 살짝 열어놓고 잠을 자고, 깊이 잠들었다가도 딸이 깨어 옥상으로 올라가는 걸 알아차리는 엄마, 그럼에도 아무런 제재를 안 하는 것으로 딸의 행동을 지지해주고, 행여나 딸이 덮고 있는 이불이 떨어질까 한 손으로 누르고 있는 모습... 그런 소소한 것들이 아름답고 귀하게 보인다.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작은 몸짓, 작은 흔적들! 작가는 말하지 않으면서도 귀한 것들을 놓치지 않고 엄마와 딸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표현했다.

 

지난 4월 초, 딸이 결혼식을 준비하며 주례 없는 결혼이니 양가 부모님의 덕담을 들려달라고 했다. 나는 결혼식에 가면 주례사를 귀 기울여 들으려고 애쓰는 편이지만, 잘 들리지 않거나 너무 비슷한 얘기들을 장황하게 늘어놓아서 맘에 와 닿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에 잘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사위와 딸에게 어떤 말을 해주는 게 좋을지, 하객들을 지루하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고민을 하다가 짧은 편지형식으로 글을 써 보고, 결혼식 날 내 차례가 됐을 때 나는 이렇게 얘기했다.

 


1992년 3월에 태어난 다은이가 어느 새 이렇게 어른이 되어 결혼을 하는구나!

새까만 머리에 까만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첫 모습이 아련하다. 우는 목소리가 크고, 밤잠이 없어서 엄마를 힘들게도 했지만 우리에게 준 기쁨의 순간들이 더 많았지.

여섯 살 무렵, 나중에 커서 화가가 될 거라고 하는 다은이에게 아빠가 그리고 또 뭐가 되고 싶냐고 자꾸 물었더니, ‘나중에 커서 술집 아줌마 할까?’ 해서 우리를 놀라게 했어. 왜 그런 생각을 했냐고 물었더니 ‘아빠가 술을 좋아하니까.’ 라고 대답했지.

아마도 아빠가 원하는 대답이 그런 거라고 생각했나봐. *^ ^*

어느 날은 유치원에 싸갔던 도시락이 깨끗하게 설거지가 되어있어서 ‘누가 도시락을 씻었나?’ 고개를 갸웃거리니 다은이가 “식탁의자를 싱크대 앞에 놓고 내가 했어!”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더라.

야무진 우리 딸, 다은이!

듬직하고 유쾌한 우리 사위 명선이도 어린 시절 수많은 이야기 거리를 만들며 자라왔을 거야.

이제부터는 둘이서 만들어 내는 이야기들이 무궁무진해지겠지?

내가 생각하는 행복이란 ‘커다란 것에서 비롯되는 것보다 마치 티끌처럼 아주 작아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속눈썹 위에 올라앉아 있어 작아도 느낄 수는 있는 그런 사소함’에서 오는 거라고 생각한단다.

명선이와 다은이가 지금처럼 늘 서로에게 기쁨이 되는, 그래서 작은 행복들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부부이기를 바란다.

명선아, 다은아!

너희들의 앞날이 건강하고 튼실하기를 늘 기원할게.

결혼 축하해~~~!


 

목표했던 큰일을 이루게 되면 하늘을 날 것처럼 기쁠지도 모르겠다. 근사한 집을 갖게 되면 으쓱해지고, 자식들이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을 갖게 되면 자랑스러울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커다란 것만을 추구하다보면 욕심은 끝이 없고, 허망함도 같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또 누구나 어려움 없이 가는 인생은 없다. 그럴 때,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작은 행복들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의 힘이 있다면 어려움을 이겨내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책을 여러 사람에게 보여줘 봤다. 어른들은 ‘우리 애도 이런 감성이 있으면 좋겠어.’라고 말하고, 아이들은 ‘우리 엄만 절대 이렇게 안 해요.’하고 말한다. 어른들은 끊임없이 자신이 알고 있는 빠른 길을 아이에게 알려주려 애쓰고, 기다려주는 걸 어려워하고, 깨끗해야만 좋다고 여긴다. 그러니 아이들은 옆, 뒤를 볼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이 어른들이 가르쳐 준 코앞만 보며 가고 있다. 아이들이 작은 것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의 힘, 감성을 키울 수 있도록 어른들은 이 그림책의 엄마처럼 말없이 지켜봐 줘야 한다. 내 딸도 이런 엄마가 되기를 바란다.

 

 

이 그림책 마지막 장면은 엄마의 작은 행복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늘 빨래를 하고, 아이들을 돌보던 엄마가 오롯이 자신만의 시간을 즐기고 있다. 자신도 별을 보며 꿈꾸던 어린 시절이 있었을 텐데, 이제는 엄마가 되어 잊고 있던 것들을 살랑바람 따라 옥상에 올라가 잠이 든 딸 덕분에 엄마는 행복한 시간을 얻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림 속의 엄마와 딸의 이런 모습은 나까지도 행복한 기분에 젖게 해준다.

 

 

 

덧붙이는 말- 검푸른 하늘 아래 화초들과 담장이 보이는 옥상에서 따뜻한 이불을 덮고 자는 소녀의 행복한 모습이 예뻐서 파스텔로 따라 그려보았다. 그런데 이 그림책은 안타깝게도 절판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