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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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 인터뷰로 만나는 겸재 '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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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겸재진경미술대전이 겸재정선미술관에서 7월 3일 열려, 대상 1편, 최우수상 1편, 우수상 2편, 장려상 5편

총 8편에 대한 시상식이 거행되었다. 서양화 부문의 「숨은길 찾기」가 대상을 받았다. 7월 23일까지 출품작이 전시된다.

 

대상 〈숨은 길 찾기 〉

       

겸재정선미술관은 1740년부터 1745년까지 양천현감으로 있으면서 경교명승첩, 양천팔경첩 등의

걸작을 남긴 정선을 기념하여 과거 양천현아지 인근인 현재 양천향교역에 2009년 건립하였다.

3층 건물로 전시기획실과 정선기념실, 진경문화체험실, 영상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어 정선의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다. 


영인본으로 정선 작품 124점이 전시되어 있다. 진품으로 산수도, 청하성읍도, 피금정도, 조어도, 귀거래도, 청풍계도를 소장하고 있다. 

 


겸재정선미술관

 

 

끊임없는 정진으로 화성(畵聖)이 되다.


-겸재 선생님, 제17회 겸재진경미술대전을 즈음하여 인터뷰하러 온

서울시50플러스 남부캠퍼스 최원국 기자입니다. 간단히 선생님 소개를 해 주시죠.

 

숙종 2년에 태어나 경종을 지나 영조 35년까지 당시로는 장수한 편인 84세까지 살았습니다.

태어난 곳은 북악산 아래 유란동(현 종로구 청운동, 현 경복고등학교 자리)입니다.

교정에 나를 기념하여 「독서여가」를 동판에 새긴 기념석을 만들었다고 하네요.

겸재는 아주 겸손한 선비라는 뜻인데 깊이 공부한 『주역』의 ‘겸손하게 나라를 다스리라’라는 구절에서 따왔지요.

평생 그림을 그리다 산 삶이었지요. 

 

-어떻게 조선 최고의 화성(畵聖)이 되었나요? 


14세에 부친이 일찍 돌아가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어요. 과거를 볼 형편이 안되어 선비가 할 수 있는 그림을 시작하였습니다.

윤선도 증손자 윤두서, 심익창의 손자 심사정도 같은 경우이었지요.

외조부 박자진 어른을 통해 율곡학파 선비들과 교류하며 글과 그림을 배웠습니다.

스승인 김창업 선생과 그 형제들, 이병연, 윤순 등 뛰어난 문인들과 교류할 수 있었던 것이 수준 향상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북악산과 인왕산은 서울 문인화의 중심이었지요. 


그러고 보니 제가 인복이 많은 편입니다.

과거를 보지 않았지만 38세 때 김창직 어른의 추천으로 위수라는 작은 벼슬을 얻은 후

계속 공직생활을 하였고 정조대왕은 청하현감, 양천현감 등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풍경이 좋은 곳으로 보내주셨지요.

1722년 신임사화로 김창집을 포함한 3명의 스승과 지인이 사망하는 것을 보고 권력의 무상함을 절감했지요.

음서로 관직에 나아갔기 때문에 구설에 오르기도 쉬워 항상 열심히 하려고 했습니다만

54세 의금부 도사 시절에 업무를 소홀히 하고 그림만 그린다는 제보로 곤장을 맞고 파직을 당한 적도 있었다오.

그다음부터는 더욱 조심하고 일을 끝내고 그림을 그리려고 했습니다.

관직과 그림 모두 잘하기가 쉽지 않았다오. 관직으로 간 곳이나 유람한 곳은 다 그림으로 남겼지요.

공직은 부업이고 그림이 주업이었지요. 
 

재능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한눈팔지 않고 계속 정진한 결과입니다.

중국에서 들여온 화보, 개자원화전 그림본을 보고 연습하는 등 시간 나는 대로 계속 그렸습니다.

제가 그린 개구리나 다람쥐에서 보듯이 면밀하게 관찰하고 항상 새롭게 그리려고 노력했습니다.

제가 쓴 붓을 다 모으면 무덤을 이룰 것입니다. 

 

 

진경산수화를 확립하다.


-어떻게 하여 진경산수화를 완성하게 되었나요?


스승 김창흡 어른이 금강산, 설악산을 자주 드나들며, 아름다운 우리 강산을 시로 읊어 영향을 받았고

진경시의 대가인 이병연(1671-1751)과는 평생에 걸친 지기가 되어 시화(詩畵)를 서로 교환한 것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당시 산수 유람문화와 기행문학이 성립한 것이 배경이 되었지요.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그려 오래도록 즐기고 싶고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이에게 그 공간 하나하나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실경산수와 회화식 전통에 근거하여 마침내 조선의 그림 속에 조선의 풍경과 사람들 모습이 등장하는 진경산수라는 새로운 양식을 만들었습니다.

진경산수화와 실경산수화의 차이점은 그대로 그리지 않고 경치의 본질 또는 진실까지 표현한 것이지요.

즉 작가가 경치를 보고 느낀 감동과 환희까지 그림 속에 표현한 그림입니다.

중국과 다른 조선의 자연과 사람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그러기 위해 남종화에서 쓰는 필법인 피마준, 수직준, 미점준 외에 묵찰법을 새로 개발하였습니다.

묵찰법은 붓에 묵을 잔뜩 적셔 문지르듯 힘있게 표현하는 방식이지요.

묵찰법을 인왕제색도, 박연폭포, 청풍계에서 사용하였습니다.

붓 2자루를 손에 쥐고 그려 속도감으로 화면의 생동감을 만듭니다. 
 


우리나라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전하기


-선생님의 대표작 세 작품으로 어떤 것을 들 수 있을까요? 


작품마다 사연이 있고 혼을 쏟아 부어 어느 것 하나 애정이 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굳이 세 작품을 고르라고 하면 박연폭포, 금강전도, 인왕제색도입니다. 
박연 폭포는 감흥으로 실제보다 폭포 길이를 길게 그렸지요. 금강전도는 59세 때 그린 그림입니다.

새가 하늘에서 조망하듯 한 눈에 들어오도록 부감법을 사용하였고 주역의 음양원리를 반영하여 강함과 부드러움,

수평과 수직, 점과 선, 흰색과 검은색이 대비를 이루면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 특징입니다.

인왕제색도는 평생지지 이병연의 임종을 앞두고 그를 위해 비 개인 인왕산을 그린 것으로

실제 바위는 흰색이지만 검은색으로 표현하여 질량감을 나타냈지요.


 
정독도서관에 있는 인왕제색도비

 

-선생님 그림을 통해 조선 산하의 아름다움을 알게 됩니다.

특히 한강변을 그린 한양진경을 통해 너무 개발해 파손된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겸재 선생님의 그림의 영향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 계시나요?

1,000원 지폐 뒷면에 있는 계상정거가 고화 사상 최고액인 34억 원에 경매되었고,

수성동은 아파트와 시멘트로 뒤덮인 수성동 계곡을 주거지 허물고 경관 복원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끝으로 후선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기탄없이 해 주세요.


조선의 산하에 대한 애정으로 평생 한눈팔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예전과 다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자연을 사랑하는 것이 애국심의 바탕이 됩니다. 잘 보존하여 후손에게 물려 주기를 바랍니다. 

 

 
            한양진경                                                                                                            계상정거

 

 

에필로그


정선 선생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었다.

인왕제색도를 그렸고, 진경산수화의 대가라는 정도가 전부이었으니.

이번 기회에 정선 선생을 만나보기로 했다. 물론 오래전에 돌아가셨으니 그림이나 기록으로 자취를 찾아보기로 했다.

양천에 있는 겸재정선미술관에 갔다. 9호선 양천향교역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다.

부근에 양천향교, 서악루, 양천고성지가 있어 문화체험을 마음껏 할 수 있다. 


가상 인터뷰 형식을 사용했다. 선생의 뜻을 잘못 전한 것이 있을까 봐 두렵다.

평생 정진하여 만든 겸재 선생의 작품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천천히 오래 보아야 할 것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작품을 감상하러 갈 것이다.

겸재의 진품은 겸재정선미술관, 국립중앙박불관, 간송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에 분산 소장되어 있다.

그곳에도 가서 작품을 보며 선생님과 가상의 대화를 즐기고 싶다. 

 

 

 

참고문헌 
박은순, 진경산수화를 완성한 화가 정선, 나무숲, 2011.
박차지현, 청소년을 위한 한국미술사, 두리미디어, 2005. 
조정육, 붓으로 조선 산천을 품은 정선, 아이세움, 2003.
안휘준, 한국회화의 전통, 문예출판사, 1990.
이동주, 한국회화사론, 열화당,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