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예찬 : 서울한양도성 백악 구간과 환기미술관

 

1970년대 초반 초등학교 3학년이던 나는 일요일 아침이면 아버지와 오빠를 따라 동네 뒷산으로 산책을 갔다. 산을 조금 오르면 운동기구가 있고, 그 옆에 간이매점이 있었다. 젊은 아버지는 평행봉을 멋지게 도시고 나서는 매점에서 커피를 한 잔 하시면서 오빠와 나에겐 달걀 프라이를 사주셨다. 봄이면 산에서 버찌를 따먹고 어느 여름인가는 계곡으로 물놀이도 갔다. 그 산이 바로 삼각산(三角山, 북한산의 본디 이름으로 백운대(白雲臺), 인수봉(仁壽峰), 만경대(萬景臺) 세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어 그런 이름이 붙었다.)이다.

 

20대 초반, 한 달에 한두 차례 삼각산에 오르고 주변의 인왕산, 도봉산, 관악산을 오르면서도 산은 멋졌으되 서울이 좋은 줄 몰랐다. 그러다가 마흔 중반 한양도성 백악구간을 걸어보고서야 비로소 나는 서울이 얼마나 매력적인 곳인지 알게 되었다. 내가 서울을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자연환경이 탁월하기 때문이다. 북으로는 삼각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남쪽으로는 한강이 흐른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최적이라는 배산임수의 조건을 갖췄다.

 

 

세상에 둘도 없는 경치, 서울한양도성 백악 구간

서울의 수많은 유적과 명승지 가운데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당연히 한양도성 순성길 중 백악 구간이다. 혜화문(惠化門)에서 창의문(彰義門)에 이르는 4.7km 남짓한 이 길을 걸으려면 3시간가량 걸린다. 산의 지형에 따라 축조된 성곽이기 때문에 때론 가파르기도 하고 때론 완만하기도 하다. 이 구간을 창의문에서 출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주로 혜화문에서 시작한다. 백악산 정상에서 창의문까지의 구간이 경사가 심한 편이기도 하고 길을 가면서 바라보는 경치가 이 방향이 더 좋기 때문이다.

 

출발지 혜화문을 지나면 옛 서울시장 공관인 혜화동 전시안내센터가 나온다. 높게 둘러쳐진 담의 아랫부분에 성곽의 흔적이 남아 있다. 길을 따라 경신고등학교까지 가다보면 중간 중간 성곽이 담장으로 쓰이기도 하고 성곽의 돌을 가져다 담을 쌓기도 하고 해서 성곽의 형태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우리 역사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애잔하다. 서울과학고등학교를 지나면 본격적으로 성곽이 나타난다. 그곳에서 와룡공원에 이르기까지 성 밖으로는 성북동의 풍경이 펼쳐진다. 와룡공원 옆으로 길을 걷다보면 암문이 나오는데, 그곳을 빠져나가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온 듯 오래된 마을이 펼쳐진다. 북정마을이다. 북정마을에는 성북동 비둘기의 시인 김광섭과 만해 한용운이 살던 '심우장'이 있었다.

 

   
▲성곽의 암문을 통해 성북동으로 내려가는 길(좌), 숙정문 부근의 풍경(우, 사진출처: 서울한양도성 홈페이지)

 

 

동서남북으로 펼쳐지는 파노라마, 백악 곡성

말바위 안내소에서 신분증을 보여주고 출입증을 받는다. 조금 더 걸으면 숙정문(肅靖門)에 다다른다. 한양 도성의 북대문(北大門)인 숙정문은 남대문인 숭례문(崇禮門)이 예를 숭상한다는 의미인데 비해 엄숙하게 다스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소나무 보호 군락지를 지나 백악 곡성에 이르면 광화문과 경복궁, 남산과 한강 남쪽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1968년 김신조가 청와대를 습격하려다 우리 군경과 총격전을 벌인 1.21사태 소나무에는 아직도 총탄 자국이 선명하다. 백악산의 정상인 백악마루를 지나면 이제부터 내리막 계단이 이어진다. 급경사인 만큼 힘이 들지만 눈앞에 펼쳐진 전망이 빼어나다. 건너편으로는 인왕산과 성곽이 그림처럼 펼쳐지고 오른쪽으로는 부암동이 내려다보인다. 창의문 안내소에 도착하면 말바위 안내소에서 받았던 표찰을 돌려주고 창의문으로 나온다. 창의문은 '사적 제149호'로 지정된 4소문 중 하나이다. 백악과 인왕산이 만나는 곳에 위치하는데, 지금은 창의문보다는 자하문이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졌다.

 

   
▲암문 부근의 성벽, 축조된 시기에 따라 돌의 크기와 모양이 다르다(좌), 창의문(우) 사진출처: 서울한양도성 홈페이지

 

 

김환기와 환기미술관 

한양도성 백악 구간은 이렇게 끝이 난다. 하지만 근처에서 차를 마시거나 식사를 하며 잠시 다리를 쉬고, 이제는 부암동을 잠시 들려볼 차례다. 한국의 화가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김환기의 그림을 볼 수 있는 환기미술관이 지척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김환기의 푸른빛을 좋아한다. 신안의 드넓은 바다를 보고 자라서인지 그의 파란색은 스펙트럼도 다양하고 따뜻하기까지 하다. 한국 단색화의 열풍을 타고 김환기의 작품이 세계 화단에서 주목받고 있다. 최근 경매에서 그의 작품은 85억이 넘게 거래되었다.

 


▲김환기의 작품

 

1992년 문을 연 환기미술관은 미국에서 활동 중인 건축가 우규승의 작품이다. 우규승은 88올림픽 선수촌 아파트와 광주아시아문화전당을 설계했다. 환기미술관은 산기슭이라는 지형을 그대로 살려 공간미를 추구했다. 미술관 3층에는 서쪽으로 난 큰 창이 있는데, 그 창으로 인왕산이 한 폭의 산수화처럼 펼쳐진다. 언제부터인가 창을 블라인드로 가려놓아 그 멋진 풍경을 볼 수 없어 아쉽기만 하다. 미술관의 1층 중앙홀 바닥에는 비가 오는 날이면 옥상에 설치한 박중흠 작가의 <빛 우물>이라는 작품을 통해 빗방울 떨어지는 모습이 그림자처럼 흔들린다. 그 모습이 얼마나 오묘한지 말로는 표현할 길이 없다. 미술관 마당과 오른쪽 계단 위 구석진 정원에는 조각가 한용진의 소박한 작품들이 무심하게 서 있다. 김환기의 그림과 우규승의 건축, 그리고 자연환경이 어우러진 환기미술관은 언제나 나를 행복하게 한다. 

 

   
▲환기미술관 입구(좌), 환기미술관에 있는 조각가 한용진의 작품(우)

 

부암동에는 이곳 이외에도 무계원, 자하미술관, 석파정, 백사실계곡 등 가볼 만한 곳이 수두룩하다. 지면이 좁아 다 소개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무계원(좌), 자하미술관에서 바라본 부암동과 평창동(우)

 

서울 한복판에 자리한 부암동과 한양도성은 그 지리적 접근성과 빼어난 경치 덕분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누군가 내게 외국인에게 가장 추천하고 싶은 관광지를 묻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서울한양도성 백악 구간을 들 것이다. 사시사철 색다른 모습을 선사해주는 그곳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