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세상 모든 곳에 갈 수 없어 ‘엄마’라는 사람을 아기들에게 보낸 거라는 말.

엄마라는 존재를 숭앙하고 찬양할 때 금과옥조로 쓰이는 이 말은 엄마라고 불리는 인간이 가진 사랑의 크기와 힘이 신처럼 완벽하고 강하(기를 원하고)다는 뜻일 것이다. 엄마가 천둥벌거숭이 같은 상태로 세상에 던져진 이 ‘나’를 신처럼 자애롭게, 너그럽게, 완벽하게 보살펴주기를, 그런 존재가 되어 주길 간절하게 원하는 욕망에 찬 문장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저울의 한쪽 편에 세계를 실어 놓고 다른 한쪽 편에 어머니를 올려놓으면 세계의 편이 훨씬 가벼울 것이라는 문장도 있다. 이런 것들을 보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엄마란 존재’는 가히 신과 다름없고 엄마가 품은 사랑의 무게는 세계와 맞먹는 무소불위의 존재가 된다.

나는 언젠가부터 그런 무쇠팔 무쇠다리, 초능력을 품은 엄마 타령의 말들이 별로 좋지 않았던 것 같다. 그토록 훌륭한 엄마를 가져보지 못한 탓일 수도 있지만 저 높고 깊은 말들을 앞세우며 엄마 운운하는 징징거림과 찬양, 고무하는 사람들이 거의 다 생물학적으로 남성들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것은 같아도 여자들의 엄마타령과 남자들의 엄마타령은 달라도 아주 달라 하늘과 땅처럼 거리가 멀고 감정이 다르다.

여자들은 어쨌든 엄마가 될 수 있는 확률이 있으므로 엄마를 그 위대한 신의 자리로 격상시켜 놓은 후 ‘부려먹으려는’ 모든 의도를 꿰뚫어보고 지레 탐탁지 않았을 수도 있으리라. 남자들은 절대 엄마가 되지는 않을 테니 평생 여자인 엄마에게 사랑만 받기를 원하고 신처럼 위대하기를 바랐을 수도, 종처럼 여길 수도 있으리라.

아무튼 나는 언젠가 마음 깨닫기 명상프로젝트 중에서 가장 미운 사람을 생각하고 마음껏 분노하라는 ‘화의 장’ 프로그램을 하던 중에 커다랗고 두꺼운 나무인형을 내 엄마라 생각하고 두드려댔던 이력이 있다. 나무인형을 때리면서 엄마, 왜 그랬어? 나한테 왜 그랬어? 울부짖고 있을 때 내 모습을 보고 놀라서 충격에 빠졌던 옆 사람의 표정조차 아직 생생하다. 난리굿판 같은 분노의 마당이 끝난 후 마지막 의식은 가장 미워한 사람의 이름을 붙였던 그 나무인형을 껴안아주고 용서하면서 하얀 종이로 싸주어 장례식을 해주는 것이었다.

그렇다 해도.

 

신에게 위로받듯이 저 살아보겠다고 그저 평범한 존재일 뿐인 엄마를 신의 자리로 밀어 넣지 말라는 말은 지금도 하고 싶다. 아버지들이 들풀처럼 가볍게 남자에서 아버지가 되었듯이 엄마들도 그저 들꽃처럼 엄마가 되었을 뿐이니까. 여자는 다만, 아기를 낳을 수 있는 몸이기 때문에 가죽부대처럼 아기를 담았다가 풀어놓았을 뿐일 수도 있다. 그게 목숨을 걸 정도로 힘든 일이긴 하지만. 사실 다들 짐짓 모르는 척 하는 것일 수 있겠지만 엄마라는 사람은 가장 잔혹하고 무자비할 수도 있다.

각설하고. 보통의 영화에서 엄마들은 모성 찬양의 대상이거나 이에 부응하지 못했던 자식들의 회한의 정서로 출현하기 때문에 나쁜 엄마를 찾기가 쉽지는 않다. 드물게 무도하고 잔혹한 엄마들 중에 갑 오브 갑, 가장 끔찍하고 무자비한 엄마는, 영화 <밀리언달러 베이비>에서 볼 수 있다. 자식의 생사여탈권을 가진 엄마라는 권력을 가장 몰인정하게 소비하는 사람, 복싱선수인 여주인공 매기의 엄마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 가장 소중한 것을 뜻하는 말 <이미지 출처 : imdb>

 

서른 살 먹은 여자복서 매기는 가난한 웨이트리스, 손님이 남긴 음식을 가져와 끼니를 때우고 좁은 집에서 극한의 내핍생활을 한다. 매기는 존재 자체가 외로움 덩어리다. 외로움의 힘으로 복싱을 배우려고 한다. 정서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는 매기에게 가족은 차라리 없는 게 낫다. 고아라면 어쩌면 관계의 괴로움이 덜 했으리라.

나이 많은 프랭크는 낡은 복싱 체육관을 운영하고 있다. 돈과 명예에 관심이 없는 그는 챔피언을 키우는 코치기도 하지만 ‘상처전문가’로 불린다. 세상에. 직업이 상처전문가라니. 가장 훌륭한 지혈사라고도 불린다.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가장 빨리 가장 완벽하게 멈출 수 있는 사람. 오랜 친구는 “프랭크는 불가능할 것 같을 때도 지혈을 했지.”라며 무한 신뢰를 보낸다. 상처전문가인 프랭크에게는 그러나 치료가 불가능한 상처가 있다. 딸, 자식이라는 상처. 용서받을 수 없는 무슨 큰 죄를 저질렀는지 알 수 없지만 딸은 만나주지 않는다. 편지는 반송되어온다. 지혈사에 상처전문가라는 게 참으로 무색한 일이다. 자신의 상처를 치료할 수 없고 자기에게 흐르는 피는 그치게 할 수 없는 그는 고대 게일어로 예이츠의 시를 읽는 속 깊은 남자이기도 한데. 그런 두 사람이 피도 돈도 아닌 관계를 맺는다.

 

상처전문가, 완벽한 지혈사 프랭크는 자기 상처를 치료하진 못하지만 매기의 상처와 죽음의 길까지 치료해준다. <이미지 출처 : imdb>

 

복싱트레이너인 프랭크는 매기를 프로 선수로 받아 복싱을 가르치며 오버앤오버앤오버앤오버어게인, 뼛속에 박혀 본능이 될 때까지 잊지 말라고 ‘올웨이스 킵 마이셀프, 올웨이스 프로텍트 마이셀프’를 각인시킨다. 제발, 항상 자신을 보호해라. 드디어 훌륭한 파이터가 된 매기는 권투선수로 돈을 벌자마자 아무래도 그리운 존재라는 듯 엄마와 가족을 찾아간다. 거기, 그 엄마! 매기의 엄마는 딸이 프로복싱선수가 되고 돈을 벌어 집을 사줬는데도 도대체 딸 자체를 반가워하지 않는다.

“남자나 잡아, 여자답게 살아. 파이터라고? 전혀 자랑스럽지 않구나. 집을 샀다고? 그러면 내가 연금을 못 받는다고! 나는 집이 있으면 안 된다고! 차라리 돈으로 주지, 쓸데없는 짓을 했구나.”

 

나의 모슈쿠라. 내 사랑, 내 혈육. 매기는 엄마 대신 생면부지 프랭크의 다정함으로 피흘리기를 멈추고 파이터로 성공한다. <이미지 출처 : imdb>

 

엄마는 시종여일하게 가혹하고 냉정한 말을 딸에게 내뱉는다. 남이라도 그렇게는 못할 만큼. 매기는 냉정하고 포악한 엄마와 여동생, 오빠를 둔 쓸쓸함을 안은 채, 아직 뜻을 알 수 없는 글자 모큐슈라를 새긴 진짜 실크망토를 입고 챔피언 결승전에 출전한다. 초록빛 실크 망토는 프랭크가 선물한 것이다. 게일로로 쓴 글자 모큐슈라를 벗고 싸우고 넘어지고 그리고 암전, 상대선수의 반칙으로 승리의 목전에서 쓰러진다. 매기는 목 아래로 전신마비의 몸이 돈다. 다리를 잘라도 아무 감각을 느낄 수 없는, 죽는 것보다 더한 몸이 되어버린다.

 

프랭크. 저는 평생 이렇게 누워 있어야 한대요.

손을 내리지 말았어야 했어요. 몸을 돌리지 말았어야 했어.

항상 자신을 보호하라 했는데. 나한텐 프랭크밖에 없어요(I got nobody but you).

그래도 원 없이 싸우고 이겼어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나도 너밖에 없어(oh, you’ ve got me).

 

나는 프랭크밖에 없어요. 나도 너밖에 없어<이미지 출처 : imdb>

 

매기는 고개 한 번 자의로 움직이지 못하면서 이제 그만 이 생을 떠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어떻게 해도 죽을 수 있는 길이 없다. 썩은 다리를 잘라내도 감각이 없고 아무리 죽게 해달라고해도 들어주는 이가 없다. 죽을 방법이라곤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혀를 깨물고 죽는 수밖에 없어 혀를 깨물어 피범벅이 되어도 의료진이 숨이 붙어있게 만들어버린다.

<밀리언달러 베이비>는 누군가 정말 죽기를 원할 때, 가장 사랑하는 자만이 그 사람을 죽게 해준다는 생과 사의 역설을 보여주는 영화다. 의식이 있는 사람이 원한다고 해서 죽여주는, 죽을 수 있게 하는 ‘존엄사’는 아직까지 불법이니까. 존엄사는 자살과는 다르다. 존엄사는 죽고 싶어도 죽을 방법도 갖지 못한 사람이 인도적으로 존엄하게 죽을 수 있게 돕는 것이다. 그래서 존엄사는 한 쪽 면으로 보면 조력자살이고 다른 면에서는 살인이 된다. 존엄사는 불법인 곳이 많으므로 사랑하지 않으면 살인의 누명을 쓰면서까지, 또는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을 뒤집어쓰면서까지 죽여주지 않는다. 정말 사랑해야만 죽여준다.

이 영화에선 매기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피 한 방울 안 섞인 복싱 트레이너 프랭크다. 매기를 가장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피로 엉킨 바로 그 엄마다. 엄마는 사랑하지 않으니까 딸이 죽거나 말거나 죽지 못해 살거나 죽고 싶어 혀를 깨물어 피투성이가 되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 엄마는 매기가 살고 싶어 할 때 잘 보살피지 않고 죽고 싶어 할 때 죽여주지 않는다.

 

혀밖에 못 움직이는 전신마비 딸 매기에게 엄마는 재산을 갖기 위해 입에 볼펜을 물리며 사인을 강요한다.<이미지 출처 : imdb>

 

모정이라곤 쥐뿔도 없는 그 엄마 같지도 않은 엄마는 사지마비가 된 딸을 보고도 일말의 슬픔이 없다. 라스베이거스에 누워있는 딸의 병실로 찾아올 때도 라이베이거스가 환락의 도시여서 관광할 수 있어서 반색할 정도인 엄마다. 반짝반짝 알록달록 놀이옷을 입고 병실로 찾아와 엄마라는 사람은, 딸의 재산에 사인을 강요하며 볼펜을 입에 쑤시듯 들이민다.

사람이 사람인 것이, 엄마란 것이 참혹하고 환멸스럽다.

 

셰퍼드가 있었어요. 이름이 액슬. 액슬이 늙고 아팠을 때 아빠가 액슬을 데리고 나갔어요. 아빠는 돌아왔지만 액슬은 돌아오지 않았어요. 지금은 둘 다 하늘에 있어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프랭크. 아빠가 액슬에게 해 줬던 걸 제게 해주실래요? 난 세상을 봤어요. 사람들이 내 이름을 불렀죠, 내 이름이 아닌 당신이 지어준 그 이름, 모큐슈라로. 난 세상을 싸웠고, 모든 것을 얻었어요. 그러니 부탁해요. 나에게 아빠가 개한테 해줬던 걸 해줘요.

 

자신을 보호하지 못했던 매기. 동물에게도 해주는 존엄사를 내게 해줘요.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라며 이니스프리로 떠났을 수도. <이미지 출처 : imdb>

 

매기는 아빠가 액슬에게 해줬던 안락한 죽음을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서 죽기 위해 모든 힘을 쏟는다. 간절하게 세상을 그만 떠나기를 원한다.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입 안의 혀 뿐. 프랭크는 상처전문가답게 마음의 결정을 내린다. 매기를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사람은 오로지 자기밖에 없으니까. 매기의 가족은 살았을 때 보살피지 않았듯이 죽여주지도 않으니까.

프랭크가 어둠속에서 매기를 죽여주기를 결정하고 의료가방 속에 챙겨온 주사기와 주섬주섬 주사기와 약병을 꺼낸다. 음영 짙은 얼굴로 매기 아버지가 매기의 개 액슬에게 해준 것을 해 준다. 누구나 한 번은 진다고, 누구나 한번은 죽는다면서.

 

사랑하니까, 사랑하므로 이기게 하고 저 피안의 세상으로 떠나게도 만든다. <이미지 출처 : imdb>

 

이제 너는 계속 자면 돼. 주사도 내가 놔줄게. 모큐슈라Mo cuishle, 내 사랑, 내 혈육이란 뜻이야. (Mo Cuishla means my darling, my blood.)

프랭크가 매기에게 주사를 놔줬다. 다시는 깨지 않도록 충분한 양을. 또다시 그 괴로움을 겪게 할 수는 없으니까. 프랭크는 상처전문가니까. 피를 나눈 딸에게선 소식도 없지만, 그 딸과는 혈육이지만 편지에 답장 한 번 없으니까. 내 사랑 내 혈육 같은 매기는 그렇게 자면서 세상을 떠났다. 진짜 혈육에게는 참혹하게 버림받고 마침내 존엄하게, 죽여주는 사랑의 손길로.

사랑하니까, 보내준다는 그 말. 사랑하는 자만이 사랑하는 사람을 죽여준다는 것을 통렬하게 깨닫게 해주고 고대 게일어로 예이츠의 시를 읽던 프랭크는 그 다음 어디로 갔을까. 매기랑 같이 갔던 최고의 레몬파이 집, 깡통에 든 거 말고 진짜 집에서 만든 레몬파이를 팔던 집에 언제까지 혼자 앉아 있을까. 어쩌면, 그곳, 예이츠의 시를 다 읽었으니, 거기 이니스프리의 호수The Lake Isle of Innisfree로 혼자 떠났을지도. 매기의 엄마는?

 

나 이제 일어나 이제 가리 이니스프리로 가리.

나 이제 일어나 가리라, 이니스프리로 가리라.

거기서 진흙과 가지로 작은 오두막집을 지으리라.

아홉 이랑 콩밭을 일구고 꿀벌 집을 지으리라.

그리고 벌이 웅웅 대는 숲에서 홀로 살리라.

그리하여 거기서 평화롭게 살리라, 평화는 천천히 방울지듯 오므로.

귀뚜라미 노래하는 곳에 아침의 베일로부터 떨어지는 평화

한밤엔 만물이 희미하게 빛나고 정오에는 보랏빛으로 빛나는 곳,

그리고 저녁엔 방울새의 날개소리로 가득한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