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에서는 영화 목록을 전하기 보다는 ‘나의 말’을 지나치게 많이 했다. 겨우 영화 세 편밖에 소개하지 못했다. 오늘은 무조건, 영화 소개에 집중하고자 한다.

 


4.< 허Her > 제작년도 2013 감독 스파이크 존즈 출연 호아킨 피닉스, 스칼렛 요한슨(목소리 출연)


 

이미지 출처 : 다음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80976

 

요즘, 출퇴근길에서 시민들을 바라보노라면, 이 영화의 한 장면이 그대로 실사로 구현된 듯하다. 대도시 속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 그들은 각자 따로 말하며 걷는다. 이어폰을 낀 채, 이어폰 너머의 누군가와 이야기 나누느라 바쁘다. 영화 “her” 속 대중은 단순한 통화가 아니라 인공지능 운영시스템과 통화한다. 연인, 친구, 가족 누구든 고객 맞춤형으로 설정된 상태로. ‘그래, 얼마든지 그럴 수 있어’라며 공감하다가도 왠지 모를 허전함 같은 것이 밀려든다. 눈 앞에 있는 실제 사람과는 이룰 수 없는 이상적 사랑의 관계를 컴퓨터와 나눈다. 대단히 경제적이고 덜 소모적일 수 있다. 인간관계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생각하면 차라리 인공지능과 사귀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정말...그럴까?

다른 사람들의 편지를 써주는 대필 작가 ‘테오도르’는 타인들 사이에서 그들의 마음을 전해주는 메신저로 일한다. 정작 자신은 아내와 별거 중인 채 외로운 일상을 견디는 중인데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는 인공지능 운영체제 ‘사만다’를 만나게 된다. 사람과 다르게, ‘나의 말에 무조건 응답하고 귀기울여주고 공감을 표현해주고 이해해주는’ 사만다로 인해 점차 행복을 되찾는 테오도르. 그는 어느새 ‘그녀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사만다 역시 테오도르에게 뜨겁게 화답해주면서 둘(?)은 어디든 동행한다. 같이 춤도 추고 외식도 하고 사랑도 나눈다. 하지만 사만다가 자체적으로 진화하고 확장되면서 테오도르를 대하는 태도에도 변화가 오는데...

관람 포인트 하나, 주연 배우 호아킨 피닉스의 힘 뺀 편안한 연기. 그는 20대에 요절한 후 ‘불멸의 꽃미남’으로 추앙받는 배우 리버 피닉스의 동생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젠 대배우 반열에 올라섰다. 영화 “글래디에이터” 속 치명적 매력의 코모두스를 지나, 2019년 “조커”로 연기의 신이라 불리고 있다. 포인트 둘, 테오도르를 사로잡은 그녀의 목소리. 스칼렛 요한슨은 목소리 연기도 역시! 스칼렛 요한슨답다.

 


5.<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Fried Green Tomatoes > 제작년도 1992 등급 15세이상 감독 존 애브넛 출연 캐시 베이츠, 메리 스튜어트 매스터슨


 
이미지 출처 : 다음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1304
 

1992년에 태어난 영화라고? 까마득하다, 먼지 뿌옇게 내려앉았을 것 같다. 그런데 놀라지 말자. 2019년에도 여전히 재미와 감동을 선사해줄 수 있는 ‘살아있는’ 영화다. 아, 여성주의 범주의 영화를 거론할 때면 빠지지 않는 작품이기도 하다.

케시 베이츠가 연기한 에블린, 낯설지 않다. 자신의 말을 무시하는 남편과 양로원에 계신 숙모를 뒷바라지하며 살아가는 중년의 여인네다. 일상은 지겹도록 반복적이다. 망가진 몸매는 다이어트를 부르지만 그도 만만치 않다. 공감백배다. 에블린처럼, 거울 속 퉁퉁한 아줌마를 발견하곤 경악하지만 다이어트는 관념 속에서만 과격해지고 일상에선 계속 먹고 또 먹게 되는 악순환을 익히 알고 있다. 아무튼, 어느날 양로원을 찾아간 에블린은 80세의 할머니 니니를 만나고, 그가 들려주는 앨라배마주의 ‘휘슬 스탑’이라는 카페 이야기에 귀기울인다. 50년 전 남부 어디쯤. 선머슴 같은 ‘잇지’는 죽은 오빠가 사랑했던 여인 ‘루스’와 친구가 된다. 루스가 결혼하고도 둘은 계속 깊은 우정을 이어가는데, 알고보니 루스는 남편의 폭력 속에 고통당했다. 잇지는 그 지옥에서 루스를 데리고 나온다. 두 사람은 토마토 튀김을 특별 메뉴로 하는 카페 휘슬스탑을 운영하며 행복하게 지내는데...

잇지와 루스는 서로를 보완해준다. 어느 한 쪽이 다른 쪽보다 우월하거나 특별하지 않다. 서로 다를 뿐이다. 그 다름이 오히려 두 사람을 강하게 연결시켜준다. 나이차, 성격차, 환경차를 뛰어넘는 사랑! 그녀들이 누린 우정의 힘이다. 그 사랑은 죽음 같은 두려움도 극복하게 해주고, 밟히고 당하는 착한 사람들이 서로를 더 믿고 돕도록 하고, 함께 빚어낸 엄청난 비밀을 끝까지 지켜준다. 이제 50년이 지난 양로원에서, 그 이야기를 전해듣는 에블린의 심장을 깨우고 자기자신을 사랑하도록 일깨워준다.

관람 포인트 하나, 잇지와 루스 그리고 그 친구들이 오랫동안 지켜온 엄청난 비밀이 뭔지 추측해가는 재미. 포인트 둘, 이 영화로 혜성같이 등장한 케시 베이츠의 매력. 맑고 생기 넘치고 귀엽고 사랑스럽고...또 뭐가 있지?

 


6.< 패왕별희Farewell My Concubine, 覇王別姬 > 제작년도 1993 상영시간 171분 감독 첸 카이거 출연 장국영, 장풍의, 공리


 
이미지 출처 : 다음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2674
 

종로 5가에 ‘연강홀’이라는 극장이 있었다. 나는 그곳을 아주 특별하게, 좋은 쪽으로 특별하게 기억한다. 전적으로, 영화 “패왕별희”를 그곳에서 관람한 덕분이다. 이 영화가 개봉된 덕분에, ‘중국의 제5세대 감독’이니 ‘첸 카이거’니 하는 중국 감독들이 우리나라 영화팬들 사이에서 화제의 중심에 섰었다. 물론 중국식 전통 오페라인 ‘경극’도 접할 수 있었다. 남자 배우들로만 진행된다는 경극에서 “아이야아~~~”하는 얇게 휘감겼다 늘어났다 하는 소프라노 소리가 계속된다. 사람이 내는 건지 악기가 내는 건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가늘고 인공적인 느낌의 소리다. 아, ‘패왕별희’는 이 영화 이전에 경극으로 유명한 극이었다. 서초패왕으로 불린 항우가 패전하고 애인 우희도 잃는 비극적 이야기다. 영화 속에서 배우들이 경극 ‘패왕별희’를 공연하는 동시에, 영화 전체가 ‘패왕별희’ 이야기를 구현해내는 이중 구조를 갖는다.

상영시간이 무려 171분에 달하는 이 이야기는, 경극학교에 발을 들인 어린 두지(장국영)의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여섯 손가락을 가진 두지는 학교 입학을 거부당한다. 그때 두지의 어미는 아들의 손가락 하나를 빛의 속도로 잘라버린다.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경극학교에서 살게 되지만 미소년 두지에겐 여자 역이 주어진다. 그것을 거부하자 두지는 곤경에 처한다. 그때 시투가 기지를 발휘해서 위기를 넘기고, 두지는 경극 속 여자역할과 시투를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두 아이는 피나는 노력 끝에 대중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최고의 경극배우, 데이와 살로가 된다. 그런데 두지가 현실에서도 ‘우희’로 살면서 시투를 사랑하게 되는데, 시투는 홍등가 여인 쥬산과 결혼을 한다. 세 사람의 관계는 롤러코스터 타듯 요동친다. 그에 더해, 중국의 문화대혁명이 일반 대중과 예술인들을 어떻게 할퀴고 지나갔는지 그 파란만장한 속내가 그려지는데...

관람 포인트 하나, 장국영! 영화 “아비정전”에서 속옷 차림으로 맘보춤을 추는 장국영도 인상깊지만, “패왕별희”의 비극적 결말을 드러내는데 장국영보다 더 완벽한 캐스팅은 없다고 단언할 정도로 강렬하다. 그런데 한국이나 중국이나, 여배우보다 더 곱고 어여쁜 남배우가 큰 인기를 얻는 이유가 뭘까? “왕의 남자” 속 이준기 배우를 봐도 그렇다. 여성관객의 심장을 훔치는 건 상남자의 포스보다는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키는 꽃미남의 슬픈 눈동자인가 보다. 포인트 둘, 문화대혁명이 한 개인의 삶을 어떻게 관통했는지 리얼하게 그려진다.

 

7.< 천국의 아이들 > 제작년도 1997 제작국가 이란 감독 마지디 마지드 출연 레자 나지,아미르 파로크 하스미얀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2744

 

이 세상의 척박한 현실을 견디고 넘어서게 해주는 건 남녀 간의 불타는 사랑만이 아니다. ‘핏줄’로 맺어진 특별한 관계, 즉 가족 간의 사랑도 있다. 물론 어머니와 자녀들 사이에선 무수한 사례들이 나올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어린 오누이가 있다. 어린 오빠와 더 어린 여동생이 이란의 어느 가난한 동네 속 더 가난한 가정에서 살아간다. 남매의 해맑고 가슴절절한 사랑이야기는, 엄마의 심부름을 간 오빠 알리가 그만 방금 수선받은 여동생 자라의 하나뿐인 구두를 잃어버리는데서 시작된다. 둘 다 초등학교에 다니는데, 자라는 오전 반, 알리는 오후 반이다. 운동화 한 켤례를 번갈아 같이 신게 된 남매는 부모한테 들키지 않고 또 학교에 지각하지 않기 위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좁다란 골목들을 전력질주하며 아슬아슬한 달리기를 이어나간다. 그런데 알고 보니, 어린이마라톤대회 3등 상품이 바로 운동화였다. 알리는 동생에게 새 운동화를 가져다주겠다고 약속하고는 대회에 참가한다. 세상에, 대회에 참가한다면 누구라도 1등을 하고 싶을텐데, 알리는 반드시 3등을 해야한다고?

관람 포인트 하나, 영화 “천국이 아이들”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이란 영화일 수 있다. 내 주변에서도 이 영화만큼은 많이들 만나본 것 같다. 한국인들이 유독 좋아하는 이유가 뭘까? 생각하며 보는 재미. 포인트 둘, 이란의 서민들이 어떤 집에서 어떤 방식으로 일상 생활을 영위하는지 알 수 있다. 포인트 셋, 영화 끄트머리에서 물고기들이 등장한다. 물고기들과 오누이가 만나는 장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대 맘대로 해석하기.

 

8.< 바그다드 카페 >★★★★★  제작년도 1987 제작국가 서독 감독 퍼시 애들론 출연 마리안 제게브리히트, C.C.파운더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6576
 

오호! 은영표 별 다섯의 위엄! 꼭 보라고 추천해주면, 열 명 중 아홉 명은 ‘참 좋은 영화 소개해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해온다.

‘황량한 사막’보다 더 잘 어울리는 문구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정말, 황량한 사막이 펼쳐진 곳. 뜨거운 태양빛 아래서, 아지랑이 속에 흐물거리는 도로 위로 먼지바람만 가득한 곳에 카페 바그다드가 있다. 카페라 하기엔 없는 것 투성이다. 커피 머신은 고장난 상태, 아이들은 카페 일은 돕지않고, 무능하고 게으른 남편은 쫓아내서 없고, 찾아오는 손님도 별로 없다. 반면에, 있는 것도 좀 있다. 카페 주인장 브렌다의 한숨과 고단함이 쌓이고 쌓여 카페 전체가 거대한 무덤 같다.

그런데 어느날, 새하얀 얼굴에 앞뒤통통한 여인 야스민이 나타난다. 남편과 여행 중이었는데 남편은 야스민을 차 밖에 내려놓더니 휙 가버린 것이다. 브렌다와 야스민은 삶의 질곡 최악점에서 만났다. 언어도 다른 두 사람의 어색하고 불편한 동거가 시작된다. 하지만 야스민이 브렌다의 삶에 조금씩 녹아들어가면서 기적이 일어난다. 브렌다와 아이들의 눈빛과 목소리가 변하더니 생활 방식도 바뀐다. 카페가 점점 깨끗해지고 분위기는 살아난다. 가끔씩 오가던 트럭운전사들이 소문을 내니, 많은 트럭들이 카페 바그다드 앞으로 찾아온다. 카페는 찾아온 이들의 웃음과 환호성과 따뜻한 표정, 생기넘치는 목소리들로 채워지는데...

관람 포인트 하나, 영화음악의 바이블이라고 하는 하는 “Calling You!”. 제베타 스틸Jevetta steele이 부른 이 주제가는 들어도 들어도 또 듣고싶어진다. 포인트 둘, 브로맨스가 뭐야? 우리에겐 워맨스가 있다! 남들 눈에는 그저 아줌마들일 뿐이다. 뚱뚱한 백인이든지 메마른 흑인이든지, 기존 영화에서는 매력적으로 그리지 않던 존재들이다. 그런 두 여성이 일상 재창조자로서 매력을 발산한다. 포인트 셋, 카페 마당 끄트머리에 살고 있는 화가 아저씨가 그려내는 그림들, 그리고 그와 야스민이 맑고 곱게 썸을 타가는 장면들. 포인트 넷, 야스민과 브렌다가 보여주는 퍼포먼스들 속의 노래들. 포인트 다섯,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 선명한 색채감.

가만... 관람 포인트를 계속 써내려가는 걸 보니, 난 이 영화에 별 다섯을 줄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