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과 칸 사이 만화를 예찬하다
‘읽었’는데, ‘보았’습니다

 

 

 

어렸을 때 일입니다. 참 만화가 좋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재미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아무래도 더 부연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이를테면 슬픈 이야기인데도 재미있었습니다.

 

저는 위다(Ouida)의 소설 <플랜더스의 개(A Dog of Flanders)>를 동화책으로 ‘읽었’는데, 얼마 뒤에 만화로 다시 ‘보았’습니다. 감동은 다르지 않았는데 동화를 읽으면서 잔잔하게 스미던 안쓰러움이 만화에서는 거의 ‘쿵!’ 하는 소리를 내는 저린 아픔으로 지녀졌습니다. 지금도 저는 알루아가 넬로를 만나지 못하던 때의 모습이 뚜렷하게 기억됩니다. 다른 칸보다 조금 더 커다란 네모 칸 안에 꽉 차게 그려진 커다란 눈 하나, 그리고 그 눈에서 떨어지는 그만큼 커다란 눈물방울, 그리고 그 옆의 이른바 홈통(만화의 칸과 칸 사이)을 지나 다른 작은 칸에 그려진 ‘흑!’ 하는 말풍선, 그리고 다시 홈통 옆으로 길게 내려진 직사각형 칸에 가득 채워 그려진 알루아의 뒤돌아선 모습에다 그녀의 흔들리는 머리카락과 내딛는 발의 움직임…. 이 그림(이미지) 탓이겠죠. 저는 사춘기 내내 아름다운 소녀란 ‘눈이 큰 아이, 그 큰 눈에서 그 눈만큼 커다란 눈물을 뚝뚝 짓는 계집아이’였습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재미있었다고 한 표현은 ‘실감나게 즐겼다’고 해야 더 적당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만화는 이야기책보다 훨씬 저를 마구 흔들어놓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만화를 읽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옛날에는 요즘처럼 만화방이 없다거나 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만화를 읽는 것은 ‘못된 짓’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은 대체로 그러셨습니다. 그분들에게 만화란 아이들이 읽는 것, 꽤 자라면 벗어나야 할 잠깐 동안의 과정에서만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하물며 소설도 공부에 방해가 된다고 못 읽게 하셨던 시절이니 글이 아닌 ‘그림 나부랭이’를 책이라고 들고 있는 모습을 보시면서 진정으로 속이 상하셨을 것이 짐작이 되고도 남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많이 흘러 세상 또한 그만큼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사람살이를 글(문자, 또는 책)을 통해 만나고 알아야 한다는 당위가 이전처럼 권위를 갖지 못합니다. 그림(이미지라고 통칭할 수 있을 텐데)은 이제 옛날에 책이 지녔던 권위를 넘어서 스스로 홀로이지 않은 채 글도 소리도 색깔도 움직임조차 아우르면서 사람의 삶과 생각과 인식과 경험과 기억과 행동을 결정하여 마침내 삶을 되짓는 절대적인 자리에 올라서 있습니다. 영상문화의 현실을 우리는 생생하게 경험합니다. 그렇다고 문자의 퇴색이나 책의 소멸을 예상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까지 제 생각을 펼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는요.

 

다만 저는 만화라고 일컫는 문화를 잠깐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렇다고 만화의 기원론이나 발전사, 의미나 가치를 기술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알지도 못하거니와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제가 관심을 갖는 것은 왜 옛날 어른들께서 만화에 대한 ‘불신’을 지니고 계셨었는지, 그리고 지금 우리는 어른이 되어, 또는 나이 먹은 사람이 되어, 만화문화에 대한 어떤 태도를 지니고 있는지를 다듬어보고 싶을 뿐입니다.

 

모든 갈등의 처음 모습이 그렇듯이 저는 이 대목에서 ‘익숙함’과 ‘낯섦’ 간의 긴장을 유념하고 싶습니다. ‘글의 문화’에 익숙해 있으면 ‘이미지의 문화’에 대한 낯섦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낯섦에 대한 감추어진 판단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낯선 것은 ‘천박한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더 나아가 자신이 그것에 적응할 수 없을 때면 그 낯선 것을 아예 ‘못된 것’으로 치부해야 자신의 무능이 정당화된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들 합니다.

 

그렇다면 ‘글에서 이미지로의 전환’이라고 할 만화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가 지닌 낯섦은 어떤 것인지요. 우선 글은 글 안에 담긴 이야기를 독자 스스로 이미지화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미지는 그 몫을 없앱니다. 직접적이니까요. 그래서 소설이 영화화되면 많은 경우 그 소설의 독자는 자신이 지녔던 이미지의 왜곡, 변형, 나아가 파괴를 경험하게 됩니다. 처음부터 만화로 그려진 경우는 그런 일이 덜합니다만 이미 있는 이야기를 만화로 다듬으면 이러한 경험이 일고, 그것은 만화를 결과적으로 낯설어 천박하게 여기는 바탕이 되곤 합니다. 물론 시각적 이미지로 재구성한 이야기의 생동성을 간과할 수는 없지만요.

 

다음으로 글은 어떤 격한 계기들도 글 안에서 다룹니다. 읽는 사람은 글의 흐름을 따라가며 그 굴곡을 겪습니다. 그런데 만화는 글의 문법과는 다른 만화만의 문법을 가집니다. 칸, 홈통, 말풍선 등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만화적 문법은 ‘잔잔’하지 않습니다. 칸과 칸의 단절과 그 단절을 비약하면서 이어지는 연속, 거기에다 충분히 서술적이지 않은 말풍선의 개입 등은 철저하게 ‘소용돌이’입니다. 그러므로 칸의 단절과 연속을 좇기 위해서는 글의 문법과는 다른 의식의 움직임을 내가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소용돌이를 견뎌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실은 그 소용돌이가 만화의 만화다움입니다.

 

게다가 만화는 인물을 포함해 어떤 사물도 만화의 틀 안에 들어서면 그것 자체의 속성을 과장하여 드러냅니다. 일상적으로 내가 사물에 대해 가졌던 이미지가 철저하게 변형됩니다.

 

 

 

캐릭터의 출현은 이러합니다. 때로 그것은 괴기스럽기조차 합니다. 비약하는 상상력이 아니면 따라갈 수 없는 비현실성이 현실성을 지니고 의젓이 자리를 잡습니다. 그러면서 그 캐릭터는 이야기를 흐르게 하기보다 끊임없이 자기 안에 담습니다. 자기에게 귀착했다 다시 흐르도록 합니다. 그래서 만화는 글에 익숙한 자리에서 보면 ‘말도 되지 않는’ 모습으로 ‘읽혀’ 경박하기 그지없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만화는 그렇게 세상을 새롭게 ‘보도록’ 이미지를 재구성하여 다른 세상, 우리가 간과했던 삶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결국 만화를 즐기지 못하는 것은 칸의 단절과 연속을 빚는 홈통을 메꾸지 못하는 상상력의 빈곤, 그리고 말풍선의 여운에 메아리치지 못하는 유연하지 못한 경화된 사유 등이 그 까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만화도 여러 장르가 있습니다. 이야기 만화(comic strip)도 있고 한 칸, 또는 네 칸 등의 정형화된 이미지 만화(cartoon)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든 바야흐로 우리 삶 속에서 이야기와 이미지를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새로운 문화가 펼쳐지고 있는데 이를 간과한다는 것은 게으른 삶이라고 지탄받기에 꼭 알맞습니다. 그렇다면 ‘만화를 못 읽는 늙은이’가 되기보다 ‘만화도 읽는 노인’으로 살면서 자신이 여전히 풍부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유연한 사고를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실증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만화는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지극히 실용적인 잣대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만화도 좋은 만화가 있고 못된 만화가 있습니다. 세상살이가 그러니까요. 그래서 그것을 분별하기 위해 혹 좋은 만화를 추천해주면 어떻겠냐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이에 대한 제 대답은 분명합니다. 필독도서목록을 만드는 일은 금서목록을 만드는 일과 구조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더구나 어른들 앞에선데요.

 

아무튼 저는 만화를 즐깁니다. 글 읽기보다 ‘재미’있으니까요. 만화적으로 과장한다면 ‘만화를 읽으면 늙지 않으니까’요.

 

 

 

 

정진홍 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