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통문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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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년 전 이름 없는 여성들의 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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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년 전 1898년 9월 1일 북촌의 이름 없는 여성들이 분연히 일어나 소리를 내었다.
이른바 여권통문,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인권 선언이 선포된 것이었다.
 
여성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 누군가의 종속관계가 아닌 동등한 관계로 사람답게 살기 위한 권리로

여학교를 세워 달라는 교육권을 주장했던 여권통문 선언을 통해 과거 여성들의 삶을 기억하자는 기념행사가 북촌문화센터에서 진행되어 다녀왔다.

 

종로구 계동 길 37에 위치하는 북촌 문화센터

 

북촌문화센터는 공공한옥으로 계동마님이라 불리던 탁지부 민형기의 며느리가 1935년까지 살던 집을

2002년 서울시에서 매입 후 북촌문화센터로 운영하고 있다.

이번 행사는 여권통문, 오늘의 여성, 과거의 여성을 기억하다 전시 / 조선시대 여성교육 이야기에 대한 인문 역사 강연 /

한옥 속 여성의 삶과 지위를 살펴보는 인문, 건축 강연 / 북촌여성들의 흔적을 따라가는 여행길 프로그램으로 진행되었는데  
시간이 겹쳐 여권통문 전시회를 둘러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여권 통문을 아시나요?

 

 

여권통문 내용을 읽다 보니 내용이 ‘참 직설적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나 여건이

특히 여성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참아야 하고 더구나 밖으로 선포를 한다는 것은 감히 엄두가 나지 않았을 텐데 

이런 강직함과 용기가 있었다니 존경심마저 들었다.

 

 

“우리 이천만 동포 형제가 과거 나태하던 습관을 영구히 버리고

각각 개명한 새로운 방식을 따라 행할 때

시작하는 일마다 일신우일신 힘써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한결같이 귀먹고 눈먼 병신처럼 옛 관습에 빠져있는가?

 

이것은 한심한 일이로다. 혹 이목구비와 사지오관의 육체에 남녀가 다름이 있는가? 
어찌하여 병신처럼 사나이가 벌어다 주는 것만 앉아서 먹고 평생을 깊은 집에 있으면서 
남의 제어만 받으리오. 우리보다 먼저 문명개화 한 나라들을 보면 
남녀평등권이 있는지라 어려서부터 학교에 다니며 각종 학문을 배워 
이목을 넓히고 장성한 후에 결혼을 하더라도 사나이에게 조금도 압제를 받지 아니한다.


이처럼 후대를 받는 것은 학문과 지식이 사나이 못지않은
까닭에 그 권리도 일반과 같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으리오...(중략)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와 같이 여학교를 설립하고 각기 여자아이들을 보내어
각종 재주를 배워 여성 군자들이 되게 할 목적으로 지금 여학교를 창설 하오니....
각기 분발하는 마음으로 귀한 여자아이들을 우리 여학교에 들여보내시려 하시거든 
바로 이름을 적어내시기 바라나이다."

 

9월 1일 여학교 통문 발기인 : 이 소사 김 소사 

 

 

 당시 황성신문과 독립신문 기사 내용

 

당시 황성신문은 ‘하도 놀랍고 신기하야“ 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놀라움을 표현했고 많은 사람들은 신기해하며 당황스러워 했었다고 전하며 
독립신문은 정부의 첫째 할 일이 여인교육이라며 지지를 보냈다고 한다. 여권통문의 발기인을 보면 이소사, 김소사로 표기되어 정확한 이름이 없다. 
소사란 아내 또는 홀어미라는 뜻도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여자를 높여 부르는 말로 소사라는 말을 썼다고 하니,

그야말로 이름 없는 평범한 100여 명의 북촌 여성들이 관립 여학교를 세워 달라고 요구한 여권 통문은  

주체적으로 살고 싶다는 우리나라 최초 여성들의 외침인 셈이다. 

 

 

또한 그녀들은 여권통문을 선포하는 것으로만 끝내지 않고

고종에게 관립 여학교를 만들어 달라는 상소를 올리고 고종의 허락을 받지만 학부에서 예산이 없다는 이유로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 후 스스로 찬양(贊養)회를 조직하여 순성여학교를 세우고 2년여 정도 운영했으나 재정난으로 문을 닫았다고 한다. 

이런 외침이 씨앗이 되어 10년 후에야 비로소 관립여학교, 경성여고보(경기여고의 전신)가 1908년 설립되기에 이른다.

 


오늘의 여성, 과거의 여성들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세상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하게 자신의 몫을 다하는 이름 없는 사람들에 의해서 돌아간다.

또한 여성의 삶은 어떤 사회를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녹록치 않은 시대와 사회를 만났지만 용기 있게 목소리를 내고 교육권을 주장했던 그녀들의 외침을 9월이 되면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

 

나의 할머니 그리고 나의 어머니의 삶이 그랬던 것처럼 평생 한 번 아름다워 보지도, 화려한 주목을 받아 본 적도 없지만,

묵묵히 가족에게 헌신하며 살아오신 그분들 덕분에 오늘 우리들에게 풍요로운 세상을 열어준 것은 아닌지,

오늘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누리고 사는 것들은 과거 누군가의 목숨을 건 용기와 눈물과 피땀의 결과라는 것을 기억해 주기를.
어떤 권리도 그저 얻어지고 주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