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나 오래 전, 내 나이 서른 살의 푸르른 시절. 나는 '운좋게도' 혹은 '무모한 도전으로', 어느 신문사에서 운영한 6개월 영화제작학교를 다녔었다. 청년 봉준호- 지금은 세계적 명감독 대열에 오른 -가 단편영화 "지리멸렬"을 들고 강의하러 왔었고, 박광수 감독("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 옆에서 술독에 빠진 나는 뭔소리도 모를 영화 이야기들을 주절거렸고, 당췌 영화 감독처럼 보이지 않던 김동빈 감독("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1995)한테서 배우들 관련 야사(?)를 듣는 재미도 누렸다. 그러나 가장 큰 희열은, 수강생들과 팀을 이뤄서, 내가 쓴 시나리오로 2주 동안 야외야간 촬영의 사투를 겪으며 토해낸 단편영화 "1502초"가 영사기를 통해 상영될 때 맛보았다. '너무 힘들어서 다신 안 한다'고 이를 갈았건만, 영사기가 '촤르르' 소릴 내면서 빛그림들이 움직이자 내 온몸은 '또 만들고 싶다'는 아우성을 외쳐댔으니까.

아무튼 비록 짧은 분량이지만 16mm 영화를 직접 만든 후, 내겐 큰 변화가 찾아왔다. 영화 한 편 만드는 작업이 얼마나 위대해 보이던지, 세상에 나온 모든 영화- ! 소리나는 나쁜 영화는 제외 -에 경의를 표하게 되었다. 그중에 대중의 사랑을 제대로 받아보지도 못하고 간판을 내린 명작들 혹은 상영관 확보가 안 돼서 어쩔 수 없이 소수의 관객들에게만 알려진 영화들에 더욱 관심이 간다. 그러다보니 지난 호에 이어 오늘도, 어쩌면 이질적인 제목들이 나열될 수 있다. 당신의 취향과 너무 달라 보인다고 글읽기를 멈추진 말길! 낯선 영화를 통해서 새로운 자극과 감동을 누리길! , 참고로 지난 호에 실린 영화들은 "아는 여자", "가족의 탄생",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삼공일 삼공이", "우리들" 이었다.

 

 

6. 《천하장사 마돈나》 2006/ 감독 이해영, 이해준/ 출연 류덕환, 백윤식, 김윤식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https://movie.naver.com/movie/bi/mi/detail.nhn?code=57805

 

천하장사와 마돈나? 전혀 다른 두 영역, 아니 거의 대척점에 서 있는 듯한 두 존재가 한 소년 안에서 만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고등학교 1학년 듬직한 소년 오동구는 영락없는 씨름판 비주얼을 가졌지만 실은 진짜 여자가 되고 말겠다는 꿈에 젖어사는, 마돈나의 정신적 후예다. 어떻게든 돈을 모아 성전환수술을 받고 싶고, 그래서 짝사랑하는 선생님 앞에 어여쁜 모습으로 서길 갈망하는 동구한테 씨름부에 들어오라는 제안이 날아든다. '거대한 상남자들 속에서 몸에 착 달라붙는 '빤쮸'만 입고 지낸다? 노노! 무섭고 끔찍하다!' 하지만 씨름대회 상금이면 수술비용을 해결할 수 있단 사실을 알게 되자 동구는 운명처럼 씨름부원으로서의 인생을 받아들인다. 2006년도나 지금이나, 눈살 찌뿌리게 할 수 있는 특이한 소재를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하고 재미나게 풀어낸 것은 전적으로 감독들의 재능이지만, 조연 구분없이 모든 출연진이 보여주는 맛깔스런 연기는 이 영화에 가슴 찡한 뭔가를 더해준다. 배우 류덕환이 표현한 동구는 눈물나도록 사랑스럽다. 나는 '동구'를 넘어서는 류덕환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 , 관람 포인트는 동구의 아버지, 즉 배우 김윤석의 풋풋한 시절을 보는 재미! 또는 고등학교 씨름부 소년들의 귀염 폭발하는 모습들! 그러나 무엇보다 성소수자의 삶을 이야기한 우리네 영화들 중 '천하장사 마돈나'만큼 유쾌상쾌한 기분을 안겨주는 영화는 없을 것이다.

 
 

7. 《족구왕》 제작년도 2013/ 감독 우문기/ 출연 안재홍, 황승언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03797
 

뻔한 건 싫다? 신선하지만 너무 낯설지는 않아야 한다? 공감은 오케이, 교훈은 사절? 현실을 진정성있게 그리되 신파는 싫다? 진지하면서도 명랑만화 분위기가 좋다? ... 까다로워 보이는 이 모든 조건들을 동시에 만족시켜줄 한국 영화가 있다, “족구왕”.

대학교 교정을 어슬렁거리는 복학생 만섭. 총장과의 대화 시간에는 족구장을 만들어달라는 소리나 해대는 비호감남이다. 스펙 없고 외모 없는 그는 딱하게도 캠퍼스 퀸 안나를 흠모한다. 하지만 그런 만섭 인생에 '해뜰 날'이 왔다. 안나가 만섭을 보며 '요즘 남자애들 같지 않다'면서 매력을 느낀 것이다. 게다가 안나의 '썸남'인 '전직 국대 축구선수'인 강민을 족구 한판으로 무릎 꿇리질 않나, 그 역사적 족구 경기의 동영상이 교내로 퍼져 단박에 '슈퍼 복학생 히어로'가 되질 않나! '족구'라는 무대 위에만 서면 만섭은 하늘을 찌르는 기상으로 빛나는 액션씬을 연기하는 최고의 배우가 된다. 그리고 이제 취업 학원 같던 캠퍼스는, 슈퍼 복학생 덕분에 족구 열풍에 휩싸이는데...

사실 족구는 공 하나와 네트 하나만 있으면 되는 놀이다. 엄청난 실력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그냥 건강한 신체와 약간의 운동감각 그리고 마음껏 즐기려는 자세만 있으면 즐겁게 어울릴 수 있다. 보통의 남자들이 선호하는 운동이란 말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네 보통의 청춘들이 족구를 하는 모습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워 보인다. 비록 그들이 감내해야하는 현실은 답답하고 거칠지만, 영화는 그들의 일상을 상큼하게 그려낸다.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닌데 거짓말처럼 경쾌하다. 그것이 바로 연출의 힘, 캐스팅의 힘이리라. 관람 포인트 하나, 영어 시간에 만섭이 프리토킹으로 좌중을 압도하는 장면을 놓치지 말 것! 포인트 둘, 지금은 어엿한 주연급으로 성장한 배우 안재홍의 진면목을 목격할 수 있음!

 

 

8. 《잉투기》 2013/ 감독 엄태화/ 출연 엄태구,류혜영, 권율, 김준배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05289
 

2000, 한국 영화계에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새로운 캐릭터가 등장했다. 류승완 감독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통해 데뷔한 배우 류승범이 바로 그였다. 형과 동생이 함께 만들어낸 신성한 조합이었다. 그리고 2013, 또 하나의 형제간 감독배우 조합이 문제작 "잉투기"를 들고 나타났다. 엄태화와 엄태구, 엄씨네 형제들이란다. 희한하게도 두 작품 모두, 형은 신인감독으로 당돌하게 내질렀고, 동생은 지독히도 비루한 청춘을 연기했다. 물론 두 작품 다 독립영화적 색채가 강하다. 참고로, '독립영화'라 함은 기존의 상업적 영화자본과 배급망에 의존하지 않고 감독 자신의 의지와 가치관을 자유롭게 펼치는 영화를 일컫는다. 그런데 독립하면 외롭고 헐벗기 쉽다. 하여, 독립영화는 상영 시간이 짧은 단편들이 그 주류를 이룬다.

아무튼, 내가 50+세대로 존재하는 이 시대엔 '잉여'라 불리는 청춘들도 존재한다. 태식이가 그렇다. 그는 기성 세대가 좋아하는 '뚜렷한 목표의식' 없이 그저 인터넷 커뮤니티 세계에서 아이디 '칡콩팥'으로 활동하며 사사건건 '젖존슨'과 맞선다. 급기야 현실세계에서 '젖존슨'에게 얻어맞는 봉변을 당한다. 일방적으로 두들겨맞는 이 '현피(현실+player kill)' 장면은 고스란히 인터넷을 통해 퍼져나간다. 치욕감에 태식은 복수하고자 친구 '희준'과 함께 격투기를 배우고, 그 세계에서 격투소녀 '영자'를 만난다. '잉여'라 불리는 세 사람이 벌이는 뜨거운(?)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랬다, 잉여들은 세상에 달려들어 격투기를 벌이고 있었다. 지금도 계속(ing) 싸우고 있다(투기). 물론 좌충우돌 세상에 머리를 들이대던 그 시절을 경험하지 못한 혹은 새까맣게 잊은 어른이라면, 이들을 보며 당혹감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진짜 이 시대의 잉여 청춘들'의 이야기를 알고 싶다면? 기존 영화와 전혀 다른 새로운 감각의 '요즘 영화'를 만나고픈 어른이라면? 이 영화를 놓치지 말 것! , 욕설이 차고 넘쳐 흐른다는 사실은 알고 보자.

 

 

9.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 2014/ 감독 안국진/ 출연 이정현, 이해영

 
 

나는 배우 이정현을 좋아한다. 24년 전, ‘씨네21’이란 영화 전문지가 주최하는 영화제에서 스태프로 자원봉사를 하던 날 시작된 애정이다. 영화 "꽃잎"의 히로인 이정현은 참혹할 정도로 작고 깡마른 체격의 소녀였다. 아마도 어떤 상의 수상자로 그가 무대에 오를 때였나 보다. 내 뒷통수 너머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쟤 완전 미친년이야!" 소리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당시 꽤나 유명세를 떨치던 남자 감독과 남자 배우들이 낄낄거리고 있었다. 그 순간의 그들은 저속하고 무례해 보였지만, 그들 덕분에 제대로 된 '미친년'을 만났구나 싶어 환희를 느꼈다. 배우 이정현이 재미없는 한국 영화계를 뒤흔들 바람이 되길 바랐다. 내 바람대로 뒤흔들긴 했는데 영화계가 아니라 가요계였다. 손가락 끝에 마이크 반지를 끼고 종이부채를 휘저으며 테크노전사가 되었다나...

아무튼, 아주 오랜만에 배우 이정현의 진가가 발휘된 영화가 나왔다. 흥행 성적은 초라했다. 그도 그럴것이, 잔혹한데 공감이 된다. 웃긴데 너무 슬프다. '이제 그만'을 외치고 싶은 관객을 끝까지 놓아주지 않는다, 진실이라는 덫에서. 그러나 영화는 재미있다. 쾌감을 맛보게 한다. 성실함을 강요하는 사회의 '힘있고 무례하고 무자비한' 자들을 응징하는, '무던히도 성실하고 열심히 살아온' 수남을 응원하는 쾌감을! 물론 아무리 응원을 해도, 수남의 삶은 참 '거시기하다'. 큰 걸 바라지도 않았는데, 그저 성실히 일한만큼의 댓가를 받을 수만 있으면 좋으련만... 손재주가 많아서 더 고생을 하는 건지, 고생을 하는 중에도 손재주 덕분에 일거리가 끊이질 않는 건지 헷갈리지만, 수남은 손재주가 보통이 아니다. 그러나 살려고 바둥거릴수록, 사고와 사건과 가난과 부당한 불행은 계속된다. 가만...그러고 보니, 내 엄지 손톱들이 가로로 길고 넓적해서 손재주가 많은 손인데?’라는 말을 자주 들어왔다. 혹시나 수남의 손톱도 나처럼?

, 영화 줄거리는 쉿! 그대가 직접 확인해주시길...

 

 

10. 단편 《지리멸렬》 1994/ 감독 봉준호/ 출연 김뢰하/ 러닝타임 30분

 
 

서른 살 청춘일 때, 나는 지금보다 열 배는 무모했다. 그에 더하여, 나 자신에 관한 주제 파악도 안 된 상태로 영화를 만들겠다고 달려들었다. 그런 과도한 패기 때문에 왠만해선 타인의 재능을 부러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리멸렬을 만든 봉준호 라는 신예 감독을 마주대했을 때, 나는 머리털이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었다, ‘이 사람, 천재 아닐까?’ 하는 의심과 함께.

이 영화는 "바퀴벌레"∙"골목 밖으로"∙"고통의 밤"∙"에필로그", 이렇게 4편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단편이다. 각 에피소드의 중심엔 당시-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한국 사회의 지도층 인사 세 남자가 자리한다. 유명 신문사의 논설위원은 아침운동을 하면서 남의 문앞에 놓여있는 우유를 습관적으로 훔쳐먹는다. 엘리트 검사는 만취해서 길가에 용변을 누려다가 경비원에게 들킨다. 대학 교수는 도색잡지를 즐겨보다 여학생에게 들킬 뻔한다. 그리고 결국 그들 세 사람은 TV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사회문제에 관한 대담을 나누면서 한 공간에 위치한다. 그들은 각기 다른 삶의 자리를 갖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놈이 그 놈'인 듯 비슷해 보인다. 스스로는 특권층이라는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고 남들도 그들의 지위와 힘을 무서워하지만, 실은 참으로 '우스운' 자들, 지리멸렬하는 자들이라고... 영화는 상당히 도발적으로, 유머스럽게 표현해낸다, 징글맞도록 잘!

 
 

2회에 걸쳐 '이대로 사라지기엔 안타까운 한국영화 띵작들' 열 편을 소개했다. 왜 하필 이 영화들이냐고? ... 이건 온전히 '나의 기준으로', 아니 '내 마음이 원하는 대로' 골라냈을 뿐임을 다시 밟힌다. 이 목록 중 어떤 작품은 누군가의 눈엔 하찮아 보일 수 있다. 또 다른 누군가에겐 거부감을 안겨줄 수도 있다. 그런들 어떠하리, 내가 정하는 나만의 리스트인걸. 다만 영화 제목 하나를 거론할 때마다 작은 바람 하나 품곤 한다. 그대의 영화 감상이 넓거나 깊거나 알록달록 다채로워지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참말로 좋겠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